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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4화 (104/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4화

“저주라면 저주인가.”

필릭스는 여전히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공작이 쓰러진 지 이틀째. 주치의의 말대로 그는 정말로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덕에 다른 가족들의 삶에 자유와 평화가 찾아온 것은 다행이었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대로는 조사를 받을 수가 없잖아.”

필릭스는 머리를 짚었다. 맞은편에서 아드리안도 고민에 잠긴 얼굴로 공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공작은 의식이 없어 진술도 불가능했다. 고발한다 해도 그는 재판장에조차 서지 못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공작과 함께 사업을 도모했던 몇몇 귀족들의 낌새도 심상치 않았다. 공작이 쓰러진 후, 그들은 나름대로 공작가의 동향을 살폈고 필릭스가 아버지를 고발할 생각이라는 것을 눈치챈 듯싶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까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자기들끼리 일을 꾸며 필릭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태세였다.

안타깝게도 그 공모에 힘을 실어 줄 만한 근거도 존재했기 때문에 필릭스는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베르크가의 사업이 진행될 때마다 다름 아닌 필릭스가 참석했다는 증거들도 명확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야.”

아드리안이 자책했다. 공작의 명령으로 필릭스인 척하며 여러 행사에 참석했던 그는 과거를 깊이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했는데……. 나 때문에 너만 곤란하게 되었어.”

공작은 조사를 받을 수도 없는 상태였고, 가담했던 나머지 귀족들은 여차하면 자신들만 쏙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은 자승자박일 뿐이었다.

필릭스는 고발 대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을 다른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뒤이어 공작가의 보좌관이 들어섰다.

“필릭스 도련님, 얼마 전 공작께서 지시하신 대로 이카르에 갈 준비는 모두 끝마쳤습니다. 언제 출발하실 예정이신지요?”

며칠 전 공작과의 불편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들은 석재 협상권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작은 일찍이 필릭스를 이카르로 보낼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이다.

필릭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협상은 우리가 진행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는 레일리에게서 서류를 하나 받아 보좌관에게 건넸다.

“이것을 황실에 전달하세요.”

서류를 받아 살피던 보좌관이 당황스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도련님, 이건 이카르의 석재와 관련된 모든 협상권을 양도한다는 문서입니다. 정말 황실에 전달하시는 겁니까?”

이제까지 공작이 내리던 지시와는 명확히 다른 명령에 보좌관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네, 지금 당장 황실에 전달하세요. 단, 아버지가 이걸 어떻게 얻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적당히 다른 이유를 꾸며 내세요.”

보좌관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지만,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공작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군말 없이 서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것으로 석재는 적정한 가격으로 동부에 공급될 수 있을 터였다. 아버지의 말대로 전쟁이 제국의 승리로 끝난다면, 하루빨리 동부에 튼튼한 성벽이 건설되어야만 했다.

더 이상 루시의 고향에 침입이나 약탈, 그리고 전쟁과 같은 참상들은 일어나지 않길 바랐으니까.

“이렇게 우리가 하나씩 바로잡아 가면 되는 거겠지.”

다시 조용해진 공작의 방 안에서 필릭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버지를 고발할 수 없다면…… 우리라도 나서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수밖에 없어.”

곧 그의 눈동자 위로 굳세고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 * *

그 결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필릭스는 바쁜 하루를 보냈다. 처음으로 되찾은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집무실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서류를 검토해야만 했던 것이다.

곧 어느 하인이 집무실로 찾아와 브롬에서 돌아온 전령이 전해 준 소식을 전달했다. 필릭스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이었다.

“키넌 일가의 소재를 찾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브롬과 가장 가까운 피난처인 데른 백작성에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필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루시의 가족들은 모두 무사했다.

좀처럼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그는 혹여나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가 마음이 조마조마하던 차였다.

“좋아. 사람을 보내서 빠른 시일 내 수도로 데려오도록 해.”

“저, 그런데…….”

필릭스의 명에 하인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뭐지?”

“폐하께서 동부 주민들에 대하여 이주 금지령을 내리셨습니다. 며칠 전부터 제국군이 감시하고 있어 동부의 주민들은 허락 없이 피난처를 이탈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필릭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전쟁으로 인해 동부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탈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이동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데른 백작과 접선해 봐. 얼마를 주어서든 안전하게 여기로 데려와.”

필릭스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하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 뒤 다시 고개를 들며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전에 일러 주신 생김새와 최대한 비슷하게 생긴 청년을 찾았습니다. 머리, 눈동자 색, 키, 체중, 그리고 얼굴도 상당히 흡사합니다.”

“좋아. 내가 미리 말해 둔 내용으로 계약할 수 있는지 의사를 물어봐.”

“알겠습니다.”

하인이 나갔다.

그러나 문은 닫히지 않았다. 곧 문 뒤에서 아드리안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 청년이 누군데?”

그가 물었다.

“있어.”

필릭스의 짤막한 대답에 아드리안이 눈가를 찌푸렸다.

“설마 나 대신 전쟁터에 보낼 사람을 찾고 있는 거야?”

필릭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드리안이 이 사실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길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집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필릭스, 수도 귀족들 중에는 이미 우리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아. 그렇게 간단히 속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이 일이 발각되면 처벌을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너야.”

“난 기사단과 협상해서 그 청년을 가장 사람이 적고 평기사들이 많은 곳으로 보낼 거야. 아무도 네 얼굴을 모르는 곳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야.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대도 모든 사람의 눈을 피해 갈 순 없어.”

아드리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이 계획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로 필릭스를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형도 만만치 않았다.

“난 널 절대로 전쟁터로 보내지 않겠어.”

필릭스가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의 동생은 이미 충분하리만큼 잔인한 생을 겪어 왔다. 겨우 아버지의 손에서 살아남은 동생을 또다시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필릭스가 베르크의 가주였다. 그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동생을 지킬 작정이었다.

“그러니 내 말에 따라 줘.”

생각보다 더 단호한 그의 말투에 아드리안은 착잡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 * *

공작이 쓰러진 후, 쌍둥이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갈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그들에겐 더 이상 아카데미의 졸업이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릭스에게는 쓰러진 공작을 대신해 가주의 일을 처리하는 게 더욱 중요한 문제였고, 아드리안은 전쟁터로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이었다.

필릭스는 하인에게 보고를 받은 뒤, 검토하고 있던 서류들을 대충 정리한 채 서둘러 말을 타고 아카데미로 향했다. 어서 루시를 만나 그녀의 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졌다.

그동안 브롬에서 꽤 긴 시간 동안 소식이 없어 그는 애가 타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니 루시는 얼마나 마음이 타들어 갔겠는가.

한시라도 빨리 가족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 주고 그녀의 안심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베르크 공자가 갑자기 아카데미에 나타나자,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어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광경을 보고 그가 필릭스라는 것을 알아본 뒤에는 더욱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작이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은 이미 온 수도에 퍼진 뒤였고, 필릭스가 그 뒤를 이어 공작이 될 것이란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차기 베르크 공작이 누군가를 찾듯 복도 위에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학생들은 이전과는 다른 눈빛으로 흘끔대기 바빴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한참.

필릭스는 드디어 찾아 헤매던 사람의 얼굴을 어느 교실 앞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루시!”

그녀는 교실에서 나오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곧 루시도 필릭스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녀 역시 필릭스가 반가운 모양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에게 바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런 루시를 향해 필릭스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 선배. 오늘은 수업 나오신 거예요?”

그녀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필릭스는 대답 대신 갑자기 루시를 꼭 껴안았다.

“선배……!”

품 안에서 당황한 루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란 것은 루시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주변 학생들도 그 자리에 굳은 듯 서서 숨을 헉, 들이켰다.

하지만 필릭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과 루시의 사이를 가로막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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