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2화
농부가 된 것처럼, 봄이 오면 루시도 덩달아 바빠지곤 했다.
공작저에는 그녀가 애지중지 가꾼 텃밭이 있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밭갈이와 씨뿌리기를 하느라 최근에는 그곳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약초와 갖가지 식물을 이용한 약을 만들고, 의학원에서 배운 의술로 봉사를 다니느라 루시는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랐다.
바쁜 건 가주인 필릭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거의 매일 집무실에 박혀 일했고, 업무를 위해 집을 비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다 보니 둘은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도 쉽지 않았다.
오전 내내, 텃밭 위를 돌아다니던 루시가 마침내 소매로 땀을 훔치며 일을 정리했다.
문득 고개를 든 그녀는 필릭스의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창문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필릭스가 업무를 위해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기 때문이다. 주인 없는 집무실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마찬가지로 외로운 마음을 안고 방으로 돌아오니 테이블 위에 웬 종이가 있었다. 하인이 가져다 둔 것으로 보이는 그 메모에는 필릭스의 필체로 단 두 문장만이 휘갈겨져 있었다.
두 시. 베델 광장 분수대 앞.
글씨를 읽은 루시의 입에 금세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당장 흙 묻은 옷을 벗어 던진 뒤, 얼른 욕탕으로 가 몸을 씻었다.
물기를 닦아 낸 뒤에는 옷장을 열어젖혔다. 집에 있을 때면 항상 무채색의 편안한 옷을 입었지만, 오늘 그녀의 눈에 띈 것은 제법 발랄하고 귀여운 드레스였다.
옷까지 갈아입은 루시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어디선가 꺄르르, 웃는 쌍둥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놀이 시간이었으니 보모와 함께 가정 교사가 아이들을 돌봐 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마음을 놓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루시가 계단을 모두 내려온 순간.
놀이방에서 나오던 쌍둥이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가정 교사의 손을 잡고 걷던 녹스와 에스턴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루시는 얼른 계단 뒤로 숨으려 했지만, 이미 두 아이가 루시를 발견한 뒤였다.
“엄마!”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쌍둥이는 루시를 불렀다.
“엄마, 어디 가?”
“아무 데도 안 가. 그냥 텃밭에 가려는 거야.”
“그렇게 입고?”
아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녹스와 에스턴이 가정 교사의 손을 놓고 루시에게 달려왔다. 그녀가 미처 자리를 벗어나기도 전에 쌍둥이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어디 가는데?”
“아무 데도 안 간다니까?”
“거짓말! 그럼 이건 왜 입었어?”
“그냥 입은 거야!”
“나도 갈래!”
“나도 데려가!”
루시의 거짓말은 아이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도 엄마랑 놀고 싶어!”
“나도 엄마랑 놀고 싶어!”
뒤에서는 가정 교사와 보모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자신들은 이 엄마 껌딱지 같은 아이들을 도저히 떼어 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기응변이 통하지 않자, 루시는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휴, 그래 맞아. 엄마 놀러 가는 거야.”
“나도 갈래.”
“나도 따라갈래!”
“그래, 그래.”
루시는 쌍둥이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다가 슬쩍 말을 흘렸다.
“로제 이모도 너희 보고 싶대.”
그 말에 루시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던 녹스와 에스턴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로제 이모?”
당황한 눈빛으로 되물은 아이들이 갑자기 치맛자락을 놓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응, 오늘 로제 이모 보러 나가는 거거든.”
아이들은 갑자기 말을 잃었다. 무슨 기억을 떠올리는지 빤히 보여 루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지난 가을, 공작저를 방문한 로제에게 놀아 달라 떼를 쓰던 아이들은 겁도 없이 술래잡기를 제안했고, 로제는 곧바로 구두를 벗었다.
쌍둥이는 항상 자신들에게 져 주던 엄마와 보모를 떠올리며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술래의 역할을 로제에게 기대했겠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로제가 쌍둥이를 정원의 넓은 공터로 데려간 지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공작가에는 아이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루시와 필릭스가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목도한 것은, 치마를 비장하게 걷어 올린 채 무지막지한 속도로 쌍둥이를 뒤쫓고 있는 로제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것인지, 쌍둥이들은 그 뒤로 로제의 ‘로’ 자만 들어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곤 했다.
“왜 그래? 따라가고 싶다며? 셋이서 로제 이모를 보러 가자.”
도리도리.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왜? 너희도 가고 싶다며.”
도리도리.
쌍둥이들은 둘끼리 눈짓을 주고받은 뒤, 얌전히 루시에게 인사를 했다.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그런 뒤 재빨리 가정 교사에게로 달려갔다. 가정 교사의 손을 꼭 잡은 쌍둥이가 교사를 재촉하며 얼른 다른 데로 가자고 했다.
얌전히 교사와 보모를 따라가는 쌍둥이를 보며 루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 * *
베델 광장.
마차에서 내린 루시가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키가 큰 필릭스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다.
필릭스도 그녀를 단번에 발견하곤 손을 흔들어 주었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며 그에게 달려간 루시가 곧장 그를 껴안았다.
이렇게 둘이서만 데이트를 하는 게 얼마 만인지.
“필릭스, 많이 기다렸어?”
그는 루시를 마주 꼭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당신을 기다리는 데 ‘많이’라는 건 없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나직하게 울렸다.
“난 항상 당신을 기다리고 있거든.”
곧 루시를 놓아준 그가 손을 맞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오늘따라 사람이 더 많아 보이는데.”
루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로 꽉 찬 광장을 두리번거렸다.
“봄 축제 날이니까.”
“아.”
그제야 루시는 날짜를 떠올렸다. 한동안 텃밭 일과 쌍둥이를 신경 쓰는 것 때문에 축제가 다가왔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꼭 축제 때문은 아니더라도,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이렇게 너랑 걷고 싶었어.”
그의 말대로 하늘은 쾌청했고, 온도는 적당히 따뜻했다.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누구도 못 배길 만한 날이었다.
둘은 손을 꼭 잡은 채 인파를 헤쳐 나갔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둘만의 시간이었기에 조용히 걷고 싶었지만, 뜻처럼 되지만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은근한 시선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긴 금발과 푸른 눈. 수려한 얼굴.
일찍이 베르크 공작의 상징이 된 그 외모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루시가 타고 온 공작가의 마차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베델 광장에 베르크 공작 부부가 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리고 공작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저 여자가 바로 소문의 그 평민 출신 공작 부인이라는 것까지도.
자신들을 향한 은근한 시선을 곧 필릭스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을 피해 루시를 데리고 잡상인들이 즐비한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다.
길 양쪽으로 끝없이 설치된 가판대, 호객을 하는 잡상인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건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루시는 잠시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이 스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따돌리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던 어느 소녀와 소년.
자신과 같은 기억을 떠올린 것일까. 눈이 마주치자 필릭스가 슬며시 웃어 보였다.
둘이 다정히 걷는 거리. 정수리를 비추는 봄볕이 제법 눈부셨다.
필릭스는 어느 가판대에서 여성용 챙 모자를 하나 샀다. 그가 모자를 루시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태양이 눈부시니까.”
직접 턱 아래에 리본까지 묶어 주며 필릭스가 말했다.
문득 루시는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또 우리 부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건가?
하지만 둘을 쳐다보고 있던 것은 주변에 서 있던 앳된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다정한 손길로 리본을 매듭짓는 필릭스와 루시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 보니 필릭스를 향해 흠모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그 아가씨들뿐만이 아니었다.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루시의 머리카락까지 정리해 준 필릭스가 루시를 보며 자상하게 웃었다.
그런 필릭스의 미소를 바라보며 루시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눈부신 건 태양이 아니라 당신 얼굴인 것 같다고.
“이제 갈까?”
루시와 필릭스는 모자를 팔던 가판대 앞을 떠나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자를 산 후에도 필릭스는 무언가를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신이 뭘 찾는지 내가 맞춰 볼까?”
루시가 물었다.
“뭔데?”
필릭스가 한 번 맞춰 보라는 듯 턱을 까딱이자, 루시가 그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가판대 앞에서 멈춰 선 루시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이거.”
그녀의 손끝에서 크리스털 목걸이가 햇빛을 받아 빛을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