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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1화 (11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아드리안 외전 1화

“건방진 놈! 시상식에도 나타나지 않아?”

“외국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이건 분명 우리 베르타 왕국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복면 작가? 그건 무슨 한물간 신비주의야?”

베르타 왕국, 어느 출판사 앞.

몰려든 기자들이 얼굴을 붉힌 채 한마디씩 내뱉고 있었다.

그들이 화가 난 건 어느 소설가 때문이었다. 그 소설가는 몇 년 전부터 예술의 나라 베르타뿐만 아니라 옆 나라 베로스 제국 등에서 무려 100만 부의 책을 팔아 치워 유명해진 ‘라인하트’였다.

그는 그 유명세와는 달리 얼굴이며, 본명이며, 출신 등,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어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스타 작가가 베르타 국민들의 원성을 사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발단은 베르타뿐만 아니라 온 대륙에서도 권위 있다고 명성이 자자한 ‘베르타 문학상’의 수상자가 라인하트로 지정되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라인하트는 베르타 출신이 아닌 외국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게다가 베르타 문학상이 자국민이 아닌 외국인에게 수여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국의 문학에 자부심이 대단한 많은 베르타인들이 이 점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베르타인들의 화를 더 부채질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라인하트, 이 건방진 작가가 신분 노출을 우려해 시상식에까지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곧 죽어도 그놈의 신비주의를 유지하시겠다?”

기자들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은 기필코 그 건방진 작가 놈의 정체를 온 세상에 까발려 주마.

그들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 * *

한편. 출판사 사장실 안에는 난감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창가에 서 있던 남자가 커튼 사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밖에는 화난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걱정 마세요, 작가님.”

소파에 앉아 있던 출판사의 사장, 글렌이 난감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베르타인들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은 대륙에도 소문이 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랍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더 재미있는 일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가기 마련이에요. 시간이 흐르면 잠잠해질 겁니다.”

하지만 단단히 성난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그들의 화가 누그러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라인하트가 창가에서 눈을 떼고 사장 앞에 와 앉았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망토를 벗었다.

곧 태양처럼 밝은 금발과 영롱히 빛나는 푸른 눈을 가진 미남이 얼굴을 드러냈다.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단번에 유명 작가가 되었다. 지금은 온 대륙을 여행하며 다양한 글을 쓰는 중이었다.

자신이 쓴 책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줄 몰랐던 그는 사람들의 관심이 그저 놀라웠다.

그리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가 원하는 건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조용히 사는 것이지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오직 출판사 사장과 직원들뿐이었다. 그의 가족들조차도 그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수많은 문제들에 관해 생각하던 아드리안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골라 사장에게 던졌다.

“일단 오늘은 어떻게 돌아가죠?”

그는 도시의 어느 호텔에서 장기 투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돌아가지 못하고 사장실에 내내 갇혀 있을 판이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경호원을 붙여 드릴 테니까요.”

곧 글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한 사람이 문가에 나타났다. 검은 머리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한 사내였다.

“오늘부터 작가님을 호위할 ‘레이’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아드리안은 살짝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남자치곤 체격이 무척 왜소했던 것이다. 작은 몸집만 보면 도리어 아드리안이 그를 지켜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레이라는 이름의 그 호위는 긴장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다가 곧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걸어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 그는 아드리안을 보자마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안녕하세…… 으억!”

삐걱거리는 게 영 불안하다 싶더니 남자는 발까지 꼬여 볼품없이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다음 순간, 그가 벌떡 일어나 아드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드리안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사장이 멋쩍게 웃으며 레이를 야단쳤다.

“얌마! 똑바로 안 해?”

그러더니 아드리안에게도 설명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작가님! 이 녀석이 이렇게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보여도 실력은 이 도시 최고니까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아주 많아 보이는데…….

레이는 여전히 빨간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한 채 뒤통수만 긁적이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혼자 처리할 수 있겠어요?”

출판사 일 층. 아드리안은 문 앞에 몰린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레이에게 물었다. 레이는 곧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미끼를 쓸 겁니다!”

“미끼?”

아드리안이 의아하게 되물었지만, 레이는 근처에 있던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일 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남자가 얼른 달려왔다. 아드리안만큼이나 키가 큰 남자였다.

“이 친구에게 얼굴을 가리도록 한 다음, 라인하트 씨인 척 밖으로 나가게 할 거예요.”

“그게 먹힐까요?”

“물론요. 어차피 다들 흥분한 상태니 누구 한 명이 따라가면 다른 사람들도 정신없이 우르르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 틈에 우린 뒷문으로 빠져나가면 돼요.”

레이는 아드리안을 근처에 숨어 있게 한 후, 출판사 문을 열었다. 곧 엄청난 웅성거림과 말소리가 출판사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저기, 라인하트다!”

누군가 라인하트처럼 꾸민 미끼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쪽을 쳐다보았다.

미끼를 밖으로 내보내자 사람들이 그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느새 불쌍한 미끼는 인파 속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자, 지금이에요, 라인하트 씨. 우린 뒷문으로 빠져나가자구요!”

레이가 서둘러 아드리안을 데리고 복도를 뛰어갔다.

둘은 살그머니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뒷골목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어디에 머물고 계신가요?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레이가 물었다.

“아,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아뇨, 언제 어디서 기자들이 붙을지 모릅니다.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레이는 검은 머리칼 속에 감추어진 밝은 호박색 눈동자를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땐 빨개진 얼굴이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 남자, 피부까지도 매끈하고 뽀얬다. 아무리 봐도 호위 같은 험한 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그럼 베르타 중앙 호텔까지 부탁드립니다.”

“예, 걱정 마세요. 제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곧 레이가 앞장서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레이가 동행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아드리안은 알게 되었다. 골목에 쌓인 나무 궤짝 뒤에서 기자로 보이는 수상한 남자 몇몇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드리안은 망토를 끌어당겨 얼굴을 더욱 깊숙이 감추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 출판사 건물에 비밀 문이 있다는 건 우리만 아는 정보였으니까.”

기자들이 다가오며 한마디씩 했다. ‘작가 라인하트’의 정체를 알아내겠다는 일념으로 기자들은 눈이 이글거렸다.

“뒤로 물러나 계세요.”

레이가 아드리안에게 말했다.

아드리안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봐도 이 남자의 체격은 저 기자들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냥 반대쪽으로 도망가는 게 어떨까요?”

“그쪽도 안심할 순 없습니다!”

레이는 기자들에게 손을 까딱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 건방진 몸짓에 기자들은 열이 받은 것 같았다. 자신들의 본분도 잊은 기자들이 펜과 수첩을 내던진 채 곧장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이건 아냐.

혼자 싸우게 둘 순 없었다.

아드리안이 그를 도우려 앞으로 나서려던 그때.

갑자기 레이가 공중으로 높게 뛰어올랐다.

다음 순간 눈앞에 벌어진 일을 아드리안은 그저 놀란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에서 실력만큼은 최고라던 사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레이는 체격이 왜소한 대신, 날쌔고 노련하고 실수가 없었다.

그는 심지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지도 않고, 다섯이나 되는 기자들을 상대했다.

그때, 레이를 향해 더러운 오물들이 쏟아졌다. 한 기자가 골목 구석에 있던 음식물 쓰레기통을 레이에게 던졌던 것이다.

순식간에 오물 범벅이 된 레이였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고 곧장 기자에게 달려들었다.

“으윽……!”

레이의 발에 턱을 걷어차여 나가떨어진 기자가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했다.

“자, 어서 가요!”

레이가 뒤를 돌아보며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드리안에게 소리쳤다.

* * *

레이는 약속대로 모든 기자들을 따돌리고 아드리안을 호텔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레이를 흘끔흘끔 쳐다보거나 인상을 쓰며 피했다. 오물을 뒤집어쓴 레이에게서는 이제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고 있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십시오.”

“잠깐만요.”

돌아가려는 레이를 아드리안이 붙잡았다.

“씻고 가시죠.”

“예?”

아드리안의 제안에 레이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아까 저 때문에 오물을 뒤집어쓰셨잖아요. 이대로 돌아가긴 힘들지 않겠어요? 제 방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가세요. 제 옷을 드릴 테니.”

그 말에 레이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돼, 됐습니다! 집에 가서 씻으면 돼요!”

레이가 뒷걸음질 쳤다. 아드리안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악취가 상당합니다. 그러고 돌아가면 가족들도 놀랄 텐데요?”

“가, 가족 없어요! 놔주세요!”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방 앞에서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던 레이가 마침내 터질 것 같이 빨간 얼굴로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여, 여자가 어떻게…… 외간 남자의 방에서 씻는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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