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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9화 (99/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9화

필릭스의 깨달음에 공작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리듬감 있게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전쟁이라는 심각한 화제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로잔 왕국이 베로스 제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완전히 물러날 생각을 했을 리가 없지. 그들은 지난 몇십 년 동안 북부 야만족들의 약탈을 막는 데 정신이 팔려 분쟁 지역에는 신경을 못 쓰고 있었던 것뿐이야.”

다음 순간, 공작이 기분이 좋은 듯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런데 아주 운이 좋게도, 몇 달 전 그 야만인들을 상대로 로잔이 회유책을 쓰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지. 황실보다도 먼저 말이야. 그 뒤에 포섭한 야만족의 기마병들을 앞세워 로잔이 제국의 동부 국경을 침입할 것이란 계획도 알아낼 수 있었고.”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사실을 제국에 알리지 않고 오히려 사업을 벌일 기회로 삼으셨단 말씀이군요.”

필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히 솟구치는 화를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아들의 분노한 얼굴 앞에서도 공작은 그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이미 말했다시피 전쟁은 제국군이 이길 것이다. 그러니 그 피해에 대해선 신경 쓸 것 없어. 로잔 왕국이 그 어떤 전쟁을 일으키든지 간에 서부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할 테니.”

필릭스의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는 분노가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 앞에 혼연히 앉아 있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단지 그들 일가가 있는 수도만 안전하다면, 다른 곳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동쪽 땅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든 말든,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뜻인가.

그의 머릿속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루시의 가족들이 흐릿한 형상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다음엔 콜린의 가족들, 그리고 동부 출신 친구들까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동부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무고한 사람들이 살려 달라 외치는 함성 소리가 아득히 먼 데서 들려오는 듯했다.

정말로 그의 아버지는 그런 것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 이런 사람이 공작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제국의 큰 불운이 아닐까.

아들의 망연해진 얼굴 앞에서 공작은 여전히 느긋한 미소만 흘려 댔다. 그동안 가문의 번영을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질러 온 짓들에 대해 마치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이.

“……아버지가 입을 닫고 있던 결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필릭스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돈이 그렇게나 중요한가요?”

“가문을 지탱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돈과 권력이다.”

공작이 어느새 얼굴에서 미소를 감쪽같이 지운 채 말했다.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선 가문을 더욱 번영시키는 수밖엔 없다. 그동안 우리 베르크의 남자들이 일구어 온 것을 보아라. 황제마저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우리 가문의 유산은 모두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공작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에 필릭스는 소름이 끼쳤다.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그 유산을 지켜야 하는 까닭이 뭡니까.”

“가족?”

공작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아드리안 말입니다. 아드리안은 이 전쟁 때문에 하루아침에 전쟁터로 끌려가게 생겼어요. 아버지는 그 애가 안타깝지도 않으십니까?”

“안타까워?”

공작이 비웃었다.

“그 애는 가문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여겨야 해. 베르크 가문의 명예를 위해 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쾅!

필릭스는 더는 참지 못하고 식탁을 내리쳤다. 접시와 포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정작 공작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영광이요? 우리 가문에 대체 무슨 영광이 있단 말입니까?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그렇게 불린 재산에 무슨 영광이 있다는 말이죠?”

“그 영광으로 이제껏 편안한 삶을 누려 온 네가 할 말은 아니구나.”

공작의 말에 필릭스는 한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곡을 깊숙이 찔러 오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공작은 그런 그를 한껏 비웃었다.

거봐라.

네 말마따나 우리 가문의 유산이 불명예스러운 것이라면, 넌 왜 아직까지 우리 가문에 붙어 있는 것이냐. 왜 최근엔 그렇게 후계자 수업에 열심이었던 거지?

사실은 너도 알고 있는 거야. 가문의 후광이 아니면 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차마 포기할 수 없었던 거지.

필릭스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테이블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겁게 침체된 분위기를 뚫고 시종들이 음식을 날라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는 부자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빈 접시를 풍성하게 채워 넣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전혀 식욕이 들지 않았다.

잠시 뒤, 필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접시 위에 먹기 좋게 자른 고기를 올리던 시종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필릭스는 개의치 않고 식당을 나와 버렸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그런 그를 전혀 붙잡지 않았다.

* * *

필릭스는 희미한 불이 밝혀 주는 일 층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에는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베르크가를 이끌어 온 공작들의 초상화가 길게 걸려 있었다.

눈부신 금발 아래 시리도록 푸른 눈을 빛내는 그들은 하나같이 위엄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그들의 독선적인 눈빛이 필릭스의 뒤를 쫓아왔다.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 중의 하나답게, 초상화의 행렬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필릭스는 그들의 앞을 걸어가며 심란하고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베르크 공작들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거치며 잘못된 부를 축적해 온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땅들이 자신의 가문 때문에 고통받아 온 것인가.

마침내 길게 이어지던 초상화의 끝에 다다랐을 때 필릭스는 불쑥 나타난 빈 액자를 마주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 공간은 그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자신은 베르크 공작의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 가문의 재산을 불려 나가게 되겠지.

힘없는 사람들을 터전에서 쫓아내고, 빈 땅을 닥치는 대로 정복하면서.

과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

필릭스는 빈 액자를 들여다보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긴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니다. 자신은 도저히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처럼, 평생 탐욕스럽게 살고 싶지만은 않았다.

필릭스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식당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얼마 후, 공작이 식당에서 나와 침실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릭스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발길을 돌려 이 층 복도 끝으로 향했다. 그 끝에 위치한 것은 바로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가는 동안엔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공작 외에 소수의 담당 하녀를 빼고는 집무실엔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작의 집무실엔 오랜만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필릭스는 주인을 닮아 삭막하고 으스스해 보이는 이 공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엔 아버지에게 훈계를 듣기 위해 주로 불려 오던 곳이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곳에만 오면 기분이 불쾌해지곤 했다.

벽난로에서는 자그마한 불꽃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불씨가 사그라들고 있는 집무실은 공작의 분위기만큼이나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집무실을 둘러보는 필릭스의 눈빛만큼은 한 가지 집념으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라는 감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면, 그 감옥을 무너뜨리면 된다.

그는 공작의 모든 부정들을 제국에 고발할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가문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필릭스는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문 때문에 고통받았으므로.

특히 그의 아버지가 전쟁이 일어나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숨겼다는 것을 눈치챈 순간, 더 이상 루시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럴 자격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손으로 바로잡고자 했다. 아버지의 잘못을 자신의 손으로 낱낱이 밝힘으로써.

필릭스는 공작의 책상 서랍과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간 공작의 행적들의 증거가 될 만한 서류들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가 그렇게 허술하게 서류를 보관해 두었을 리 없었다.

집무실 안의 비밀 공간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밀어 보았다.

책상의 툭 튀어나온 조각 부분, 서랍 아래의 으슥한 공간, 카펫 아래의 마룻바닥…….

그리고 마침내, 어느 책장을 밀었을 때, 필릭스는 벽에 난 작은 금고문을 찾을 수 있었다.

우습게도 금고문의 열쇠는 문 앞에 바로 놓여 있었다. 아무도 감히 자신의 책장 뒤를 밀어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공작의 오만 때문이었을까.

필릭스는 그런 궁금증은 얼른 접어 둔 채, 열쇠를 집어 금고를 열었다.

바로 그 안에 그가 찾던 수많은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서두르는 손짓으로 이것저것 들추어 보던 필릭스는 문득 제일 위층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나무 궤 하나를 발견했다.

다른 서류들이 한꺼번에 겹쳐 쌓여 있는 것에 비해, 그 궤만 고이 모셔져 있는 게 무척이나 수상해 보였다.

뚜껑에는 대신전의 상징인 세 개의 빛과 하나의 커다란 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신전에서 받아 온 궤라는 뜻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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