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2화
육중한 말이 어둠 속을 세차게 내달렸다. 얼굴을 스치는 밤바람에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말을 타고 이렇게 빨리 달려 본 것은 처음이라 루시는 필릭스의 허리를 더욱 꽉 붙들었다.
공작가를 떠난 지 약 이십 분. 말을 쉬지 않고 몰아붙인 덕에 둘은 생각보다 더 빨리 대신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루시는 눈앞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신전을 넋 놓은 채 바라보았다. 그림으로만 접했을 때도 아름다웠는데, 직접 마주하니 그 자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웅장하고 경건했다.
하지만 그 신비로운 모습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말이 광장을 지나쳐 신전 앞뜰에 들어서자 필릭스가 황급히 고삐를 당겨 멈춰 세웠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가 루시를 내려 주었다.
땅으로 내려서며 본 필릭스의 표정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 긴장한 것 같은 표정에 루시도 덩달아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드리안 선배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녀는 도서관에서 반납대를 지키거나 바닥을 청소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바닥은 이미 광이 나서 반질반질했다. 하지만 루시는 닦고 또 닦았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밀려드는 잡생각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아무래도 공작의 초대를 아무 말도 없이 거절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필릭스는 걱정 말라고 했지만 어딘가 오싹한 베르크 공작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그에 대한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공작님께 크게 혼이 나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힐 걸 그랬어.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고 밤이 찾아오도록 필릭스가 아카데미로 돌아오지 않자, 루시는 더욱 초조해졌다.
때마침 도서관을 나오면서 아드리안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오아시스를 발견한 나그네처럼 그에게로 달려갔다.
“아드리안 선배!”
“루시.”
“혹시 필릭스 선배 기숙사로 돌아왔나요?”
“아니…….”
루시의 물음에 아드리안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제가 오늘 공작님의 초대를 받았는데, 필릭스 선배가 멋대로 취소하곤 자기가 대신 가 버렸어요. 그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요. 저 때문에 혼나는 건 아니겠죠?”
언제나 차분한 말로 남들을 안심시켜 주던 아드리안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웬일로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응에 루시는 덜컥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가 집으로 가서 확인해 볼게.”
그렇게 말한 후, 아드리안은 곧장 발길을 돌렸다. 그 뒤를 루시가 바짝 쫓아갔다. 그녀가 마구간까지 따라온 것을 보고 아드리안이 물었다.
“너도 가려고?”
“네, 저도 갈 거예요! 얼른 가요!”
루시가 마구간 안으로 먼저 들어가며 아드리안을 재촉했다.
그녀는 필릭스가 괜한 객기로 공작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진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이를테면 자신을 변호하는 말이라든가.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나서서 필릭스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며, 자신이 일방적으로 따라다닌 것이라 말할 작정이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필릭스와 공작의 사이가 틀어지기를 전혀 바라지 않았다.
“얼른요, 선배!”
루시의 성화에 아드리안은 곤란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 그냥 저택 밖에서 기다릴게요! 그냥 필릭스 선배 얼굴만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
루시가 거짓말로 애원했다.
그녀가 말 앞에서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자 아드리안도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 둘은 프레드 영감이 코를 골며 자는 사이에 말을 타고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공작가에 도착했을 때, 루시의 불길한 예감과는 다르게 저택은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했다. 이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창문마다 은은한 불빛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건가?
아무 일이 없다면 다행이었다. 아드리안도 별다를 것 없는 저택의 분위기에 안심한 것인지 루시를 돌아보며 나직이 말했다.
“조용한 걸 보니 별일 없는 것 같아.”
그런데 홀 안을 들여다보던 아드리안이 돌연 심각해졌다.
“왜 그러세요?”
“쉿.”
그가 손가락을 입에 대며 루시를 조용히 시켰다. 그러더니 가만히 손짓하며 자신을 뒤따라오게 했다.
계단 밑까지 다가가서야 루시는 들을 수 있었다. 이 층에서 음험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루시를 계단 아래의 빈 공간으로 이끌었다. 둘은 어둠 속에 숨어 말소리를 엿듣기 시작했다.
루시의 귀에도 익숙한 싸늘한 음성. 공작의 목소리였다. 그는 낮고 서늘한 말투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홀 안을 쿵쿵 울리는 발소리들이 이어졌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여러 명의 무장한 남자들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루시, 나가자.”
아드리안이 가만히 속삭였다.
“하지만…….”
루시는 겁먹은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들의 거친 발소리가 연신 계단을 쿵쿵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나가자.”
아드리안이 계속 위를 올려다보는 루시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나도 잘 모르겠어. 필릭스에게 들어 봐야 할 것 같은데.”
아드리안은 그녀를 데리고 저택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봐, 저기가 필릭스의 방이야. 방금 불이 켜졌어. 그리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보이고.”
그의 말대로 정말로 커튼으로 가려진 창 안으로 일렁거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무래도 계단으로 올라가기엔 무리일 것 같은데.”
갑자기 그가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벽돌 사이에 손을 짚었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었다.
“……벽을 타고 올라가시게요?”
“그 수밖에는 없잖아?”
“둘 다 벽 타는 게 취미예요?”
그 질문에 아드리안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성큼성큼 창문까지 기어올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창가에 다다른 그가 안의 동태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창문을 두드렸다. 곧 창문이 열리고 아드리안이 그 너머로 사라졌다.
루시는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다시 아드리안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후, 창문이 다시 열렸다. 루시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달빛 아래 밝은 금빛 머리칼을 찰랑이며 한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루시가 놀랄 새도 없이 창턱에 발을 걸치고 올라서더니 아래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루시!”
그는 착지하자마자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루시가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오자 그는 곧장 달려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필릭스 선배!”
필릭스는 숨이 막힐 정도로 루시를 꽉 끌어안았다가 다시 놓아주었다. 반가워할 틈도 없이 그가 다급히 말했다.
“지금 바로 대신전으로 가야 해.”
“대신전이요?”
루시가 물었지만 그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고 말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설명은 가면서 해 줄게.”
* * *
필릭스는 대신전에 찾아야 할 중요한 서류가 있다고 했다. 그 서류를 아버지 몰래 찾아야 하기 때문에, 아드리안이 자신인 척하며 대신 방에 갇혀 있게 되었다는 말도.
세차게 내달리는 말 위에서는 말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루시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신전에 도착하자 그들은 간단한 신분 확인을 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베르크 가문의 금고에서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말에 흰 수염이 가득한 노사제는 필릭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대신관께서 직접 새긴 베르크의 인장을 확인해야 합니다.”
필릭스가 준비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사제는 다른 말없이 그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잠시 뒤, 그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이 담긴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생각보다 많은 양에 필릭스조차 당황한 것 같았다.
“검토하고 추려내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어.”
그가 서류들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다른 금고 하나를 빌릴 수 있습니까?”
그가 노사제에게 물었다.
필릭스는 그 서류 상자를 안전하게 다른 금고에 보관한 뒤, 루시와 함께 대신전을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드리안을 저택에서 데리고 나와야지. 부디 내가 갈 때까지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걱정스럽게 중얼거리던 그는 제가 한 말이 웃긴 듯 피식 웃었다.
“하긴, 그건 걱정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 * *
다시 왔던 길을 내달려 그들은 공작가로 돌아왔다. 필릭스는 저택 앞에서 루시에게 말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넌 여기 있어. 내가 들어가서 아드리안을 데리고 나올 테니.”
그가 말에서 내린 뒤 루시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때, 저택의 중앙 문이 갑자기 홱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 그림자의 주인은 어둠 속에 서 있는 필릭스와 루시를 정확히 알아보기라도 한 듯이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필릭스. 루시.”
“……아드리안?”
동생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필릭스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곧 아드리안이 그들을 위해 문을 마저 활짝 열어 주었다.
“어서 들어와.”
그의 태연한 목소리에 필릭스와 루시는 어리둥절한 눈빛을 교환하고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드리안……. 너 괜찮아?”
필릭스가 주변을 경계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드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참 묘한 미소였다. 희미하고 어딘가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론 진정으로 기뻐 보이는.
“필릭스, 당당하게 들어와. 이제 이 저택에서 감히 너에게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무슨 말이야?”
필릭스가 의아하게 물었다.
아드리안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지은 채, 가까이 다가온 필릭스를 와락 껴안았다. 잠시 그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던 아드리안이 다시 그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네가 이 가문의 주인이란 뜻이야.”
그 말에 필릭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전히 아드리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그의 쌍둥이 형제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신 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주치의 말로는 깨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