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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10화 (110/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10화

“이게 무슨……?”

루시는 벙찐 얼굴로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키스하려다 말고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데.

황당한 루시와는 다르게 바닥에 머리를 박은 필릭스는 익숙한 일인 듯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필릭스를 향해 중년의 기사가 벼락처럼 고함을 질러 댔다.

“도대체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내가 분명 자리 잘 지키라고 했지?”

“호위하는 건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가 그 사람의 졸업식 참석까지 지켜봐야 한답니까?”

“애초에 이 졸업식에 가야 한다고 바득바득 우겼던 건 너잖아!”

기사의 말은 사실이었던 듯, 지지 않고 토를 달던 필릭스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계속 사라지나 했더니 여기서 애인이랑 입이나 맞추고 앉아 있었던 거냐? 제정신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장님이 때맞춰 방해하시는 바람에 입술이 닿지도 못했습니다!”

“이 자식이 자꾸 말대답이야!”

필릭스의 되바라진 대거리에 단장이라고 불린 기사는 품 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루시가 깜짝 놀라,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기사는 개의치 않고 칼로 필릭스의 머리를 가리키며 눈을 부라렸다.

“오늘이야말로 그 꼴 보기 싫은 머리를 싹 다 밀어 주마!”

그 섬뜩한 말에 얼굴이 창백해진 것은 다름 아닌 루시였다. 그녀는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다닥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머리를 자르다뇨? 누구 마음대로요!”

막아야 한다, 선배 머리카락을 지켜야 한다!

당돌하게 자신의 앞으로 뛰어든 루시를 보며 기사는 이마를 찌푸렸다.

“이건 아가씨가 참견할 일이 아닙니다만?”

그러나 루시는 만만치 않게 눈을 부릅뜨고서 기사를 노려보았다.

사실 평소 같았다면 이 무서운 기사 앞에서 기도 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필릭스의 머리카락과 그의 미모 유지 여부가 걸려 있는 문제이니만큼,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선배 머리카락은 절대 못 잘라요! 차라리 계속 여기에 머리 박고 있으라 하세요!”

“……루, 루시?”

그 말을 들은 필릭스에게서는 황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기사는 기가 찬 듯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다.

“허허, 거참! 재미있는 아가씨네.”

기사는 들고 있던 주머니칼을 다시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필릭스의 옆구리를 가볍게 툭 걷어차며 말했다.

“일어나.”

필릭스가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기사가 툭 내뱉듯 말했다.

“네 애인 봐서 여기까지 하는 줄 알아. 또 한 번 무단으로 이탈하면, 그땐 진짜로 밀어 버릴 줄 알라고!”

기사는 마지막으로 경고한 뒤, 그레이트 홀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필릭스가 갑자기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루시를 돌아보았다.

“네가 내 머리카락의 안위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지는 몰랐네.”

그의 말에 루시가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얼른 가 보기나 하세요, 또 기합받기 전에.”

민망한 마음에 그녀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다.

필릭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루시를 쳐다보다가, 아쉬운 듯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호위 임무가 끝나면 보러 올게. 이따가 졸업식 무도회 때 말이야.”

조금 전 무심한 척 말을 내뱉었지만, 내심 그가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던 루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는 약속한 뒤,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그가 사라진 뒤에야 루시는 자기 뺨을 찰싹 때려 보며 꿈인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너무 세게 때린 탓인지 뺨이 얼얼했다. 하지만 루시는 마음이 벅차올라 눈가가 뜨거워질 정도였다. 그렇게 아프고도 기분이 좋은 건 처음이었다.

드디어 필릭스가 돌아온 것이다.

* * *

필릭스와 재회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졸업식은 끝이 나 있었다.

그녀가 홀로 되돌아오자, 여기저기 모여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이 그녀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흘끔거렸다.

모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콜린을 비롯한 친구들마저 단상에서 갑자기 뛰어 내려온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적당히 둘러대느라 루시는 진땀을 뺐다.

필릭스는 아직 임무 수행 중이었고, 수도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함부로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친구들과 기숙사로 돌아가 드레스로 갈아입으며 다음 일정을 준비했다.

무도회는 이른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모두 교복을 벗고 한껏 차려입은 채 무도회장으로 변한 그레이트 홀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루시는 원래 무도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추억이라고 생각하니 나름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루시! 나랑 춤추자!”

그래서 하마터면 콜린이 내미는 손을 덜컥 잡을 뻔하기도 했다.

“아, 아니. 난 됐어.”

콜린에게 내밀던 손을 얼른 거두며 루시가 거절했다.

그녀는 여전히 문학의 밤 무도회에서 그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우스꽝스러운 춤을 췄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난 그냥 구경만 할게.”

여전히 소극적인 그녀의 태도에 콜린이 무어라 투덜거렸지만, 곧 홀 안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로제를 발견하고는 목표물을 바꿔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럼 나랑 출래?”

등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루시는 고개를 홱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드리안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아……. 아드리안 선배.”

“굉장히 실망한 눈치네?”

그가 부러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루시가 도리질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드리안이 여전히 손을 거두지 않았으므로, 루시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의 한가운데로 나갔다. 그나마 느리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드리안을 상대로 획기적인 춤사위를 자랑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루시를 리드하며 그녀의 귀에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필릭스는 지금 어딨는데?”

루시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단상 위에서 유령을 본 사람처럼 뛰어 내려갈 정도면 뻔하지. 설마 정말로 유령을 본 것은 아닐 테고. 게다가 아까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발을 동동거리질 않나, 그러면서 입은 실실 웃고 있고.”

“제가 그랬어요?”

루시는 민망한 얼굴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던 아드리안이 옛날을 추억하듯 말했다.

“……어릴 땐 말이야.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먼저인 존재였거든? 그런데 이제 필릭스는 나보다 네가 더 먼저인가 봐.”

아드리안의 말에 루시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그는 딱히 섭섭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다행이야. 네가 필릭스 앞에 나타나 줘서.”

예상치 못하게 이어진 말에 루시는 쑥스럽게 미소 짓다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공작님은 좀 어때요?”

루시는 수개월 전, 기적처럼 공작이 깨어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그 기적은 공작에게 완전한 희망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한 것 같았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그는 말할 수도, 걸을 수도, 하다못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루시의 질문에 아드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똑같아. 하지만 답답하시지 않도록 내가 매일 세상의 소식들을 전해 드리고 있어. ……예를 들면, 우리 가문이 리부르 항구의 사업에서 모두 철수한 다음, 그 차익을 원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데 모두 기부했다든가.”

“와, 큰 결정을 하셨네요.”

“그렇지? 아버지도 꽤 놀라셨던 모양이야.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는데 발가락 하나가 움찔하는 것 같더라고.”

어린 소년처럼 웃던 아드리안이 문득 창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는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갑자기 루시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서, 선배?”

루시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일 년 전에 필릭스가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했거든. 어디 정말로 태평하게 굴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

그는 아리송한 말로 대답한 뒤, 더욱 의욕적인 모습으로 루시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루시가 어지러움을 호소할 때까지 춤을 멈추지 않던 아드리안은 음악이 잠시 멈춘 뒤에야 그녀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아드리안이 테라스로 나가서 시원한 바람을 쐬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루시가 승낙하자, 그가 빈 테라스 중 한 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하지만 테라스 안으로 루시를 밀어 넣은 뒤, 아드리안은 곧장 문을 닫아 버렸다.

“어? 선배?”

루시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며 아드리안은 짧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곧장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

“선배! 어디 가세요!”

루시가 잠긴 문을 두드렸다. 그때 뒤에서 불쑥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딴 놈이랑 춤을 춰?”

“아이, 깜짝이야!”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루시가 자리에서 화들짝 튀어 올랐다. 어느샌가 나타난 필릭스가 난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곧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루시에게 다가왔다.

“아주 열심히 추더라? 나랑도 춰!”

그는 어린애가 떼쓰듯 말하며 루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려다보며 루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필릭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머뭇거려? 아드리안과는 잘만 춰 놓고!”

“그게 아니라…….”

자신의 엉망진창인 춤 실력은 정말이지 필릭스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저 춤 끔찍하게 못 춰요.”

“알아.”

담담하게 말한 그가 루시의 손을 가만히 이끌어 자신의 어깨에 가져다 놓았다. 다른 쪽 손으로는 루시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테라스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그가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시도 어색한 동작으로 그의 움직임을 따라 자신의 발을 움직였다.

“……생각보다 그렇게 엉망은 아닌 것 같다? 그동안 연습이라도 한 거야?”

루시의 발놀림을 유심히 지켜보던 필릭스가 말했다.

“놀리지 마세요.”

잠시 후, 동작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루시가 필릭스의 품에 가만히 뺨을 붙였다.

“선배,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일 년이나 넘게 널 기다리게 할 줄은 나도 몰랐어.”

“다들 돌아오는데…… 선배만 돌아오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그래도 이제 다시는 너와 헤어져 있는 일은 없을 거야.”

그 말에 루시가 얼굴을 떼고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요? ……그럼 동부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그래, 안 가. 네 옆에 있을 거야. 이제 내 남은 시간은 모조리 너한테 쓸게.”

필릭스가 춤을 멈추더니 커다란 손으로 루시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그리곤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루시, 일 년 전에 네가 나한테 그랬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무사히 돌아온 뒤에, 준비가 되면, 그때 꼭 말해 달라고.”

꽤 떨렸는지 말을 이어 가는 그의 호흡이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루시도 덩달아 심장이 뛰었다.

“봄이 되면 난 정식으로 작위 승계를 받게 될 거야. 그리고 그 후엔 내 가족을 꾸릴 생각인데, 난 그 시작이…… 너였으면 좋겠어.”

어디선가 실바람이 불어와 루시와 필릭스의 머리를 헝클었다. 저녁 바람이었지만 그리 차갑지는 않았다.

루시는 휘날리는 긴 금발 속에 감추어진 푸른 눈을 조금 붉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서 이내 필릭스가 참았던 숨을 뱉어 내듯 말했다.

“나와 결혼해 줘.”

루시는 대답 없이 멍하니 그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필릭스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거절이야?”

“……거절이겠어요?”

루시가 곧장 필릭스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필릭스 역시 루시를 꼭 안으며 열렬히 화답했다.

“선배.”

“……필릭스라고 불러.”

그가 여전히 입술을 붙인 채 나직이 말했다.

“필릭스.”

“응.”

“사랑해.”

수줍은 고백에 그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입술을 통해 작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이윽고 그도 말했다.

“사랑해, 루시.”

한때 그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던 말. 가만히 자신의 마음속에만 숨겨 두었던 말.

그래서 더욱 꿈같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그 말이 루시의 심장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그녀는 입술을 떼고 필릭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만의 감정인 줄 알았던 그 마음을, 이루어지지 못할 마음이라 여겼던 그 마음을, 결국 알아봐 준 나의 필릭스.

나의 소년, 나의 첫사랑, 나의 선배님.

알게 모르게 루시의 삶에 많은 의미로 스며들었던 그는, 이제 루시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이 될 것이다.

“고마워요, 나랑 함께해 줘서.”

“나야말로 고마워. 믿고 기다려 줘서.”

루시는 필릭스의 손을 꼭 잡은 채, 별이 총총히 빛나기 시작한 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함께할 새로운 나날들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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