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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8화 (108/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8화

곧 루시의 팔이 필릭스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가늘게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루시는 한참이나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옷자락을 꾹 거머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마치 필릭스를 절대로 보내지 않겠다는 것처럼.

필릭스는 그런 루시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내리다가 묵묵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굳은 결심으로 저택을 나섰지만, 막상 눈앞의 루시를 보니 떠나기 싫은 마음이 왈칵 솟구쳤다.

“……진짜 가는 거예요?”

품속에서 울먹이는 루시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흘러나왔다.

“응.”

“내가 이렇게 말려도?”

“금방 돌아올게.”

그의 차분한 대답에 루시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뒤이어 그녀는 울음을 그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연거푸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소매로 연신 눈가를 훔쳤다.

잠시 후, 절대로 필릭스를 놓아줄 것 같지 않던 루시가 마침내 팔을 풀었다. 천천히 필릭스에게서 떨어지는 그녀의 눈가는 여전히 붉었다.

“루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슬퍼하는 루시를 보며, 필릭스는 지금이 바로 그 말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난 널…….”

그러나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그의 입술 위로 손바닥이 와 닿았다. 루시가 손으로 그의 입을 막은 채, 조용히 말했다.

“어떤 말이든 무사히 돌아와서 해요. 저번에 선배가 그랬죠? 준비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난 더 기다릴 수 있어요. 기다릴게요.”

곧 따뜻한 손의 온기가 필릭스의 입에서 떨어졌다. 루시가 가만히 필릭스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잘 다녀와요. ……다치지 말고.”

“응.”

“아프지도 말고요.”

“그럴게.”

이제 정말로 작별이었다.

필릭스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콜린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해 준 뒤, 다시 말에 올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루시의 얼굴을 두 눈에 가득 담았다. 저 얼굴만 잊지 않는다면, 그는 그 어디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필릭스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향해 웃어 준 뒤 고삐를 당겼다. 곧 말이 투레질하며 달릴 준비를 했다.

그가 박차를 가하자 말은 곧장 정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얼굴이, 거대한 저택이, 그리고 한동안 그리움으로 그를 마음 아프게 할 한 사람까지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여전히 루시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 그녀와 함께 남아 있고 싶다는 충동이 마구 일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 * *

많은 것들이 변했다.

지나온 몇 달을 되돌아보니 그랬다.

평화롭기만 하던 제국의 상황도, 자신을 힘들게 하던 가족들과의 관계도. 모든 게 완전히 달라졌다.

제일 많이 바뀐 것은 필릭스 그 자신이었다.

그는 스스로도 신기했다. 자신이 누군가로 인해 그토록 행복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누군가로 인해 이토록 마음이 아플 수 있을 줄도 몰랐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스스로 전쟁 한복판으로 내몰게 될 줄도 몰랐다.

처음으로 단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릴게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필릭스로 하여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상황 속으로도 거침없이 뛰어들게 했다.

마치 루시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꼭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그는 세차게 땅을 박차며 말을 몰았다.

“꼭 돌아올게.”

그 위에서 필릭스는 스스로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돌아올게, 꼭…….

* * *

전쟁 중에도 자연은 성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어김없이 봄을 데리고 다시 찾아왔다.

차갑게 얼어 있던 땅이 햇살에 녹아내렸다.

빈 가지마다 새 생명이 움트고, 겨우내 어딘가로 사라졌던 새들이 다시 날아들었다.

밝은 햇살의 기운 덕분일까, 뒤숭숭했던 수도의 분위기도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동부에서 전해 오는 전시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도 한몫한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봄은 루시에게 그토록 기다리던 반가운 사람들을 그녀 앞으로 데려다주었다. 어머니와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할머니가 마침내 수도에 안전히 도착했던 것이다.

“할머니!”

루시는 할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무사히 가족들과 재회했다는 안도감과 약속을 지켜 준 필릭스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비록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동부에 남기로 한 아버지는 볼 수 없었지만, 루시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꼈다.

할머니는 루시에게 필릭스가 쓴 짤막한 편지를 대신 전해 주었다. 오직 루시의 안부만을 걱정하는 내용이 가득 담긴 편지였다. 루시는 온종일 그 편지가 닳고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는 사이에 봄은 훌쩍 지나가 버렸다. 뒤이어 다가온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을이 왔다.

떠오르는 기억들이 많아 힘든 계절이었다. 루시는 알레르기 약을 만들어 필릭스에게 보냈다. 한참이 지나 잘 받았다는 그의 서신이 도착했다. 그 짧은 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루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편지를 보고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을 때쯤 가을이 끝났다. 그다음엔 겨울. 그리고 다시 봄.

다섯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마침내 전쟁도 서서히 끝나 가는 듯했다.

분쟁 지역에 대하여 베로스 제국과 로잔 왕국이 담판을 지었고, 사실 전쟁은 이미 예전에 끝났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를 증명하듯 전쟁터로 갔던 청년들도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필릭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없는 교정은 루시에겐 여전히 황량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우리가 졸업이라니, 믿기지 않네.”

겨울 방학이 끝나고 서서히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교정.

산책로를 걷던 콜린이 말했다.

“만약 네가 내일도 단상 위에 올라가지 못한다면!”

그는 별안간 눈썹을 홱 치켜올리더니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에릭 로먼의 얼굴에다 주먹을 날릴 거야!”

그가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은 작은 주먹을 공중에다 휘두르는 것을 보며 루시가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퍽이나 그러겠다. 네가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날 뭐로 보고! 그 자식 정도는 한주먹거리지!”

콜린이 계속 허세를 부렸다.

그가 그토록 열을 올리는 졸업식은 바로 내일이었다.

마지막 학기까지 수석을 차지한 루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민이 많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아카데미 졸업 후의 계획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제노미움을 수석으로 졸업하게 될 루시 키넌이라는 학생이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은 이미 온 수도에 쫙 퍼져서, 그녀에게는 온갖 의술원의 입학 제의가 쇄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는 아르켈까지 그녀를 쫓아다니며 역사학회에 들라고 성화를 부리는 통에 루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선생은 기척도 없이 아무 데서나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기 때문에 루시는 언제 어디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했다.

“아무튼 그 자식도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짜져 있어야지. 지난 일 년간 일등은 계속 너였으니까.”

한 번의 시험에서 에릭에게 일등을 빼앗겼던 루시는, 그다음 시험부터 다시 일등을 되찾은 후 쭉 그 자리를 유지해 왔다. 그 덕에 모두 루시가 수석 졸업을 하게 될 것이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다만, 평민 학생을 은근히 차별하는 아카데미였기에 이번 졸업식에서 루시를 단상 위에 세울지 어떨지는 완전히 장담할 순 없었다.

“뭐, 새삼스럽게.”

루시는 그 문제를 가볍게 넘겨 버렸다.

사실, 이제 아카데미가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든지 별생각 없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녀는 오직 단 한 사람 때문에 모든 마음을 졸여 왔기 때문이었다. 이제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단상 위에 올라가니 마니 하는 일로 신경을 낭비하지 않은 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졸업식 당일이 되자, 그것 말고도 그녀를 성가시게 하는 일들이 잔뜩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를 비롯한 3학년들이 모두 졸업 가운으로 갈아입은 채 그레이트 홀로 향하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교정 안은 온통 재학생들과 졸업식을 보러 온 가족들로 바글거렸다.

루시는 그 혼잡한 사람들 속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드리안의 도움으로 베르크가의 저택에서 지내고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도 오늘 식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은 통에 가족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곧 그 시도를 포기하고 루시는 앞만 보며 걸었다.

안에 이미 들어가 계실지도 몰라.

말없이 걷다 보니 군데군데 손을 잡고 걸어가는 남녀 학생들이 눈앞에 보였다.

……필릭스 선배도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문득 그가 없는 빈자리가 너무나 허전하게 느껴져 루시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그 연인들을 바라보느라 잠깐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루시 키넌!”

익숙한 듯 버럭 하는 목소리에 루시는 몸을 긴장시켰다.

그녀는 황급히 자세를 낮추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서 아르켈이 자신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 정말!

오늘 같은 날까지 그에게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 아르켈에게 붙잡힌다면 졸업식이 시작하기 전까지 학회에 들라는 잔소리만 잔뜩 들을 테지.

루시는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어찌나 급했던지, 그녀는 달려가다가 어느 중년 사내의 발을 밟고 말았다. 기사단 제복 차림의 그 남자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루시를 돌아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루시의 사과에도 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한 뒤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걸음을 서둘렀다.

공교롭게도 향하는 방향이 같아 루시는 그 남자와 그의 일행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

“호위하라고 데려왔더니 대체 어딜 간 거야!”

루시에게 발을 밟힌 남자가 버럭 성을 냈다. 그러자 부하로 보이는 듯한 다른 남자가 언짢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 그 뺀질뺀질한 자식. 어젯밤에 향유에 머리 감는다고 염병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여자라도 만나러 간 게 틀림없습니다!”

“그 치렁치렁한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리든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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