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100화
필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궤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뚜껑을 뒤집어 보기도 하고 궤의 밑바닥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고이 모셔 놨지?
그런 의문을 가진 순간.
“……그건 베르크 가문의 예언이 담겨져 있던 궤야.”
등 뒤에서 유약하고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릭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어느새 나타난 공작 부인이 숄을 바짝 여민 채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필릭스와 열려 있는 금고, 그리고 그 안에 흩어져 있는 서류들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살짝 긴장했을 뿐, 딱히 필릭스의 행동을 비난하려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필릭스는 궤를 들고 살펴보던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서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며칠 전, 교정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려 했던 어머니를 일방적으로 외면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필릭스는 더욱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목을 가다듬은 그가 어머니를 향해 조용히 물음을 던졌다.
“가문의 예언이라니요?”
베르크가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예언이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이 제국이 세워지고 베르크 가문의 역사도 함께 시작되었을 때, 대신전에서 내린 예언이란다.”
공작 부인은 숄을 목까지 더욱 바짝 끌어 올리며 천천히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눈은 연신 문가를 힐끔거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나타날 맹수에게 습격당할 것을 걱정하는 초식 동물처럼.
“저는 처음 듣는 얘기군요.”
“그야 아서는 예언의 존재 자체도 알려지지 않길 바라고 있으니까. 심지어 결혼 직후엔 나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아서와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듣고 알게 되었을 뿐이지.”
“……그 예언이란 건 무슨 내용이죠?”
필릭스의 물음에 공작 부인의 얼굴 위로 짙은 슬픔이 번졌다. 하지만 곧 그녀는 평소의 걱정스러우면서도 무미건조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베르크가 가진 땅의 넓이만큼 가문의 힘이 뻗치고,
베르크가 가진 황금의 높이만큼 가문의 명예가 쌓이고,
베르크가 가진 아들의 수만큼 가문의 유산은 쪼개어지리라.
집무실 안에 가만히 퍼지는 공작 부인의 차분한 목소리는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잔잔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필릭스의 뇌리에 강렬하게 다가와 깊이 박혔다.
땅과 힘…… 황금과 명예…….
……아들의 수만큼 유산이 쪼개어진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쉼 없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갑작스럽게 듣게 된 예언으로 순간 혼란스럽던 필릭스는 예언을 몇 번이나 되뇌고 난 후 깨닫게 되었다.
왜 선대의 베르크 공작들이 하나같이 땅과 재물에 탐욕스러웠는지.
힘을 위해 땅을 정복하고, 명예를 위해 황금을 쌓고.
그 모든 야욕들이 오직 예언이라는 단 세 문장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서는 매일 예언의 내용을 되뇌고 또 되뇌는 것 같았어. 우습게도 잠꼬대로 중얼거린 적도 있었지. 아마 가주로서 가문의 세력을 끝없이 넓히고 싶었던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희망을 주는 말들이었을 거야.”
그러나 필릭스에게 제일 궁금한 것은 바로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공작 부인이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방금 들었다시피 그 예언은 베르크 가문에 큰 근심 또한 안겨 주었어. ‘그들이 가진 아들의 수만큼 유산은 쪼개어지리라’…….”
그녀가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더 읊었다.
“많은 가문들이 여러 명의 아들을 낳아 번성해 가는 동안에도 베르크 가문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어. 가문의 유산이 쪼개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단 한 명의 아들만을 두어야 했기 때문이야.”
필릭스는 대부분이 외동이었던 선대 베르크 공작들을 떠올렸다. 물론 어느 대에는 후계자 외에 다른 아들이 태어났던 예외의 경우도 존재했다. 그러나 필릭스가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후계자 외의 다른 아들들은…….
“태어나자마자 병으로 죽었어.”
공작 부인이 말했다.
“정말 병사였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은 아마 이 가문의 남자들뿐이겠지…….”
그녀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나 역시 아서로부터 단 한 명의 아들만 낳을 것을 종용당했어. 그리고 그가 두려웠던 난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어……. 그런데 내가…… 내가 쌍둥이를 낳을 줄은 정말 몰랐어…….”
줄곧 잠잠한 태도로 이야기를 해 오던 공작 부인은 순간 파르르 떨리는 두 손을 맞잡으며 울먹였다.
그녀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시 눌러 담으려는 듯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물며 간신히 울음을 참아 냈다.
어머니의 말에 필릭스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든 의문의 퍼즐들이 차례차례 맞추어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오만 정이 떨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드리안을 죽이려 했던 거군요.”
가문의 유산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아직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을. 바로 당신 자신의 손으로.
“아버진 미쳤어요.”
그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미쳤어……. 사실인지도 모를 그깟 말장난 때문에 아들을 죽이려 하다니 정말로 미친 거야. 아니, 이 가문 사람들 모두가 미쳤어.”
필릭스는 아득해지는 정신에 머리가 다 아파 왔다. 자신의 가문은 겉만 번지르르할 뿐, 그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썩어 문드러진 상태란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너희가 점점 자라면서 얼굴이 똑같아지고 나서는 그나마 다행이었어.”
공작 부인이 여전히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서가 더 이상 아드리안을 건드리지 않았거든. 당장 그 애를…… 죽이는 것보단 너 대신 데리고 다니며 이용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것 같았어.”
필릭스의 눈이 분노로 번뜩였다. 그 말의 다른 뜻은, 언젠가는 아드리안을 기어코 죽이겠다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아버지를 두고 볼 순 없어요.”
공작을 막아야만 했다.
그의 시선이 금고 안의 서류들로 향했다.
아버지를 고발하자.
그의 모든 잘못을 폭로하고, 재판장에 세우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더 이상 가문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고, 아드리안을 살리는 길이리라.
필릭스는 지체 없이 금고 속으로 손을 뻗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서류를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그러나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작 부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멈춰 세웠다.
“필릭스, 서류를 잘 살펴보렴.”
필릭스는 의아한 눈을 들어 어머니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그녀의 말대로 서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팔랑팔랑.
아무렇게나 그러모았던 서류들이 한 장 한 장 필릭스의 손에서 주의 깊게 넘겨졌다. 그에 따라 필릭스의 미간에도 깊은 주름이 패기 시작했다.
서류는 겉으로 보기엔 여러 사업들의 계약을 작성해 놓은 보통의 문서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가짜야.”
공작 부인이 말했다. 필릭스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하긴,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서류들을 이렇게 허술한 장치 속에 숨겨 두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진짜 계약 서류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신전의 금고.”
그때 어머니가 필릭스에게 말했다.
“아서의 서명이 된 진짜 서류들은 대신전 안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어.”
대신전에는 귀족 가문들을 위한 금고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은 황궁의 금고만큼이나 철저한 보안을 자랑했다. 신의 권능에 의해 보호받는 구역이었으므로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의 침입을 받을 일도 없었다.
“거기엔 오직 신관으로부터 가문의 인장을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지.”
어머니의 말에 필릭스는 가만히 자신의 오른쪽 허벅다리를 떠올렸다. 그곳엔 태어난 직후, 베르크가의 후계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가문의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신전에 있는 베르크가의 금고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공작 외에 오직 필릭스, 그 자신뿐이었다.
그는 당장 흩어진 서류들을 대충 금고 안으로 밀어 넣은 뒤, 금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책장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다.
“지금 당장 대신전으로 가야겠어요.”
그가 자신의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나도…… 나도 갈게.”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결연한 얼굴로 아들에게 말했다.
필릭스는 놀란 얼굴로 어머니를 보았다. 그토록 아드리안을 깊이 걱정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아뇨. 어머니까지 갑자기 사라지면 아버지가 의심할 테니까 여기 남아서 아버지를 감시해 주세요.”
공작 부인은 정말로 필릭스를 따라나서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곧 그의 말에 따르기로 결정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는 한시도 지체하기 싫었다. 그와 어머니는 서둘러 발을 떼었다.
그런데 먼저 집무실을 나서던 어머니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곧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필릭스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하며 큰 한숨을 내뱉었다.
이윽고 우려했던 목소리 하나가 문가에서 들려왔다.
“두 모자가 아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나 보군.”
짙은 그림자가 그와 공작 부인 앞에 드리워졌다. 뒤이어 나타난 날카로운 두 눈이 필릭스를 꿰뚫어 볼 듯 주시했다.
필릭스는 주먹을 꽉 쥐며 어머니의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공작은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띤 채 자신의 아들과 아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야.”
그가 짚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세차게 두드렸다. 뒤이어 무장을 한 수상한 사내들이 집무실 앞으로 몰려왔다.
필릭스는 여차하면 그들과 싸울 준비를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먹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려 했던 잔인한 자였다. 성급히 덤볐다간 곁에 있는 어머니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방으로 데려가라.”
공작이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필릭스는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들에 의해 어머니와 자신이 붙들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