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2화
레이의 목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예?”
아드리안은 그답지 않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엉거주춤 섰다.
레이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상황을 파악한 아드리안이 황급히 레이의 손목을 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사과했다. 레이는 아드리안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소매 속으로 감추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러니까…… 제가 여기서 씻는 건 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우렁차게 내뱉은 후, 부리나케 방 앞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드리안은 그녀가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왜소한 체구, 소년같이 어려 보이는 얼굴, 그리고 변성기조차 오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무례한 착각을 했는지도.
* * *
다음 날 아침.
자신 없는 노크 소리가 아드리안의 방 안에 조용히 울렸다. 기다리고 있던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어젯밤의 악취를 말끔히 씻어 낸 레이가 뺨을 붉히며 서 있었다. 오늘의 일정도 그녀가 따라다니며 호위를 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안녕하세요, 라인하트 씨. 잘 주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드리안은 대답 대신 얼른 문에서 비켜서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아드리안이 레이를 소파로 안내했다.
“우선 사과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사실은 어제 레이 씨를 남자로 착각했었습니다. 글렌 씨가 당신을 대하는 스스럼없는 태도를 보고 여성분일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레이는 아드리안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한 채 손을 내저었다.
“아휴, 됐어요. 짧은 머리 때문에 그런 오해받는 건 일상이니까.”
그녀는 개의치 말라는 태도로 말한 뒤, 들고 온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대체 뭐가 들었는지 묵직한 소리가 텅, 하고 울렸다.
“제가 고민 좀 해 봤는데요.”
레이가 가방을 열자 그 안에서 온갖 잡동사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각색의 모자, 테가 두꺼운 안경, 장갑, 뭔지 모를 각종 약품들까지.
“라인하트 씨는 일단 얼굴과 머리색을 가리는 게 시급해요.”
그녀가 아드리안의 밝은 금발을 흘끔거렸다.
“……당신은 그 얼굴이랑 머리만 가려도 눈에 덜 띌 거라고요.”
그러더니 가방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
“짜잔! 일회용 염색약!”
그녀가 그 약병을 아드리안의 얼굴 앞에 척 내밀었다.
“염색약이요?”
“예! 무난한 검은색이죠! 이걸로 머리를 검게 물들이면 사람들 눈에도 덜 띌 거예요. 게다가 베로스 제국산이라 얼룩도 잘 안 진다니까요? 좀 비싸긴 하지만.”
아드리안은 그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레이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남은 탓에 그녀의 말을 듣기로 한 것이다.
“자, 그럼.”
레이가 염색약을 내밀었다. 아드리안은 그것을 받지 않고 멀뚱히 쳐다보았다.
“죄송하지만 어떻게 쓰는 건지 모르는데요.”
“아.”
레이는 잠시 당황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해 드릴게요.”
그녀는 우선 아드리안의 목에 커다란 수건을 두른 뒤, 염색할 때 쓰는 것으로 보이는 장갑을 꼈다.
그녀가 염색약을 섞은 바가지와 붓을 들고 아드리안의 뒤로 갔다.
염색약에 대해 설명할 때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레이가 꿀꺽 침을 삼켰다.
“자, 그럼…… 시작할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뒤에서 스윽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보는 손길이 느껴졌다.
“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던 레이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이내 그녀가 염색약을 묻힌 붓으로 아드리안의 머리를 칠하기 시작했다.
둘 중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내내 조용한 시간만이 흘렀다. 그런 와중 아드리안의 귓가에 자꾸만 레이의 숨소리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 분위기는 점점 어색해지기만 했다.
“자, 다 됐어요! 이제 머리를 감고 오시면 돼요.”
그 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아드리안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 * *
“레이 씨.”
아드리안이 자신의 머리를 거울에 비춰 보며 상대를 불렀다.
“제 머리가 왜 초록색인가요.”
“헉! 아, 아니 왜……!”
레이는 곧장 다 쓴 염색약을 찾아 통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눈을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며 아드리안에게 달려왔다.
“라인하트 씨!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색깔을 착각했어요!”
그녀는 미안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작 아드리안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다시 원래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여기 다시 되돌리는 약도 있어요!”
“아뇨.”
아드리안이 거울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요.”
“예? 그게요?”
거울 속의 자신은 아주 딴 사람처럼 보였다.
모범생 아드리안.
그가 평생 들어 왔던 별명들과 너무나 동떨어진, 거칠어 보이는 모습이 굉장히 낯설고도 새로웠다.
“가방 안에 갈아입을 옷도 있던 것 같던데.”
“예? 아, 예!”
레이가 곧장 가방을 들고 와 안을 열어 보였다. 아드리안은 직접 가방을 들여다보다가 옷 몇 벌을 집어 들었다.
“그, 그걸 입으시게요?”
“네,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만…….”
레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드리안이 집어 든 화려한 무늬의 셔츠와 가죽 재킷을 바라보았다.
옷을 들고 방 안으로 사라진 아드리안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진 채 다시 나타났다. 그 모습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던 레이가 발그레한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와, 너무 잘 어울려요!”
그러더니 금세 당황하며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니! 라인하트 씨가 깡패 같아 보인다는 뜻은 아니고요! 어떤 옷도 너무나 잘 소화하신다는 의미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드리안도 만족스러운 듯이 대답했다.
“그런데 저만 이렇게 입나요?”
아드리안의 물음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드리안은 가방 속에서 또 다른 화려한 셔츠를 집어 들며 말했다.
“깡패 같을 거면 둘 다 깡패 같아야죠.”
* * *
껄렁한 차림의 두 사람이 부두를 걷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관광객들로 보이는 이들이 둘을 발견하고는 슬금슬금 피했다.
불량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죄다 그와 레이를 보자마자 겁을 먹었던 것이다.
“레이 씨 덕분에 사람들이 주변으로 다가오지 않으니 좋네요. 기자들도 이런 차림을 한 사람이 소설가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 같아요.”
아드리안의 말에 레이가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쑥스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레이 씨는 언제부터 이 일을 하셨나요?”
“저요? 전 원래 용병이었어요. 한때는 전쟁에 참전하며 먹고 살았죠. 전쟁이 끝난 후엔 다 관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호위 일을 시작했고요.”
잠시 망설이던 레이가 아드리안에게도 물었다.
“라인하트 씨는요? 외국인이란 소문이 있던데……. 근데 그런 것치곤 베르타어 억양이 너무 완벽하시네요.”
질문을 던진 레이는 그러나 금방 손을 내저었다.
“아, 이런 질문 싫으시죠?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너무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 싶었는지, 레이는 그 후로 말을 줄였다.
“이보게, 젊은이들!”
그때 어디선가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두 위에 한 노인이 그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잠깐 나 좀 도와주겠나?”
노인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숨이 차서 움직이질 못하겠네. 나 좀 들어서 저 위까지 옮겨 주면 고마울 텐데.”
아드리안과 레이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수상한 사람 같지는 않았기에 아드리안이 그러자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가 곧장 노인에게 다가갔다.
“제가 옮겨 드릴게요.”
“아뇨, 제가 옮기겠습니다.”
“저도 들 수 있는데요?”
레이는 의뢰인이 힘쓰는 일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며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럼 같이 들죠.”
아드리안의 제안에 둘은 노인을 함께 공중으로 들었다. 아드리안은 노인의 상체를, 레이는 노인의 발을.
그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 상당히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어떤 사람의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저, 저기! 불한당들이 노인을 바다에 빠트리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아드리안과 레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예? 아, 아니, 저희는 그게 아니라…….”
레이가 해명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먼저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무서운 표정을 한 채 노인을 구하기 위해 다가왔다.
“일단 내려놓고 도망가요.”
아드리안의 말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둘은 엉거주춤 노인을 땅에 내려놓고 재빨리 튀었다. 뒤에서 사람들의 험악한 욕설이 뒤따라왔다.
* * *
“휴, 큰일 날 뻔했네요!”
사람들을 따돌린 후, 레이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괜찮아요, 라인하트 씨?”
아드리안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이 너무나 기가 막히고 우스웠다.
“제 평생 불한당으로 오해받기는 처음이에요.”
“그, 그런가요?”
레이가 아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아드리안이 손을 내저으며 해명했다.
“기분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재밌어요.”
그 말에 레이가 한숨 놓은 듯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앞으론 이런 일 없게 주의할게요.”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도 그들 앞에는 또 다른 위험이 나타났다.
“분명 그 새끼가 틀림없습니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아드리안과 레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커다란 덩치에 얼굴에는 흉악한 상처 하나씩을 갖고 있었다.
“저 초록색 머리말입니다. 그때 형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던 놈도 분명 초록 머리였죠.”
부하로 보이는 남자의 말에 제일 선두에 선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