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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1화 (10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1화

베르크 공작은 흡족한 얼굴로 와인 한 모금을 머금었다.

창밖은 온통 짙은 어둠뿐이었다.

몇 시간 전, 집무실 밖에 서서 그의 부인이 아들에게 예언의 내용을 털어놓는 소리를 들었지만 저지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필릭스의 태도가 묘하게 고분고분해진 터였다. 드디어 후계자로서 마음을 다잡은 건지 가문의 사업을 배우는 일에도 진중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조만간 그에게 예언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 뒤 모든 일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대신전의 금고에 대한 이야기는 공작도 아직 망설이던 참이었다.

그의 장남은 차남과는 달리 언제나 반항적이고 거친 면이 있었다. 늘 고분고분하고 묘하게 의욕이 없어 보이는 둘째보다는 확실히 적합한 후계자감이라 생각해 오긴 했지만. 종종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으로 일을 성가시게 만드는 점은 확실히 고쳐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최근 들어 태도가 달라졌다고는 해도, 필릭스가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었는지 확신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대신전 금고에 대한 얘기는 지금껏 보류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금고에 대해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아내가 그것을 먼저 발설해 버렸다.

화가 났던 것도 잠시, 공작은 차분하게 생각해 보았다.

점점 후계자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있던 아들이 아닌가.

아까의 반발 역시 잠깐의 반항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잠시 혼자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다면, 그의 아들도 결국엔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 앞에 펼쳐질 베르크 공작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큰 영예인지를. 이 훌륭하고 완벽한 가문을 위하여 일하는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이 모든 게 감히 아무나 함부로 꿈꿀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공작이 된 아들은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의 번영을 위해 살아가게 되겠지.

공작은 또 한 번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가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향해 물었다.

“필릭스는 어찌하고 있나.”

“도련님은 얌전히 방에 머물러 계십니다. 방금 전에 다른 하인이 식사를 가져다주면서 확인했습니다.”

“좋아.”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자신의 장남에게 직접 알려 줄 순간이 왔다. 그가 누리게 될 무한한 영광과 그 전에 반드시 치러야 할 의무에 대해서.

* * *

공작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장남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최근 들어 그의 앞에서 고분고분하던 그 눈빛은 다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필릭스.”

공작이 불렀음에도 그는 아버지를 싸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공작은 그런 태도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테이블 앞에 가 앉았다. 그가 맞은편 자리를 턱짓하며 명령했다.

“앉아.”

잠시 말없이 서 있던 필릭스는 천천히 걸어와 그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를 노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예언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입니까?”

“그래, 그것이 이 위대한 베르크가의 예언이자 가언이다. 베르크가 가진 땅의 넓이만큼 가문의 힘이 뻗치고, 베르크가 가진 황금의 높이만큼 가문의 명예가 쌓일 것이다.”

공작은 자랑스럽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보아라, 아들아. 이제 그 예언은 단순히 미래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위대한 베르크 공작들이 예언을 심장에 새기고 가문의 번영을 위해 열심히 힘써 온 덕분이지.”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아들은 전혀 감격스러워하지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여전히 반발심 가득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예언의 마지막 구절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으시겠죠. 단지 그 문장 하나 때문에 아드리안을 무참히 죽이려 했잖습니까.”

“그 애는 이제껏 살아 있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해.”

공작은 입가에 비웃음을 내걸었다.

“너와 얼굴이 그토록 닮은 점만 아니었다면 이미 없애고도 남았을 테니까. 하지만 여러모로 써먹을 데가 있었어. 그래서 지금껏 살려 둔 것뿐이다.”

아들에 대한 애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말투에 눈앞의 필릭스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공작은 속으로 동생에 관한 일이라면 앞뒤 분간을 못 하는 저 나약한 마음을 반드시 뜯어고쳐 주리라 다시 한번 마음먹었다.

“……이제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할 테냐.”

공작이 물었다.

“너는 언제나 그 애가 불쌍하다는 듯 굴어 왔지. 그런데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냐? 그 애는 네 동생이 아니라 네가 가질 모든 것들을 훔치러 온 도둑이나 마찬가지야. 네가 물려받을 땅과 재산, 모든 명예를 그 애가 반으로 갈라 빼앗아 갈 것이다. 그때가 오면 우리 가문의 힘도 반으로 줄어들겠지!”

공작이 언성을 높이는 듯했으나, 다음 순간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악마 같이 속삭였다.

“필릭스, 아드리안을 네 손으로 죽여라. 그래야 네 자리가 굳건할 수 있다.”

그의 훌륭하지만 쓸데없이 마음이 약한 첫째 아들은 좀 더 냉혹하고 잔인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황실과 다른 가문들을 견제하며 대베르크 가문을 이끌어 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말을 듣고도 필릭스는 미동이 없었다.

그에 공작은 협박 같은 말을 덧붙였다.

“만약 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널 포기하고 아드리안을 후계자로 세우는 수밖에 없다.”

포기한다는 건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당연했다. 베르크가의 지붕 아래 두 아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한쪽이 살아 있으면, 나머지 한쪽은 반드시 사라져 주어야만 했다.

그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필릭스가 입을 열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드리안을 죽이려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 애를 후계자로 세우겠다고요? 당신은 정말로 그 애를 장난감 말처럼 여기시는군요. 아드리안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까?”

“없다.”

“전혀?”

“티끌만큼도.”

필릭스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분노로 이글거렸다.

또 반항할 참인가.

공작은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필릭스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빠져나갔다. 그건 여태껏 자신의 아들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무표정한 얼굴. 텅 빈 눈동자. 단호한 입술.

그는 마치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저버린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아버지를 응시하기만 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 모습에 공작마저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의 계획에는 따르지 않겠습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이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의 모든 잘못을 재판에 정식으로 고발하겠습니다. 그리고 난 최선을 다해 증언하겠어.”

결국 또 이 소린가.

공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실망스럽게도 그의 아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그 바보 같은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게냐! 대신전에 보관된 서류가 아니면 나를 재판장의 문턱에조차 세울 수 없다.”

“그 서류들은 반드시 제 손에 들어올 겁니다.”

“어리석은 것! 내가 그리되도록 놔둘 것 같으냐? 아니면 누가 너 대신 그 서류를 가져다주기라도 한다더냐? 그건 너와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빼낼 수 없어. 신관이 찍은 가문의 문장을 확인시켜 주지 않는 이상 그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공작이 흥분한 듯 팔걸이를 쾅 내려쳤다. 그는 분노로 경련이 이는 눈가를 날카롭게 빛내며 필릭스를 쏘아보았다.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나 말이 통하지 않을 줄이야!

그는 필릭스가 언젠가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뜻을 이해해 줄 것이라 기대해 왔다. 그의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행동도 베르크 가문의 후계자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와 변덕이라는 말로 어느 정도는 너그러이 봐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제 아들은 예상보다 더한 고집불통이었다. 감히 아비를 고발해 감옥에 처넣겠다 선언하는 저 꽉 막힌 얼굴은, 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 없는 둘째의 얼굴을 마주할 때만큼이나 기분이 나쁘고 답답하기만 했다.

필릭스 베르크! 이 바보 같은 것! 이 한심한……!

그런데 문득, 공작이 움직임을 멈췄다.

분노로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 불현듯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언뜻 스쳐 지나간 불길한 상상이 설마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툭 불거진 두 눈이 아들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 살피기 시작했다. 눈, 코, 입, 이마, 그리고 다른 모든 생김새까지.

그러나 아무리 쳐다본다고 한들, 공작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뒤이어 그 얼굴 위로 구분할 수 없이 똑같은 얼굴 하나가 겹쳐 떠올랐을 뿐이었다.

마침내 공작이 경련이 이는 입술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를 뱉어 냈다.

“너……! 너…… 설마!”

그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눈앞의 아들을 손가락질했다.

“네가 감히……!”

그러나 그의 아들은 고요하면서도 서늘한 눈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드리안…… 네가 감히……!”

공작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호흡이 가빠져 왔다. 동시에 눈앞이 핑글 돌며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최근 과로로 인해 기력이 많이 떨어진 그는 갑작스럽게 밀려온 충격 때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몸을 휘청이면서도 그의 상상력만은 또렷하게 최악의 상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택을 탈출하는 데 성공해 지금쯤 대신전에 도착했을 장남의 모습, 뒤이어 금고 안에 든 서류를 손에 쥘 모습 등이 눈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하게 아른거렸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소파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런 배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격노한 눈으로 맞은편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아 공작은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의사가 필요했다.

그는 눈앞의 아드리안을 향해 손을 뻗으며 명령했다.

“사, 사람을 불러……!”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마주한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아들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공작은 지금 자신이 명령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드리안…… 당장 사람을 불러…… 제발…….”

그는 이제 아드리안을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점점 눈앞에 드리워지는 듯했다.

아드리안은 그런 아버지를 빤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드리안, 제발 사람을 불러다오…….”

“……아버지.”

마침내 아드리안이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아마 필릭스라면 그랬을 겁니다. 그 애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을 테니까요.”

그의 낮고 음습한 목소리가 안개처럼 공작을 휘감았다.

“그게 설령 당신 같은 쓰레기라고 해도.”

“아드리안……!”

“하지만 난 아니야.”

공작에게는 너무나 절망스런 말이 아드리안의 입에서 선고되었다.

“당신이 지금 이렇게 처참한 꼴로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즐거워. ……어쩌면 나도 당신과 같은 쓰레기인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공작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무것도 아니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들이 자신을 향해 내뱉는 비웃음만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게 한 번쯤은 제대로 구분해 보시지 그러셨어요.”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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