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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3화 (113/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3화

척 보기에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남자들은 무언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아드리안은 그들이 손에 든 단도와 둔기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여기 더 있다가는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들은 둘을 양쪽에서 포위한 채 슬슬 접근해 왔다.

“레이 씨.”

아드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아무래도 그녀만이라도 도망치게 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제가 저들의 주목을 끌 테니 그 틈에…….”

스르릉.

등줄기에 소름이 돋게 하는 금속성 소리에 아드리안은 말을 멈추었다.

레이가 칼을 뽑아 든 것이었다.

그녀는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번쩍이는 칼을 들고서 서서히 앞으로 나섰다.

“라인하트 씨, 뒤로 물러나 계세요. 위험합니다.”

레이는 처음 보는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을 한 채 남자들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내 의뢰인이 바쁘셔서. 덤빌 거면 한 번에 덤벼라.”

남자들이 킬킬대기 시작했다. 표정만 보아도 그들이 왜소한 레이의 몸집을 얕잡아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일곱이었다. 그것도 덩치가 우람한.

대체 저 남자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상대하겠다는 건지. 아드리안이 심각한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는 사이.

상대측에서 먼저 레이에게 달려왔다. 그들도 허리춤에서 장검을 빼어 든 채였다.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며 아드리안이 앞으로 나서려는 찰나.

레이는 여유롭게 칼을 공중에서 두어 번 돌리더니 곧바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챙! 챙!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부두에 울려 퍼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아드리안은 입만 벌린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게도 사내 일곱이 여자 하나를 상대로 쩔쩔매고 있었다. 그들의 검 실력은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레이는 정말 날래고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사내들을 조롱하다시피 제압하고 있었다.

하나둘씩 남자들이 땅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보던 아드리안은 한 남자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쓰러진 척하던 남자가 슬금슬금 일어나 레이의 뒤로 다가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레이 씨! 위험합니다!”

아드리안이 곧장 그 남자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얼굴을 한 방 맞은 남자가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쓰러졌다.

그러나 그 순간, 아드리안의 머리에도 거센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으악! 라인하트 씨!”

뒤에서 공격하려는 남자를 제압하려던 레이는, 자신의 발에 얻어맞은 사람이 아드리안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아드리안은 빙글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정말 대단한 발차기였다. 저런 작은 발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곧 누군가가 그의 얼굴을 감싸 쥐며 상태를 살폈다.

“라인하트 씨! 괜찮아요?”

눈앞의 시야가 다시 돌아오자, 울상이 되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레이가 보였다.

“그러니까 왜 끼어들어요! 물러나 있으라고 했잖아요!”

한 마리 맹수처럼 남자 일곱을 쥐락펴락할 때는 언제고,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으억! 피나요, 피!”

머리에서 무언가 흐르는 느낌이 난다 싶더니 곧 바닥으로 빨간 피가 떨어졌다.

“난 몰라! 어서 일어나요!”

레이가 그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예요, 취소! 어서 돌아가서 치료부터 해야 한다고요!”

* * *

“많이 아파요?”

아드리안의 상처를 치료하던 레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의뢰인을 다치게 하다니! 모두 제 잘못입니다!”

“괜찮습니다. 이건 레이 씨 탓이 아니에요.”

아드리안의 말에도 레이는 기운을 되찾지 못했다.

“오늘 제가 실수가 많네요. 염색약을 착각한 것도 그렇고, 라인하트 씨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도 그렇고…….”

레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원래 일을 할 땐 이렇게 허둥대지 않는데……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절 믿고 맡겨 주셨을 텐데. 그런데 제가 정말로 평소에는 이런 실수들을 하지 않거든요!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라인하트 씨 근처에만 있으면 자꾸 긴장이 되어서 저도 모르게 어이없는 실수를……!”

그녀의 말에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가까이서 눈이 마주친 레이의 손이 뚝 멈췄다.

“어…….”

그녀의 얼굴이 목부터 시작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쿡 찌르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그녀가 화들짝 뒤로 얼굴을 빼며 들고 있던 소독약을 떨어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가 바닥에 쏟아진 소독약을 보며 소리쳤다.

“저, 저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오늘은 그만 푹 쉬세요!”

그러고는 아드리안이 붙잡을 새도 없이 방을 뛰쳐나가 버렸다.

“허…….”

혼자 덩그러니 남은 아드리안이 그녀가 사라진 문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 *

“레이 씨, 레이 씨의 어깨가 다 젖고 있잖아요.”

아드리안이 레이가 들고 있던 우산을 좀 더 그녀 쪽으로 기울여 주었다.

출판사로 가는 길. 도시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우산을 씌워 준다고 나선 그녀는 자신의 어깨가 다 젖고 있는 줄은 모른 채, 아드리안에게 비를 막아 주느라 바빴다.

“전 괜찮아요.”

그녀가 다시 우산을 아드리안 쪽으로 기울였다.

“뭐가 괜찮아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괜찮다니까요.”

잠시 우산이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결국 이긴 것은 레이였다.

“염색한 머리에 비 맞으면 안 돼요. 염색약이 흘러내리면 어떡하려고.”

기어코 레이는 자신의 몸은 젖도록 내버려 둔 채 아드리안의 머리 위로만 우산을 씌웠다.

며칠째 관찰해 본 결과, 그녀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항상 자신보다도 아드리안을 먼저 챙기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유명 디저트 가게에서 무려 세 시간을 기다려 케이크를 사 오기도 했다.

“세 시간 동안 줄을 서 있었던 거예요?”

“예, 그때 라인하트 씨가 맛있어 보인다고 한 게 기억나서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제가 직접 가서 사 오면 되는걸요.”

“에이, 라인하트 씨는 나가려면 준비할 게 많잖아요. 이거 하나 사러 가려고 변장을 할 수도 없고. 그냥 제가 다녀오면 돼요.”

또 어떤 날은, 아픈 아드리안을 위해 직접 약을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아플 때 서러운 게 뭔지 아세요? 아픈 몸 이끌고 직접 약 사러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빨리 낫기나 하세요.”

이런 친절들이 계속되다 보니, 아드리안은 문득 궁금해졌다.

보통 호위들이 의뢰인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나? 레이의 행동들은 과연 자신이 의뢰인이기 때문에 보여 주는 친절들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친절이 내심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 * *

그날은 유달리 레이가 허둥대던 날이었다.

“얌마, 레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실수가 많아? 가만 보니 딴 데 정신이 팔려 있구먼?”

출판사 사장 글렌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다 못해 결국 지적해 올 정도였다.

“아, 죄송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레이는 계속 실수가 뒤따랐다. 아드리안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하루 종일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글렌과 새 소설 출간 일정에 대한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아드리안에게 레이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저…… 라인하트 씨. 오늘 바로 호텔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렇게 묻는 그녀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새빨갰다.

초조하게 손을 꼼지락대던 그녀가 결심한 듯 외쳤다.

“시간 되시면 저랑 한잔하실래요!”

복도에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녀는 헙, 입을 다물더니, 잠시 뒤 중얼중얼 변명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하하, 떨리네요. 제가 태어나서 남자한테 이런 말 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그…… 거절하셔도 됩니다.”

“좋아요. 제가 살게요.”

아드리안의 말에 레이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정말 정말?”

“예, 정말요. 대신 레이 씨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요.”

* * *

레이는 좀처럼 긴장한 티를 벗지 못했다. 계속해서 앞에 놓인 맥주를 들이켤 뿐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도 전혀 취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 씨는 제 책을 읽어 보셨나요?”

“그럼요!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제일 먼저 사서 보는걸요! 글렌 사장님이 라인하트 씨의 호위를 부탁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실 거예요.”

레이가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데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인 게 당신이라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놀랐다고요? 제가 작가처럼 생기진 않았나 보죠?”

“아, 그게 아니라…….”

갑자기 레이가 곤란한 얼굴로 우물쭈물거렸다.

“괜찮아요. 말해 보세요.”

“저…… 사실은.”

레이는 아드리안의 눈치를 보다가 마침내 말했다.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어요.”

뜻밖의 말에 아드리안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요?”

“예…… 음…… 저…… 베르크 씨 아니신가요.”

이어진 레이의 말에 아드리안은 정말로 놀라 마시려던 맥주를 내려놓았다.

그 놀란 표정을 보며 레이가 얼른 설명했다.

“뭐, 뒷조사 같은 거! 그런 걸 한 건 절대 아니고요! 사실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는데.”

“언제요?”

아드리안은 정말로 궁금해졌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그녀를 만난 때는 생각나지 않았다.

“9년 전에요.”

레이가 대답했다.

“라인하트 씨도 그 전쟁에 참전하셨죠? 베로스 제국 동부에서 있었던. 저도 그때 용병으로 싸웠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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