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7화
문제는 루시였다.
과연 그녀가 가족들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과 자신이 아드리안 대신 전쟁터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필릭스는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러니 아카데미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돌덩이를 매단 것만큼이나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제법 겨울의 색이 짙어진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우중충했다. 나무들은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린 채 앙상한 팔을 들고 교정 곳곳에 서 있었다.
……전쟁 나간단 말 꺼내기에 딱 좋은 날씨네.
그 스산한 풍경을 바라보며 필릭스는 씁쓸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가 아카데미에 나타나자 먼발치에서도 알아본 루시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녀는 바람에 흩날려 머리가 헝클어진 줄도 모르고 필릭스를 향해 물었다.
“요즘 아카데미에 자주 오시네요? 바쁘지 않아요?”
축 처져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백작성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데다가 필릭스가 그녀의 가족을 수도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한시름 놓은 덕분인 것 같았다.
아마 그녀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겠지.
“할 말이 있어서. 잠깐 걸을래?”
그의 제안에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한적한 아카데미의 정원으로 들어갔다. 시든 잔디밭과 낙엽이 둥둥 떠 있는 분수대 옆을 나란히 걷고 있으니, 계절은 달랐지만 예전 생각이 났다.
고작 몇 달 전의 일인데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의 평화롭고 여유롭던 시간은 모두 꿈속의 일인 것만 같았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루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 선배는 좀 어때요?”
그녀는 그렇게 물으며 필릭스의 얼굴을 살폈다. 쌍둥이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동생을 떠나보낼 필릭스를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요새 정신이 없어서 아드리안 선배를 잊고 있었어요. 얼굴 못 본 지도 꽤 되었는데.”
그녀는 아직 아드리안이 전쟁터로 떠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아드리안 선배한테 도움받은 일이 정말 많은데……. 저는 이럴 때 아무 말도 못 해 주고.”
그녀가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저도 이런데 분명 선배도 힘들겠죠.”
루시가 필릭스의 손을 쥐었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그의 마음을 위로하듯 가만히 손등을 쓸어내렸다.
“아드리안 선배는 분명 괜찮을 거예요.”
“……루시.”
필릭스가 가만히 그녀를 부르자 루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할 말이 있어.”
이제 더는 질질 끌 수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진지해진 그의 표정에 루시도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인데요?”
필릭스는 정말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뜬 뒤 말했다.
“너희 아버님과 할머님께서 행방불명되셨어.”
“…….”
필릭스의 손을 잡고 있던 루시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가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뭐라고요?”
그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필릭스는 루시의 얼굴에 떠오르는 깊은 절망과 충격을 보며 자신의 마음도 함께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마 그녀로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루시.”
필릭스가 가만히 그녀의 팔을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루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혼이 나간 채 서 있는 그녀에게 필릭스는 브롬에서 전해 온 상황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루시는 줄곧 멍한 눈으로 입을 벌린 채 필릭스의 얼굴만 올려다볼 뿐이었다.
마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내가 보낸 사람들이 너희 가족을 찾고 있어. 며칠이 걸리더라도 꼭 찾을 거야.”
그러나 루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전쟁터에서 행방불명된 사람이 다시 멀쩡히 발견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필릭스가 루시의 얼굴을 감싸 쥔 뒤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그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내가 가서 모셔 올게.”
그의 말에 루시는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가 가다뇨?”
“내일 즉시 기사단에 입단해서 동부로 떠날 거야. 아버님과 할머님은 내가 꼭 찾아서 수도까지 모셔 올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루시는 여전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아드리안 대신 가기로 했어. 아드리안은 우리 가문에 남아 할 일이 있거든.”
“싫어요, 안 돼요.”
루시가 즉각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이미 결심했어. 난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야. 단, 이것만은 약속해. 반드시 돌아올게.”
“안 된다니까요? 다신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루시가 자신의 뺨을 감싸 쥐고 있던 필릭스의 손을 떼어 낸 뒤, 그를 밀어냈다. 그녀가 흥분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앞으론 우리 가족한테도 신경 끄세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루시.”
“아무 말 마세요!”
그녀가 단칼에 필릭스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난 가야 해.”
“안 된다고 했죠?”
루시의 얼굴에는 이제 분노마저 서려 있었다.
“만약에 가면 다신 제 얼굴 못 볼 각오하세요!”
“……내일 떠날 거야.”
“난 분명 말했어요!”
필릭스가 루시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는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필릭스를 잠시 노려보다가 곧 등을 돌렸다.
“루시!”
필릭스가 부르는 소리도 무시한 채 루시는 정원 밖으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뜻에 따라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필릭스는 쫓아갈 수도 없었다. 단지 슬픈 눈으로 그녀가 사라진 곳만 바라볼 뿐.
마침내 그도 정원을 떠날 때까지 루시는 정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루시의 뒷모습은 계속해서 필릭스의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결심을 굳혔고 그 결정이 바뀔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필릭스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방을 나왔다.
이제 푹신한 침대도 한동안 안녕이겠군.
문을 닫으며 그는 생각했다.
복도로 나온 그는 아드리안의 방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침대에 손목이 묶여 있는 동생이 보였다.
아드리안은 이른 새벽, 아무도 몰래 저택을 나서려다가 필릭스가 미리 심어 둔 하인들의 손에 붙잡혀 다시 방으로 끌려왔다.
“……이거 빨리 풀어.”
“내가 견습 기사로 입단식을 마치고 나면 레일리가 와서 풀어 줄 거야.”
필릭스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아드리안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형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필릭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부탁이 있어. 내가 없는 동안 루시를 잘 돌봐 줘.”
아드리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찝쩍대진 않는지 잘 지켜보란 말이야. 특히 노엘 로먼, 그 자식.”
“내가 찝쩍대면 어떡할래?”
아드리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도발했다.
“무섭지? 빨리 풀어.”
하지만 필릭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또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별로 안 무서운데? 우리 루시도 취향이라는 게 있어.”
“너랑 나랑 똑같이 생겼는데 무슨 취향 타령이야?”
“있다니까.”
있으니까 귀신같이 알아보지.
필릭스는 한참 어린 동생을 보듯 아드리안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너도 언젠가는 너를 귀신같이 알아보는 여자를 만나 봐. 그럼 내 말뜻을 알게 될 거다.
“아무튼 부탁한다. 루시도, 어머니도. 그리고 저 뒷수습도.”
필릭스가 아드리안의 침실에 본보기로 가져다 놓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 양은 엄청나서 아마 몇 달을 매달려야 다 훑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싸우러 가는 나보다 저 서류 처리해야 할 네가 더 고생일 것 같냐…….”
오히려 자신이 일하기 싫어 전쟁터로 튀는 모양새가 된 것 같아 동생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는 격려하듯 툭툭 아드리안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등을 돌렸다.
“필릭스!”
“간다.”
구구절절한 작별 인사는 싫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 * *
저택을 나와서는 어머니와 집사, 그리고 사용인들과 인사했다.
계속 이곳에서 미적거리기는 싫었다. 그는 집사와 사용인들에게 아드리안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짧게 남긴 뒤, 말에 올랐다.
출발하기 전, 그는 잠시 떠나 있을 저택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사용인들이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아마 그가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집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그 순간 정말 미련이 남는 것은 딱 하나였다.
……어제 끝까지 쫓아갈 걸 그랬나.
필릭스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자신에게 소리치던 얼굴을, 도망치듯 사라지던 뒷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큰 상처를 준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져 왔다.
결국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가는구나.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더 떠나기가 싫어질 것만 같았다. 필릭스는 굳은 결심으로 루시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떨쳐 냈다.
마침내 그가 출발하기 위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때였다.
저택 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을 태운 말 한 마리가 빠르게 저택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당황한 문지기가 막으려 했지만 눈 깜짝할 새 그 말은 저택 안으로 들어서 필릭스의 앞으로 달려왔다.
말고삐를 쥐고 있던 콜린이 급히 말을 멈춰 세우자, 뒤에 타고 있던 사람이 굴러떨어지듯 땅으로 내려섰다.
“루시!”
깜짝 놀란 필릭스가 서둘러 말에서 뛰어내려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필릭스 선배!”
루시가 곧장 필릭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