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9화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중년 기사의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찾고 있는 사람을 눈앞으로 데려와 머리를 밀어 버리겠단 기세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대화를 훔쳐 듣던 루시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루시 선배!”
그레이트 홀 앞에 도착했을 때쯤, 입구 앞에 서 있던 클로틸 공주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루시가 다가가자 그녀가 들고 있던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겨 주었다. 클로틸은 이제 무척 자연스러워진 베로스 억양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기까지 했다.
“졸업을 축하해요! 새 학기부터 선배를 못 보는 건 너무너무 아쉽지만!”
일 년 전, 제노미움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데 성공한 클로틸 공주는 놀라운 속도로 제국어를 통달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도서부 활동도 성실하게 해내며 아카데미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그 과정에서 루시의 도움이 컸기에 클로틸은 그녀를 볼 때마다 이렇듯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저나 입학식 이후로 이렇게 사람이 바글대는 건 처음 봐요! 아까 저어기서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까지 봤다니까요?”
“잘생긴 남자?”
“네! 찰랑거리는 금발을 가진 미남이었어요. 저보다 머릿결이 좋아 보이던데요? 그런데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더라고요. 비결이 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클로틸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금발 미남이라는 말에 정작 루시의 머릿속에는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절실히 그리운 얼굴이 생각나는 바람에 루시는 다시금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클로틸에게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축하 인사를 받은 뒤 겨우 벗어난 루시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루시, 여기야!”
미리 도착해 있던 콜린이 그녀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콜린의 옆에는 할머니와 어머니, 아드리안뿐만 아니라 노엘, 그리고 졸업 후 오랜만에 아카데미를 방문한 로제도 함께 서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축하를 해 주었다. 특히 할머니가 너무나 자랑스럽다는 얼굴로 루시를 꼭 끌어안아 주는 바람에 하마터면 눈물까지 글썽일 뻔했다.
다행히 할머니의 품에서 풀려나자마자 커다란 덩치로 어리광을 부려 오는 노엘 때문에 나오려던 눈물도 쏙 들어가 버렸지만.
“루시 선배! 가지 마세요! 아드리안 선배에 이어 루시 선배까지……! 제발 절 두고 가지 마시라구요!”
올해 3학년이 되는 노엘은 후배들의 만장일치로 새 도서부장이 되었다. 그는 벌써 앞날이 까마득하다는 듯 거센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마.”
아드리안이 씩 웃으며 노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는 않더라?”
그의 말에 사색이 된 노엘을 보며 루시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일 년간 제일 많이 달라진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아드리안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피곤하고 바빠 보이긴 했지만, 예전보다 묘하게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얼굴 한구석에 걸려 있던 그림자는 어느새 말끔히 지워진 듯 그는 진심으로 사람들을 향해 웃어 보이고 있었다.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나날이 괜찮아지는 아드리안을 보며 루시도 기쁨의 미소를 지었을 때쯤.
누군가 아드리안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채더니 자신 쪽으로 돌려세웠다.
“야, 임마! 뭐 하고 있나 했더니 여기서 수다나 떨고 있어?”
턱에 수염이 거칠거칠한 웬 남자가 험악한 인상으로 아드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루시에게 발을 밟힌 기사와 일행이었던 바로 그 자였다.
“왜, 왜 이러세요!”
놀란 콜린과 노엘이 황급히 그를 만류했다. 아드리안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멱살을 잡은 기사가 곧 아차 싶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드리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아드리안의 머리와 옷차림까지 한차례 훑어보았다.
잠시 후 기사가 화들짝 놀라며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았다.
“아,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했군요.”
그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사과하더니 곧장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흠, 이 얼굴이 누구랑 착각할 얼굴은 절대 아닌데…….”
로제가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 아니라면 말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시의 머릿속을 불현듯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생각이 있었다. 아까부터 묘하게 찝찝하던 이유를 드디어 깨닫게 된 루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의아한 얼굴로 묻는 콜린도 무시한 채 루시는 사람들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그녀는 복잡한 홀 안을 걷고 또 걸으며 사람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녀가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사람들 속에서 돌아다니던 그녀는 결국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래, 선배가 여기 있을 리 없지. 너무 보고 싶어서 망상을 한 거야.
루시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졸업식을 앞두고 들떠 있던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 * *
졸업식이 시작되자 옆자리의 콜린이 긴장된 얼굴로 사회자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루시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아마 에릭이 아니라 자신이 졸업생 대표로 졸업장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거겠지.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대표가 되지 않아도 그녀는 전혀 상관없었다.
에릭한테 또 주라지, 뭐. 1년 내내 2등만 해서 상심이 클 텐데.
그리고 마침내 교장이 대표에게 줄 졸업장을 들고 단상 위로 올라왔다.
콜린이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루시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홀 안은 조용했다. 마침내 그 고요함 속에서 사회자가 하나의 이름을 호명했다.
“루시 키넌.”
그와 동시에 루시 주변에 앉아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향했다.
“루시! 네가 졸업생 대표야!”
옆자리에 앉아 있던 콜린과 제미마가 루시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호명에 루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 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 주고 있었다. 그 광경에 또 한 번 놀란 루시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단상을 향해 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루시를 보며 교장은 대놓고 못마땅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반기지도 않는 기색을 내비쳤다.
루시가 자신의 앞에 서자,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졸업장을 펼치더니 단조로운 목소리로 내용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3학년의 루시 키넌. 위 사람은 자랑스러운 제노미움 아카데미에서…….”
교장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루시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이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상관없었다.
분명 할머니, 어머니는 날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테니까.
그녀는 가족들이 앉아 있을 객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출입문 근처에서 믿을 수 없는 얼굴 하나가 보였다.
루시는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떠보기도 했다. 그래도 그 얼굴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3년 내내 우수한 성적과 모범적인 태도로…… 어엇!”
졸업장을 읽어 나가던 교장이 갑자기 당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루시가 별안간 교장이 들고 있던 졸업장을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주세요!”
“어, 어?”
“됐으니까, 그냥 빨리 주세요!”
루시가 어리둥절한 교장의 손에서 졸업장을 홱 빼냈다.
“받았으니 내려가도 되죠?”
교장이 대답할 새도 없이 루시는 이미 단상에서 내려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루시는 출입문 쪽으로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이미 자신이 본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안 돼. 가지 마.
뒤에서 교장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루시는 그것도 무시한 채 거의 질주하다시피 하며 홀 밖으로 튀어 나갔다.
이윽고 밖으로 나온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필릭스 선배? 필릭스 선배!”
대답은 없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아직 잎이 돋지 않은 앙상한 나무들만이 그녀를 비웃듯이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그녀가 안간힘을 다해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하…….”
루시의 입에서 허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곧 그녀가 쓰러지듯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묻은 그녀는 곧장 울음을 터트렸다.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었다.
루시는 들고 있던 졸업장을 땅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졸업장 따위는 상관없어. 졸업생 대표가 되지 않아도 돼.
난 그냥 선배가 보고 싶을 뿐이란 말이야.
“나참, 그렇다고 단상 위에서 뛰어내려 오면 어떡해?”
그때,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동시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루시의 뒤통수를 다정히 감쌌다.
“이러면 내가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잖아.”
루시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어룽대는 눈앞에, 믿을 수 없게도, 그가 있었다.
“필릭스 선배?”
환영인가?
이제 하다 하다 이렇게 생생한 환영까지 보게 된 건가?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내가 미쳐 버린 건 아니겠지?
하지만 눈앞의 필릭스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루시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가져다 대 보았다. 미지근한 온기가 손에 느껴졌다. 그가 정말로 그녀 앞에 있었다.
루시가 놀란 얼굴로 필릭스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그 역시 화답하듯 루시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단단한 품. 떠날 때보다 훨씬 길게 자랐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금빛 머리칼.
“잘 지냈어?”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까지.
모든 게 진짜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오늘 졸업식에 참석할 귀빈 중 한 명을 수도까지 호위하게 됐어. 갑자기 결정된 사안이라 미리 말 못 했고.”
그가 가만히 자기 이마를 루시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이렇게 눈앞에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어 그가 루시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가져다 대려던 그때.
“필릭스!”
호통치듯 요란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하아…….”
키스하려던 필릭스가 돌연 질려 버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까 보았던 그 중년의 기사가 화난 사자 같은 얼굴로 우뚝 서 있었다.
“내가 분명 홀 안에서 대기하라고 하지 않았나! 여기서 뭘 하는 거냐!”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걸어온 기사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필릭스를 내려다보았다.
곧 그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엎드려뻗쳐!”
그리고 루시가 이 급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필릭스는 즉각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