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3화
필릭스가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랗고 호화로운 침대의 중앙에는 창백한 얼굴의 공작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공작 부인은 그의 머리맡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풍경은 너무나 정적이어서 마치 그림 속 세상처럼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오직 공작의 상태를 살피는 주치의와 시중드는 하인들만이 분주하게 침대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필릭스가 곁에 선 아드리안을 향해 속삭이듯 물었다.
“네 방에 갇혀 있던 사람이 나란 걸 깨닫고는 충격을 받아 쓰러졌어. 그리고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
필릭스가 침대로 다가갔다.
공작은 정말로 시체처럼 보였다. 원래 창백하고 퀭한 얼굴이긴 했지만 쓰러진 후엔 혈색이 모조리 사라져 죽은 사람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침대가 아니라 관에 눕혀야 하는 거 아냐?
“살아 있는 거 맞습니까?”
필릭스가 주치의를 향해 물었다. 주치의는 당황한 얼굴로 “그,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의식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한마디도 않고 있던 공작 부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안타깝습니다만, 부인.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의식을 되찾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식이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이전처럼 말을 하고 움직일 수 있을지는…….”
주치의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혹여 공작 부인과 공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역정을 내진 않을지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의 가망이 없다는 진단에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누군가는 여전히 무감한 얼굴로 공작의 얼굴을 내려다보았고, 또 누군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을 뿐.
“만약 이대로 주인님께서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이번에는 조용히 침대 옆을 지키고 서 있던 집사 레일리가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필릭스에게로 천천히 옮겨 갔다.
“도련님께서 가문의 일을 본격적으로 맡아 이끄시게 될 겁니다. 물론 저와 비서관들이 옆에서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방 안의 모든 시선이 필릭스에게로 모여들었다. 이제 모든 책임이 그의 어깨에 지워진 셈이었다.
베르크가를 이끄는 일도, 아버지가 벌인 사업들을 수습하는 일도, 그밖에 앞으로 벌어지게 될 모든 일까지.
바라 왔던 일이 아닌가. 아버지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갖게 되는 것.
그러나 막상 그 순간이 다가와,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지워졌다고 생각하니 필릭스는 문득 부담감에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집사는 그런 필릭스의 심정을 눈치챈 것인지,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주인님도 저희가 최선을 다하여 치료하겠습니다. 그러니 마님과 도련님들께서는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집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작 부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누워 있는 공작의 얼굴로 냉담한 시선을 한 번 던진 뒤 말했다.
“난 오늘부터 다른 방에서 잘게.”
그녀의 말에 하녀 하나가 곧장 그녀를 다른 방으로 안내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하인들을 제외하곤 공작의 곁을 지키려는 사람은 없었다. 필릭스와 아드리안도 각자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공작의 침실을 나왔다.
가주가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저택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아드리안.”
그는 앞서 걸어가는 동생을 불렀다. 아드리안은 무감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슬픔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기쁨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아까 전 희미한 미소라도 띤 채 필릭스를 마중 나왔을 때와는 달리, 완벽한 무표정이었다.
필릭스는 막상 그를 불렀지만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 형을 향해 그제야 아드리안이 빙그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잘 자, 형. 오늘 밤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
그리고 아드리안은 제 방으로 사라졌다.
* * *
필릭스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 위에 앉아 있던 루시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달려오더니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공작님이요?”
루시가 동그래진 눈으로 되물었다.
필릭스의 집안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아주 괜찮아.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다면 루시가 놀라겠지.
필릭스는 대답 대신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소파에 다시 앉혔다.
“배고프지? 식사는 방으로 가져오라고 했어.”
“저…….”
루시는 망설이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눈이 이제 완전히 깜깜해진 창밖으로 향했다.
“너무 늦었는데요. 통금 시간도 다가오고 있고…….”
“걱정 마. 마차로 데려다주라고 할게.”
필릭스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하인들이 저녁을 가져왔다.
“어서 먹어. 배고프잖아.”
필릭스가 음식이 담긴 접시를 그녀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루시는 쭈뼛거리며 음식을 내려다보더니 결국 포크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같은 수도에 있다고는 해도 이 밤중에 대신전까지 다녀온 것은 고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루시는 빠르게 달리는 말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 것 같았으니.
필릭스는 배가 많이 고팠던 듯 평소보다 의욕적으로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 넣는 루시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허기로 인해 먹는 데만 집중했기 때문인지 둘의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이제 정말로 가야겠어요.”
자신이 말끔히 먹어 치운 빈 접시를 머쓱하게 내려다본 뒤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미 통금 시간이 지나 버렸지만…… 어쩔 수 없죠. 벌점을 받는 수밖에.”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
지금쯤이면 플로라 사감도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아마 기숙사로 들어가려고 그녀를 깨운다면 불같이 화를 내겠지.
필릭스가 깜깜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자고 갈래?”
루시가 겉옷을 여미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뭐라고요?”
그런 루시를 보며 필릭스가 씨익 웃자, 루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필릭스가 침대로 가서 그 위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넌 여기서 자.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하지만…….”
루시가 우물쭈물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베개를 들고 소파로 갔다. 루시는 제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어 있었다.
“아,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다.”
루시는 아직도 교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필릭스는 루시가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무시하며 종을 흔들었다. 곧장 하녀가 들어와 명령을 기다렸다.
“루시가 입을 옷과 목욕물을 준비해 줘.”
“네, 도련님.”
하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방을 나갔다.
“씻을래?”
“아니요.”
루시가 뻣뻣한 얼굴로 즉각 대답했다.
필릭스는 짓궂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뒤 욕탕으로 갔다.
그가 씻고 나서 옷까지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왔을 땐, 루시도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그녀는 공작 부인의 잠옷을 입고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필릭스가 돌아오자 루시가 곁눈질로 그의 얼굴을 흘끔 본 뒤 다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거기 앉아 있어?”
소파에서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는 루시를 향해 필릭스가 물었다.
“제가 여기서 잘게요.”
“내가 퍽이나 널 거기서 재우겠다.”
필릭스가 루시 옆에 털썩 앉으며 웃었다.
“얼른 침대로 가. 아니면 나랑 여기서 같이 자고 싶은 거야?”
필릭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로 달려갔다.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간 그녀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더니 자신의 온몸을 돌돌 감쌌다.
그런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은 필릭스가 촛불을 불어 끈 뒤 소파 위로 길게 드러누웠다.
잠시 후, 침대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루시가 팔을 크게 휘저으며 침대보를 쓸어내려 보고 있었다.
“이렇게 큰 침대에는 처음 누워 봐요.”
어둠 속에서 루시가 중얼거렸다.
“너무 크니까 오히려 더 허전한 느낌이 드네요.”
“그럼 내가 옆에서 같이 잘까?”
“그건 됐어요.”
루시는 이번에도 칼같이 거절한 뒤 필릭스의 시선을 피하며 눈을 감았다.
모든 불이 꺼진 방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창 안으로 흘러든 푸른 달빛에 루시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싱숭생숭한 얼굴이었다.
필릭스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버지가 쓰러진 지금, 필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한 마음이었다. 자신은 지금 이렇게나 편안한데, 루시만 괜스레 심란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필릭스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걱정하지 마.”
어둠 속에서 필릭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꼭 수도로 데려와 줄게.”
루시가 다시 눈을 뜨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너희 가족들 말이야. 어떻게든, 여기로 데려와 줄게.”
그의 말에 루시가 작게 미소 지었다.
“……네.”
그리고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루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베르크 공작이 의식 불명 상태라는 소식은 어느 가십지로 시작해 온 제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쓰러져 의식이 없는 공작을 두고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떠들어 대기도 했다.
“이미 두 차례 사람들 앞에서 어지럼증으로 휘청거리신 적이 있습니다.”
집사 레일리가 설명했다.
“더군다나 그중 한 번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황궁 연회 때였죠. 그때부터 사람들은 주인님의 건강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과로로 인해 공작의 건강은 이미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전 베르크 공작이 마차 안에서 과로사한 전적이 있어, 사람들은 그와 이 일을 엮어 ‘베르크가의 저주’라고 일컫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