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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4화 (114/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4화

“아…….”

아드리안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 그의 눈에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레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그때 제 처지가 그리 좋지 못했거든요. 원래 용병들이 전쟁터에서 처우가 그리 좋진 않아요. 그런데다 전 여자니, 말 다 했죠, 뭐.”

레이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듯 술잔을 만지작대며 이야기했다.

“그날도 비가 엄청 내리는데 저만 발이 미끄러져 구덩이에 빠졌었어요. 전투화라고 새로 나눠 준 게 제 발에는 엄청 컸거든요. 아무튼 도와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나쁜 새끼들! 아, 욕해서 죄송합니다. ……그때 유일하게 달려와 준 게 바로 당신이었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 안 나시죠?”

레이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마 기억 안 나실 거예요. 대화를 나눠 본 적도 그때 딱 한 번뿐이었고……. 경은 제 존재 자체도 모르고 계시는 것 같더라고요.”

“…….”

“그때 제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지금이라도 이 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때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필릭스 경.”

“…….”

“저…… 라인하트 씨?”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세요? 표정이 안 좋은데요.”

그녀가 물었지만 아드리안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설렘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듯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실망스런 기분조차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예에?”

아드리안의 갑작스런 질문에 레이는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 마음에 들었냐고요? 왜, 왜 그런 질문을…….”

레이는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눈이 둘 데를 모르고 이리저리 데굴거렸다.

“그, 그런 질문은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레이의 말을 듣고 있던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어?”

“이만 일어나죠.”

“예? 아, 네네.”

아드리안은 레이의 시선을 피하며 카운터로 갔다. 레이는 잠시 그 뒷모습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놓칠세라 뒤따라 일어났다.

* * *

방으로 돌아온 아드리안은 겉옷도 벗지 않고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니까, 그녀가 관심을 가진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

“왜 하필 필릭스냐고.”

그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착각을 하다니.

왜인지 모를 허탈함과 실망감이 계속해서 밀려들어 왔다.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아드리안이 생각하기에, 이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바로 그 역시 레이에게 조금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은 예감이 사실이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는 것.

* * *

“안녕하세요, 라인하트 씨. 잘 주무셨어요?”

“네.”

여느 아침처럼 인사를 건네는 레이에게 아드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이제 곧 여름이 올 것 같다니까요? 옷은 얇게 입으셔도 될 거예요.”

“그러겠습니다.”

아드리안이 대답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출판사에서 첫 제본이 나오기로 한 날이죠?”

아드리안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레이가 발랄하게 물었다.

“저도 너무 궁금해요! 게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표지를 구경할 수 있다니! 역시 라인하트 씨 경호를 맡은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네, 저도 궁금하군요.”

“저, 사실은 사장님한테 살짝 들었어요. 표지도 직접 그리신다면서요? 글 쓰는 능력에, 그림 그리는 실력까지…… 라인하트 씨는 정말 못 하는 게 없으시네요!”

“별거 아닙니다.”

몇 번의 짤막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레이는 평소와는 다른 아드리안의 태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던 그녀는 곧 가져온 가방으로 다가갔다. 가방에서 염색약들을 꺼낸 레이가 아드리안에게 돌아온 뒤 물었다.

“오늘은 어떤 색으로 하시겠어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머리색을 또 해 보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서 이번엔 좀 다양하게 구해 왔어요. 보라색! 파란색! 빨간색! 아, 형광 분홍색도 있어요! 정말 신기하죠오…….”

염색약을 들고 설명해 주던 레이는 결국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드리안의 표정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레이가 하는 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한 얼굴.

그녀는 조금 상처받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냥 검은색이 나을까요……?”

“오늘은.”

아드리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냥 모자를 쓰겠습니다.”

“모자요…….”

더 설명하지 않고 아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방으로 들어가 옷장에서 모자를 꺼냈다.

“등신.”

그가 모자를 쓰며 중얼거렸다.

“넌 정말 등신이야, 아드리안 베르크.”

* * *

“라인하트 씨, 저 디저트 가게 안 가 보셨죠?”

출판사로 가는 길.

둘 사이에 흐르는 오랜 침묵을 깨고 레이가 한 가게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가 본 적 없습니다.”

“저기가 숨은 맛집이에요! 아는 사람만 아는 맛집! 언제 한번 제가 꼭 케이크를 사서 가져다드릴게요.”

레이가 과장되게 쾌활한 말투로 말했다.

“글 쓸 때 필요한 당분이 아마 한 번에 충전되실걸요?”

“그렇군요. 맛있을 것 같네요.”

이제 아드리안은 자신이 등신을 넘어 막돼먹은 놈으로까지 느껴졌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머리는 알고 있는데도, 입으로는 자꾸 무뚝뚝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아마 사춘기 소년도 이런 유치한 태도는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몇 번의 대화 시도 끝에 레이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반복되는 아드리안의 무성의한 대답에 그녀는 깊이 자존심이 상한 듯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을 걸지도,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정적을 유지하며 둘은 출판사에 도착했다.

“작가님, 나오셨군요.”

글렌이 아드리안을 맞이하며 나왔다. 그는 요즘 또 새 책이 출간되면 얼마나 많은 돈을 쓸어 담을 수 있을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마침 첫 제본이 완성되었답니다. 이리 와서 한번 보시죠.”

글렌이 그를 사장실로 안내했다.

아드리안을 데리고 들어가기 전, 글렌이 레이를 향해 외쳤다.

“야, 레이! 너 어디 가냐?”

레이가 돌아보자 글렌이 함께 들어오라는 듯 턱짓을 했다.

“표지 구경하고 싶다며? 어서 들어와. 괜찮죠, 작가님?”

글렌의 물음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레이는 잠시 바닥으로 얼굴을 떨구더니 제 손만 만지작거렸다.

“어쭈? 이 자식이 오늘 왜 이래? 작가님이 허락하실 때 얼른 들어와! 표지 보고 싶다고 난리, 난리를 피우더니.”

“저…… 아뇨.”

고개를 든 레이가 작게 말했다.

“전 그냥 출간되면 볼게요. 전 여기 직원도 아니잖아요.”

그러더니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정말 이상하네, 오늘?”

레이가 사라진 문가를 쳐다보며 글렌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들어가시죠.”

레이가 사라진 곳을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아드리안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며칠 후.

아드리안을 데리러 호텔에 온 것은 레이가 아니었다. 문가에 서 있는 처음 보는 남자를 보며 아드리안이 인상을 찌푸린 뒤 말했다.

“레이 씨는요?”

“레이? 그게 누굽니까?”

험악한 인상의 새 경호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난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글렌 사장이 당신을 무사히 출판사까지 데려오라길래 온 겁니다.”

그 남자는 더 이상의 답변은 주지 않았다.

출판사에 도착하고 나서야 글렌에게서 레이가 호위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만두었다고요?”

아드리안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예, 며칠 전 갑자기 와서는 더 이상 작가님 호위를 못 하겠다 하지 뭡니까?”

글렌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뭐,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예전 용병하던 버릇을 못 고쳐서 그런 거니까. 원체 한 곳에 붙어 있는 애가 아니에요. 이 도시, 저 도시 짧게 머무르며 지 받고 싶은 의뢰만 받으며 살던 녀석이니까요. 이번에는 웬일로 오래 붙어 있나 싶더만.”

아드리안은 멍해진 얼굴로 테이블만 내려다보았다. 새 책이 출간되면 진행될 몇몇 비공개 인터뷰에 대해 설명하는 글렌의 목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화가 났다.

바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이 상황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혀 놓고, 도리어 실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가 끝난 뒤, 아드리안이 사장실을 나왔다.

하루가 통째로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허무함뿐이었다.

새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 로비로 들어선 그는 경호원에게 말했다.

“됐으니 이만 가 보세요. 방까지는 알아서 돌아가겠습니다.”

그 말에 경호원은 군말 없이 돌아갔다.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려는 그때.

호텔 직원이 다가와 그에게 접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라인하트 씨? 방금 어느 남성분께서 이 메모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쪽지를 받아 든 아드리안이 그 자리에서 종이를 펼쳤다. 이어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이 점점 절망감으로 물들어 갔다.

라인하트 씨. 얼마 전 제가 한 얘기들은 모두 잊어 주세요. 당신이 그토록 부담스러워하는 줄 알았다면, 절대 관심을 표하지 않았을 거예요. 아무튼 죄송했습니다. 앞으로 출판사에는 가지 않을게요. 새 책 출간을 미리 축하드려요.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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