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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6화 (106/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6화

속죄?

필릭스는 저녁 어스름 속에 파묻힌 듯 서 있는 아드리안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이 어머니에게 했던 말이나 쓰러진 아버지를 모른 척했다는 사실보다도,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듯한 그 태도가 더 충격적이었다.

무언가 꽉 얹힌 듯 속이 답답해져 왔다.

속죄라니.

그의 동생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반드시 이기고 돌아올게’도 아니고 ‘속죄하고 싶다’는 말만 남기고 전쟁터로 떠나겠다고?”

필릭스는 기가 찬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내가 마음 편히 널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아?”

“이전에 말했듯이 아무리 날 닮은 사람을 대신 보낸다고 한들 금방 들킬 일이야. 그땐 우리만 곤란해질 것 같아? 어머니까지 엮이게 되실 거야.”

아드리안의 얼굴은 단호했다.

사실 그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동생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체자를 구하겠다고 객기를 부렸지만, 필릭스 역시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완벽하게 세상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네가 뭐라 하든지 난 이틀 뒤에 떠날 거야.”

이틀 뒤는 필릭스가 정식으로 가주 대리직의 자리에 오르기로 한 날이었다. 공작이 깨어나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고, 이대로 계속 가주의 자리를 비워 놓을 수는 없었기에.

“우리를 대하는 아버지의 방식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어. 하지만 그가 누누이 했던 말 중 너와 내가 가야 할 길이 확연히 다르다는 말만큼은 사실이야.”

어스름 속에서 아드리안이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짙은 그늘이 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확고했다.

“너는 우리 가문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고, 나도 내가 다해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막지 말아 줘.”

분명 단호한 말투였다. 굳은 결심이 보이는 말투였다. 그런데도 아드리안은 위태롭게만 보였다.

곧 필릭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마치 자신이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초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그가 전쟁에 나가서도 자신의 목숨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 같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실 아드리안의 고백을 듣고 아무렇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필릭스는 동생이 어머니에게 형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 달라는 말을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동생을 향한 그의 애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드리안이 전쟁에 나감으로써 죄책감을 떨쳐 버리려고 하는 것. 그건 결코 필릭스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절대로 아드리안의 참전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테라스의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냈다. 나타난 사람은 하인이었다.

“도련님.”

그는 테라스 안으로 걸어 들어와 필릭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쌍둥이 형제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임을 알고 조용히 고개를 조아린 채 섰다.

“얘기해. 난 이만 나가 볼게.”

필릭스가 붙잡기도 전에 아드리안은 테라스를 나가 버렸다.

급하게 전할 말이라도 있는 듯 하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에, 필릭스는 아드리안을 쫓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하인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브롬에서 온 전령이 급히 다른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소식?”

필릭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었다. 루시의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급하게 전할 소식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루시 키넌 양의 부친과 조모가 전쟁터에서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릭스는 세차게 두드려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버지가 다시 깨어났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당혹스러운 눈길로 하인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 데른 백작성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필릭스가 허망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인은 송구한 얼굴로 전령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백작성에 피난 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라 합니다. 그런데 키넌 양의 부친이 의사이고 조모가 치료술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후방의 지원군으로 차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한 탓에…….”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필릭스의 표정을 보며 하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고?”

“백작은 전투를 지휘하느라 정신이 없어 실종자들을 찾을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베르크가에서 보낸 인력을 동원해 따로 수색 중인 상황입니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

필릭스가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하인이 얼른 고개를 조아린 뒤 테라스를 떠났다.

혼자 남은 필릭스가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희망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바닥을 뚫고 지하까지 파묻혀 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루시에게 가족들을 꼭 수도로 데려와 주겠노라고 자신 있게 약속했다.

그런데 겨우 그녀 손에 쥐여 준 희망을 이렇게 허무하게 빼앗아 버릴 순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녀의 가족들을 찾아 안전하게 데려와야만 했다.

* * *

밤이 깊도록 필릭스는 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테라스를 서성거렸다.

……루시의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절망한 모습 역시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에 하나 루시의 가족들을 찾지 못한다면…….

필릭스는 괴로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아드리안의 참전 문제까지 맞물려 그는 한참을 고뇌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떠올리든 간에, 그는 오직 하나의 결론에만 도달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었던 결론인지도 몰랐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루시의 가족들을 찾아 무사히 수도로 데려오고, 아드리안이 자신을 전장 한가운데 내던지는 것을 막는 것도, 모두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필릭스는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 * *

어두운 복도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필릭스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의 주인은 아직 잠들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필릭스가 나타나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정말로 미안해?”

필릭스가 문 앞에 선 채 나직한 물음을 던졌다.

“그럼 여기 남아. 네가 가주 대리직을 맡아서 가문을 이끌어 가.”

아드리안은 곧장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갈게.”

필릭스가 앞뒤 없이 하는 말에 아드리안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내가 전쟁터로 가겠어.”

필릭스의 말이 끝나자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아드리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뭐가 말이 안 돼? 네가 가는 것보단 내가 가는 게 나아. 넌 싸움도 못 하잖아. 사람한테 주먹질해 본 적은 있어?”

필릭스의 말에 아드리안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필릭스.”

“나도 충동적으로 하는 말 아냐. 사실은…… 징집령이 내려졌을 때부터 이런 결정을 생각해 두고 있었는지도 몰라. 검술 실력도 내가 훨씬 좋고 힘도 더 세잖아.”

“필릭스, 제발.”

“그러니까 네가 여기 남아. 넌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아. 여기서 가문을 돌보는 게 더 맞을 거야. 내가 이제껏 너의 능력을 봐 왔잖아.”

필릭스가 아드리안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드리안, 너만 죄가 있는 게 아니야. 나 역시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것 없이 살았어. 이 가문의 번영은 우리 모두의 죄야. 그러니까 우리 선에서 끝내자.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 가문의 탐욕을 끝내는 거야.”

어깨를 붙잡은 필릭스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만약 네가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 혼자서 해낼 자신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여기 남아. 난 반드시 살아 돌아올 자신이 있으니까.”

형을 바라보는 아드리안의 눈동자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이번에는 그가 거센 충격을 받은 얼굴로 필릭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동생을 빤히 바라보며, 필릭스는 자신이 전쟁터로 가야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루시의 아버지와 할머니가 전쟁터에서 행방불명되었어.”

아드리안의 눈을 마주 보는 필릭스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가 확고부동한 어조로 자신의 다짐을 얘기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루시의 가족들을 찾아 수도로 데려와야 해. 루시와 약속했어.”

“그런 거라면 나도……!”

“됐어! 넌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마.”

필릭스는 아드리안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를 침대에 억지로 눕혔다. 그러곤 이불을 그의 머리끝까지 뒤집어씌웠다.

“필릭스!”

이불 속에서 아드리안이 버둥거리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필릭스는 동생이 미처 붙잡기도 전에 방을 나와 버렸다.

문을 닫자마자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복잡한 표정의 공작 부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를 모두 들은 것 같았다.

“필릭스…….”

그녀가 가만히 필릭스를 부르며 팔을 붙잡았다.

한때 이 가문의 모든 것을 손에 쥘 줄 알았던 아들, 그래서 다른 아들보다 애정을 주지 않았던 아들.

그 아들이 자의적으로 전장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조금쯤은 과거를 후회하고 있을까? 내게 미안해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제 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도 괜찮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괜찮지 않았으니까.

“아드리안을 잘 돌봐 주세요.”

필릭스가 어머니의 손에서 가만히 자신의 팔을 빼냈다. 공작 부인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그런 어머니를 남겨 두고 문 앞을 떠났다.

그의 앞날에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동생을 대신해 사지로 걸어 들어가겠다는 아주 멍청한 결정을 했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후련하고 평온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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