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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1화 (116/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1화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숫자를 다 헤아린 루시가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따사로운 봄볕 속에 잘 정리된 정원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선가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으음, 어디부터 살펴볼까?”

누가 들으라는 듯 크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오는 것만 같았다. 루시는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찾아 조용히 발을 옮겼다.

얼마 후 살금살금 다가간 정원수 사이에서 작고 꼼지락거리는 두 발을 발견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찾아내는 것은 금물이었다. 아이가 긴장감을 즐길 수 있도록 근처를 배회하며 적당히 못 찾는 척도 해 주어야 했다.

루시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 뻔한 나무 뒤나 화단 너머를 확인하며 힘든 척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도 없네! 대체 어디에 숨었지?”

그렇게 나름대로 몇 번의 연기를 거치고 난 뒤 루시는 아까 두 발을 발견한 정원수 사이로 다가가 이파리를 양쪽으로 치웠다.

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과 호수처럼 파란 눈이 그 속에서 나타났다. 곧, 그 한 쌍의 눈이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고 반달처럼 휘어졌다.

“찾았다!”

루시의 외침에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온 아이가 냉큼 안겼다. 루시는 아이를 꼭 끌어안은 뒤 부드러운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럼 녹스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좀 더 까다로웠다. 종종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부모를 놀라게 하는 녹스는 둘째 에스턴처럼 정원수 사이나 벤치 뒤처럼 진부한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체 어떻게 기어들어 간 것인지 루시는 덤불 아래에서 꼼지락대는 작은 두 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놀아 주던 상황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루시가 이마를 짚었다. 저 아래 꾸역꾸역 기어들어 간 아이의 상태가 멀쩡할 리 없었다. 분명 머리와 옷, 얼굴까지 엉망진창이 되었을 테지.

루시는 아이를 위해 연기를 해 줄 생각도 못 한 채, 당장 덤불로 달려갔다.

“찾았다, 녹스!”

루시가 얼른 손을 뻗어 덤불 아래서 아이를 빼냈다. 예상대로 아이의 온몸은 금세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간신히 한숨을 삼킨 루시가 아이의 옷에 붙은 풀과 먼지들을 털어 주며 말했다.

“자, 내가 둘을 찾아냈으니 이제 너희가 술래야.”

“아니야.”

녹스가 냉큼 부인했다.

“뭐가 아니야?”

“나 녹스 아닌데?”

아이가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나 에스턴이야, 엄마.”

“뭐? 에스턴은 아까 찾았어. 저기 나무 사이에서.”

루시는 아까 둘째를 찾아낸 정원수 사이를 가리켰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앞에 서 있던 에스턴은 보이지 않았다.

“그거 에스턴 아니야. 나였는데?”

작당한 두 아이가 또 엄마 놀려 먹기에 들어간 듯했다.

“녹스는 못 찾았으니까, 엄마가 또 술래야.”

……라고 녹스가 말하며 쪼르르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어느새 똑 닮은 두 아이가 멀리서 엄마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엄마, 빨리!”

쌍둥이가 재촉했다.

어쩔 수 없었다.

루시는 한숨을 내쉬며 이 끝나지 않는 숨바꼭질을 위해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 * *

정원에서 한바탕 놀고 난 다음이면, 쌍둥이는 꼭 벤치에 나란히 앉아 루시를 기다렸다. 그러면 루시가 한 명씩 무릎 위에 앉힌 뒤, 머리카락 사이에 박힌 도깨비바늘이며 풀잎 같은 것들을 일일이 떼 주곤 했다.

아이들은 엄마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그대로 머리를 맡긴 채 꾸벅꾸벅 졸기 바빴다. 루시로선 차라리 편했다. 두 아이가 얌전해지는 몇 안 되는 시간 중 하나였으니.

“녹스, 엄마가 머리 잘라 줄까?”

그 말에 꾸벅꾸벅 졸던 아이가 눈을 번쩍 떴다.

“내 머리?”

“응, 이만큼만 이렇게 자르자.”

“싫어!”

아이가 확고한 얼굴로 말했다.

그 소리에 옆에서 함께 졸던 에스턴도 깜짝 놀라 일어나 덩달아 소리쳤다.

“나도 싫어!”

루시는 한숨만 내쉬었다.

쌍둥이들은 똑같아서 잘 구분할 수 없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자랄수록 더욱 똑같아졌다.

물론 자세히 보면 구분이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구별이 힘드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 모양이라도 다르면 분간하기 수월할 텐데.

하지만 쌍둥이는 둘 다 머리를 기르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녹스, 머리를 자르면 아주 잘생겨 보일 거야. 그러니까 네가…….”

“싫어!”

녹스가 또다시 확고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빠랑 똑같은 머리가 좋아!”

그랬다. 쌍둥이가 긴 머리를 고집하는 건, 모두 제 아빠 때문이었다. 아마 필릭스가 머리를 자르지 않는 이상, 쌍둥이는 둘 중 어느 한쪽도 결코 머리를 자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난 머리 안 자를 거야!”

“나도 안 자를 거야!”

“넌 잘라!”

“싫어, 네가 잘라!”

쌍둥이가 서로를 밀치며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결국 루시가 쌍둥이를 말렸다. 아이들은 다시 얌전해졌지만, 더 이상 머리에 관한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 * *

흙투성이가 된 몸을 씻기기 위해 보모가 와서 쌍둥이를 데려갔다.

그 후,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루시는 엉망이 된 게 아이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수리에 붙어 있던 나뭇잎을 떼어 낸 후, 루시는 터덜터덜 이 층으로 올라갔다. 기운 넘치는 아이들과 놀아 주느라 삭신이 쑤시는 것 같았다.

“이제 완연한 봄이구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복도를 걷던 루시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파란 하늘 아래, 공작가의 하인들이 잘 가꾸어 놓은 화단마다 글라디올러스가 선명한 빛깔을 자랑하며 피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철제 울타리에도 붉은 장미들이 빽빽했다.

나뭇가지에서는 자그맣고 통통한 새들이 포로롱 날아오르며 이따금 작은 소란을 일으켰다.

루시는 창턱에 팔을 괸 채, 그 평화롭고 그림 같은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봄볕에 달구어진 저택은 한없이 따뜻하고 포근한 인상만을 주었다.

9년 전 가을, 처음으로 공작저를 마주하며 느꼈던 두려움과 긴장감은 이제 아득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 이곳은 그녀의 집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녀가 머물 곳이기도 했다.

루시는 창턱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복도 끝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는 대대로 베르크 공작들이 업무를 보아 온 집무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 일찍 그 안으로 들어간 필릭스는 반나절이 지나도록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고 있는 거겠지.

살짝 문을 열고 들여다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괜히 그를 방해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꾼 루시가 곧 몸을 돌렸다.

쌍둥이와 놀아 주느라 금세 허기가 졌다. 아까부터 뱃속에서는 요란하게 뱃고동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루시는 간단히 허기를 채울 생각으로 주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온종일 식사를 준비하는 하인들로 분주한 메인 주방과는 달리, 이 층의 간이 주방은 언제나 한산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찬장을 열어 그릇과 재료들을 꺼냈다.

빵 위에 잼을 바르고 있는데, 따뜻한 손 하나가 슬며시 목 뒤에 와 닿았다.

익숙한 온도와 감촉.

뻐근한 루시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은 곧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만가만 빗어 내리기 시작했다.

“왜 머리카락에 지푸라기가 붙어 있는 거야? 마구간에서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어?”

그 질문에 루시가 눈을 매섭게 뜬 채 팔짱을 끼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푸른 눈과 아름다운 금발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살짝 얄미운 느낌이 드는 얼굴.

“누굴 똑 닮은 우리 아들들 덕분이지.”

“애들이 또 사고 쳤어? 내가 혼내 줘야겠다.”

필릭스가 루시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업무는 대충 끝났으니까 이제 애들은 내가 볼게. 당신은 푹 쉬어.”

그 말에도 루시가 팔짱을 풀지 않자, 필릭스가 시무룩해진 얼굴을 루시의 어깨에 뭉그적거렸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의 감촉에 루시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내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필릭스가 고개를 들었다.

곧 그의 입술이 루시의 입술 위로 겹쳐져 왔다. 그에 답하며 루시도 필릭스의 목에 팔을 둘렀다.

커다란 키 때문에 루시는 한껏 까치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루시는 단단히 필릭스의 목에 매달렸다.

움찔, 하고 놀란 필릭스의 숨이 한층 더 거칠어졌다. 그가 더욱 거칠게 입술을 부딪쳐 오기 시작했다.

루시의 상체가 필릭스의 힘에 떠밀려 천천히 뒤로 기울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잼이 듬뿍 발린 빵이 놓여 있었고, 곧 그녀의 등에 짓눌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언젠가 연못에 풍덩 빠졌던 웃지 못할 기억이 순간 떠올라 그녀는 다급히 필릭스의 팔을 붙들었다.

……이러다가 또!

그러나 그녀가 경고하기도 전에 필릭스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손이 가볍게 빵을 옆으로 밀어 치웠다. 그런 뒤 그는 루시를 번쩍 들어 조리대 위에 앉혔다.

빵이 짓뭉개지는 서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능숙한 혀가 다시 침범해 들어올 뿐이었다.

키스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고, 주방은 열린 잼 통의 달짝지근한 향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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