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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5화 (115/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5화

아드리안은 다른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부리나케 호텔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황망한 얼굴로 거리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레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 씨.”

어디선가 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레이 씨!”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아드리안은 이내 발을 돌려 다시 출판사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조급한 발걸음이 빠르게 거리를 내달렸다.

순식간에 출판사 앞에 도착한 그가 숨 돌릴 틈도 없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사장실 앞에 당도한 뒤, 그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글렌 씨.”

갑자기 되돌아온 아드리안을 보며 사장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레이 씨가 사는 곳을 알고 있습니까?”

“예?”

뜬금없는 질문에 글렌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 녀석이 왜요?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무언가 오해한 듯한 글렌이 물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다른 말할 시간이 없다는 듯 재차 물었다.

“레이 씨의 집 주소요!”

“진정하세요, 나 참.”

글렌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주소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쯤 떠나고 없을 겁니다. 그만둔 지가 벌써 이틀 전인데요? 걘 원래 한 집에 오래 머물지 않아요. 아마 이 도시에 남아 있을지도 의문인걸요.”

“빨리 집 주소나 주십시오!”

“아이고, 깜짝이야!”

아드리안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글렌이 자리에서 화들짝 튀어 올랐다. 그는 평소와는 다른 아드리안의 거친 태도에 황당한 얼굴을 하며 서랍을 뒤적였다.

“알겠어요, 알겠어. 내 참. 여기 그 녀석 신상이 적힌 이력서가 어디 있을 겁니다…… 네, 여깄네요.”

아드리안이 그의 손에서 조급하게 종이를 빼앗아 들었다.

레이가 사는 곳은 여기서 마차로 조금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드리안은 글렌에게 인사도 없이 사장실을 박차고 나왔다.

출판사 밖으로 나온 아드리안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갑자기 타고 갈 마차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레이의 집 주소를 생각하며 길을 내달렸다.

숨이 차올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그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면.

자신의 유치한 행동의 이유를 그녀에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거의 20분을 쉬지 않고 뛰어 그는 마침내 레이가 살고 있다는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호실을 찾아 그가 계단을 올랐다.

301호.

아드리안이 그 앞에 도착해 나무 문을 두드렸다.

“레이 씨.”

“…….”

“레이 씨, 안에 있습니까?”

쾅쾅.

그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레이 씨!”

그때, 옆집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복도를 내다보았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그가 문을 두드리던 아드리안을 향해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집에 사는 여자가 언제 나갔는지 혹시 보았습니까?”

아드리안이 절박한 마음으로 남자에게 물었다.

“……여자? 그건 잘 모르겠고 웬 남자가 어제 이사를 가는 건 봤는데. 그런데 계속 그렇게 시끄럽게 문을 두드릴 거요?”

짜증이 뒤섞인 남자의 물음을 뒤로 한 채, 아드리안이 문 앞을 떠났다. 세차게 달려올 때의 모습과는 다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 보였다.

* * *

“신작 반응이 아주 좋습니다!”

글렌 사장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이 기세로는 이전 판매 부수를 훌쩍 뛰어넘을 거예요! 정말 대단합니다!”

이어 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드리안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들은 아드리안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표정이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자신의 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손으로 슬며시 표지를 쓸어 내렸다.

표지를 궁금해했었는데. 어디선가 내 책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그 어디서도 레이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글렌 사장도 그녀가 어디론가 떠났을 거라고, 한동안은 이 도시에서 볼 수 없을 거라는 말만 했다.

대화가 끝난 후, 아드리안은 씁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없이 거리를 걷던 그는 어느 찻집을 발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시킨 후, 펜과 종이를 꺼냈다.

이제 이 도시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하나의 도시 여행을 마무리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조카들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여행 중 겪었던 재미있고 신기했던 일들을 풀어놓으면 아이들은 참 좋아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좀처럼 문장을 시작하지 못한 채, 아드리안은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즐거운 기억을 떠올리자면, 온통 한 사람에 대한 기억뿐이었기 때문이다.

해맑은 얼굴로 염색약과 이상한 변장 도구들을 꺼내던 레이.

빗속을 뚫고 자신을 위해 디저트를 사서 달려오던 레이.

혼자서 수많은 기자들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던 레이.

아무 걱정 말라고, 꼭 지켜 주겠다 말하던…… 레이.

아드리안의 손에서 펜이 툭 떨어졌다. 잉크가 종이를 까맣게 물들여 갔다.

좋은 기억은 모조리 레이와의 시간뿐이었다. 그 외에는 편지에 적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아드리안은 한 줄도 적지 못한 채 다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점원이 찻잔을 들고 다가왔다.

“손님, 차는요?”

아드리안은 말없이 테이블 위에 돈만 올려 둔 후, 찻집을 나왔다.

자신의 기분을 더 망쳐 놓기라도 하려는 걸까.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선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투둑투둑, 빗방울이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그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갑자기 시작된 비에 거리의 사람들은 준비한 우산을 펼치거나 들고 있던 겉옷으로 비를 막은 채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달리지 않았다. 그의 옷이 점점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렇게 걷던 중.

갑자기 비가 멈췄다. 아드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비를 피해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아드리안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하늘이 아니라 우산이었다.

“감기 걸려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드리안이 홱 돌아보았다. 그곳엔 믿을 수 없게도 레이가 서 있었다.

“레이 씨.”

“왜 우산도 없이 걷고 있는 거예요?”

“…….”

혹시 환영인 걸까.

아드리안은 멍하니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라인하트 씨?” 하고 부르며 얼굴 앞에 손바닥을 내저었다.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다가 레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어 그녀가 가방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다. 아드리안의 신작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녀가 제일 앞장을 펼치더니 아드리안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그 페이지에는 단 한 줄만이 인쇄되어 있었다.

레이 씨, 제 이름은 아드리안입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레이가 물었다.

“그러니까…… 라인하트 씨는 필릭스 베르크 경이 아닌 건가요?”

“아닙니다.”

아드리안이 떨리는 숨을 뱉어 내며 말했다.

“필릭스는 제 쌍둥이 형입니다.”

“아.”

그제야 레이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 이름은 아드리안 베르크이고, 9년 전 전쟁에는 나간 적이 없습니다. 기사였던 적도 없고, 당신을 구덩이에서 구한 적도 없지요.”

아드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는 눈앞에 선 여자의 표정을 가늠해 보려고 했지만, 알 수 없었다. 레이는 이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실망했나요?”

“네? 무슨 실망이요?”

“제가 필릭스가 아니어서요. 9년 전 당신을 구한 그 친절한 남자가 아니어서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레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한 번쯤은 필릭스 경을 다시 만나 그때의 일에 대해 고맙단 말을 하고 싶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고작 날 한 번 도와줬단 이유로 좋아하지는 않는단 말이에요!”

레이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주변 사람들이 둘을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제가 당신한테 호, 호감을 보였던 건 당신을 필릭스 경이라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함께 지내며 본 모습들이 좋아서였어요! 당신의 글이랑, 자상한 말투랑, 웃는 모습이랑, 나긋나긋한 목소리랑, 그…… 그 잘생긴 얼굴이랑, 아, 이건 필릭스 경도 그렇지만, 뭐, 아무튼! 그런 게 날 설레게 했다구요! 아니, 근데 지금 제가 길 한복판에서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죠?”

레이는 빨개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어찌나 빨갛던지 머리에서 김이라도 날 것 같았다.

후둑후둑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 속에서 정적이 흘렀다. 레이는 이제 뾰로통한 얼굴로 아드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전에 레이 씨에게 보였던 태도들 말입니다.”

“당연하죠. 그게 뭐예요? 사춘기 애처럼.”

“사실은 저도…… 레이 씨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더 얘기하고, 알아보고 싶어요.”

아드리안의 솔직한 말에 레이가 살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인 건…… 저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단 뜻인가요?”

“다, 당연하죠. 그,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말하면 제가 어떻게 거절을 해요.”

마침내 기분이 풀린 것 같은 레이가 농담을 던지며 씩 웃었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고요?”

레이가 아까 아드리안이 나온 찻집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아드리안 씨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좀 있는데…… 들어가서 대화나 나눠 볼까요?”

멍한 얼굴로 서 있던 아드리안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가 한 번 더 웃으며 찻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사람 위에 씌워진 우산 하나가 다시 거리를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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