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5화 (105/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5화

루시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가 좋아 필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품 안에서 버둥거리던 루시가 필릭스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그제야 그는 루시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둘을 흘끔대며 수군거리는 중이었다.

루시는 발개진 얼굴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요…….”

“보라고 해.”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루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뻔뻔해지셨네요. 이게 바로 권력의 힘인가?”

“그래, 맞아. 권력 쥐어 보니 참 좋네.”

둘의 주변으로 학생들이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이 예상치 못한 커플의 등장에 그들은 한바탕 떠들 거리가 생겨 흥미진진하다는 얼굴이었다.

루시는 필릭스의 손목을 붙잡은 채 복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무 저항 없이 그녀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필릭스를 보며 학생들은 또 한 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구경꾼들에게서 벗어난 후, 그들은 달리다시피 하던 걸음을 늦춰 천천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삼 층에 다다라 한숨 돌리고 난 뒤, 필릭스가 루시에게 브롬에서 온 소식을 전해 주었다.

“브롬에서 전령이 왔었어.”

그 한 문장에 루시는 고개를 홱 들어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네 가족들은 모두 무사해. 데른 백작의 성에서 보호를 받고 계시다나 봐.”

가족의 안전을 전해 들은 루시의 눈가가 금세 촉촉해졌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요? 진짜요?”

“그래, 정말이야.”

전쟁이 벌어진 후로 그녀의 얼굴에서 좀처럼 떠나가지 않던 어두운 그늘이 처음으로 걷히는 듯했다. 루시는 오랜만에 환한 웃음을 되찾으며 밝게 미소 지었다.

“내가 꼭 수도로 데려와 줄게. 그러니까 넌 아무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가 필릭스의 허리를 껴안으며 안겨 들었다. 그러더니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고마워요…….”

계속 고맙다고 중얼거리는 루시의 등을 필릭스는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루시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평안과 안전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잠시 뒤, 루시가 필릭스의 품에서 얼굴을 떼고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코너 남작님에 대한 소식은 없었나요?”

필릭스는 난감한 얼굴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아마 남작 부부는 브롬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영주는 결코 영지를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전쟁터로 나갈 아버지를 걱정하던 콜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기운 없는 얼굴을 생각하니 필릭스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루시는 대답이 없는 필릭스에게 더 이상 브롬의 소식에 대해 묻지 않았다.

“어서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루시가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된 터였다.

둘은 약속한 듯이 동시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정은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많은 남학생들이 이미 전쟁터로 떠난 뒤였다.

불과 몇 주 사이에 이렇게 된 상황이 필릭스는 믿기지 않았다. 나라도, 그의 가문도 예측할 수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루시가 가만히 필릭스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 온기가 느껴지자 필릭스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한동안 학생들이 빠져나가 텅 빈 복도를 걷고 또 걸었다.

* * *

베르크의 일꾼들은 하루빨리 공작의 공석이 메꾸어지길 바랐다. 게다가 집사는 물론 보좌관들도 필릭스가 공작의 뒤를 이어 작위를 받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필릭스는 섣불리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언가 한 가지 해결하지 않은 문제가 남은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이렇게 의욕적으로 먹는 건 처음 봐.”

저녁 시간. 필릭스는 맞은편에 앉아 앞에 놓인 음식을 모두 먹어 치운 아드리안을 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아드리안도 조금 놀란 눈으로 말끔히 비워진 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이어 그는 필릭스와 어머니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게.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여 하는 식사라서 그런가.”

그렇게 말하며 아드리안은 비어 있는 상석으로 흘긋 시선을 주었다.

공작이 쓰러진 후, 베르크가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우선 공작 부인은 더 이상 저택을 떠도는 유령처럼 보이지 않았다. 겁먹은 사람처럼 움츠리거나 주눅 든 사람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아드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예전보다 웃는 일이 많아졌으며, 필릭스만큼이나 서류를 검토하는 일에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작 부인과는 달리 아드리안에게서는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와 한 몸에서 만들어져, 함께 태어나고, 함께 자란 필릭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웃음은 모두 꾸며진 것이었다. 그에게는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

먼저 식사를 끝낸 아드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필릭스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인기척을 느낀 아드리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봐, 필릭스.”

그가 난간을 짚고 선 채 넓은 베르크의 전경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항상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곳이었는데 이제 그렇지 않아. 지금은 정말 평화로워 보여.”

동생은 정말로 아무 고민 없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하지만 필릭스는 그 얼굴을 믿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대꾸가 없는 형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며칠 동안 서류를 검토하느라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필릭스의 얼굴이 조금 수척해져 있었다.

“난 원래 책상에 앉아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거짓말.”

아드리안이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은 예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네가 일부러 시험 문제를 틀리고 수업에 불성실한 척하고 있다는 거.”

아드리안이 문득 후회스러운 얼굴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네가 후계자로서 너무 완벽해지면 아버지가 날 쓸모없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그래서 날 더 이용하려고 하지도 않을까 봐 무서웠거든. 그래서 네가 일부러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지.”

필릭스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전혀 놀랍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들 형제를 옭아매는 존재는 사라지고 없었으니. 과거의 일들은 그저 과거로 덮어 두고 싶었다.

그런 필릭스를 향해, 아드리안은 뜬금없이 중대한 사실을 선언했다.

“필릭스, 나 대신 사람을 구할 필요는 없어. 내가 전쟁터로 갈 테니까.”

“……이미 말했지만 그건 안 돼.”

필릭스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아드리안도 물러서지 않고 곧장 반박해 왔다.

“네 입으로 우리 가문이 저지른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자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아무런 죄 없는 청년 하나를 돈으로 사서 사지로 몰아넣겠다고?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나 때문에?”

그 말에 필릭스가 발끈했다.

“네가 왜 그럴 가치가 없어! 너는 내 가족이야. 전쟁에 보내지 않기 위해서라면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도 있어.”

“아니.”

아드리안이 위태로운 표정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네 생각처럼 난 그렇게 좋은 가족이 아니거든.”

“……무슨 소리야.”

의미심장한 말을 던져 놓고서 아드리안은 한참을 망설였다. 입술을 깨물고, 밭은 숨을 내쉬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또 무슨 자책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그를 필릭스는 안타까우면서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혼자 속으로 무슨 고민을 끙끙 앓고 있는 거냐고.

좀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는 법이 없는 동생.

지금 이 순간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아드리안은 필릭스에게 하나뿐인 동생이자, 친구이자, 반쪽이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건, 필릭스는 모두 들어 주고 위로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이윽고 아드리안이 마음을 정한 듯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열어 뜻밖의 말을 뱉어 냈다.

“……어머니가 너에게 무관심했던 건 모두 나 때문이야.”

아드리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날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 내가 어머니께 울면서 애원했어. ……너보다 나를 더 사랑해 줄 순 없겠느냐고.”

테라스로 불어온 초겨울의 바람이 형제의 머리를 마구 흩트리며 지나갔지만 그들은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가문의 모든 걸 가져갈 네가, 심지어 아버지의 죽음의 손길마저 피해 간 네가 너무 부러웠어. 그리고 한때는 원망스럽기도 했어. 그래서 어머니께 애원했어. 제발 부탁이니, 필릭스보다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해 달라고. 제발 당신만이라도 나를 더 사랑해 달라고…….”

예상치 못했던 그의 고백에 필릭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처음 듣는 얘기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뭐라도 말해.

아슬아슬한 동생의 얼굴 앞에서 그의 머리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어떠한 말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아드리안은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더 고백했다.

“거기다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것도 나야.”

“뭐?”

“그 사람이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든 게 바로 나라고.”

뜬금없는 말에 필릭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버지는 과로로 쓰러지신 거야.”

“아냐……. 그날 밤, 아버지가 쓰러진 직후 난 일부러 사람을 부르지 않았어. 그가 죽기 직전으로 치닫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기만 했을 뿐. 만약 사람을 불렀다면 저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

이제 아드리안의 얼굴을 뒤덮고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후회뿐이었다.

“이제 알겠어? 필릭스, 너를 평생 외롭게 살도록 만들고, 아버지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게 바로 나야. ……난 이제 더 이상의 죄는 짓고 싶지 않아.”

그가 느리게 숨을 뱉어 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니 내가 전쟁터로 가서 속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