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8화
필릭스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그것을 전한 남자를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공작가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하인이었다.
“무슨 연유로 루시를 초대하신 거지?”
“주인님께서는 후원을 받고 있는 루시 키넌 양이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혹 불편한 점은 없는지 직접 듣고 싶어 하십니다.”
필릭스는 기가 차서 웃었다. 그의 아버지는 결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인물이 아니었다.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루시 외에 또 누가 초대를 받았나.”
“오늘 만찬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뿐입니다.”
그 대답에 필릭스는 입술을 물었다.
공작은 이제 짐작을 넘어서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과 그녀 사이의 관계를. 그에게 있어 루시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그리고 그녀를 잘 이용하면 손쉽게 필릭스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으리란 것도.
대체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그동안 몰래 사람이라도 붙여 놓았던 걸까.
공작의 지독한 성격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더는 공작에게 루시와의 관계를 숨길 수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저녁에 마차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루시가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공작이 보낸 남자는 제멋대로 일정을 전했다.
“공작저로 갈 준비가 되면…….”
“가지 않을 거라고 전해.”
필릭스가 날 선 목소리로 남자의 말을 끊었다.
“……송구합니다만, 도련님. 주인님께서는 루시 키넌 양에게 직접 답을 받아 오라 명하셨…….”
“가지 않을 거라고 전해.”
남자의 말을 거듭 자르며 필릭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 만찬에는 루시 대신 내가 갈 거야. 그러니 아버지께 그렇게 전해.”
“알겠습니다, 도련님.”
필릭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애초에 루시의 참석 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필릭스의 대답을 받아 낸 그는 꾸물거리지 않고 도서관을 떠났다.
“……공작님이 왜 갑자기 절 초대하신 건가요?”
등 뒤에서 루시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공작님도 다 알게 되신 건 아닐까요? ……선배와 제 사이 말이에요.”
“아버지는 종종 후원하고 있는 사람들을 저택으로 초대하기도 해. 다른 이유는 없어.”
필릭스가 루시를 돌아보며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녀가 아버지 때문에 걱정하거나 불안해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루시는 필릭스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왜 제가 공작가에 가는 걸 막으려 하시는 건데요?”
“그건…….”
필릭스는 말문이 막혔다. 계속 거짓말로 둘러대기에는 그녀 역시 사정을 대강 짐작하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공작님도 다 알고 계신 거죠? 그래서 선배가 곤란한 입장이 되신 거고요.”
쉽사리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는 필릭스를 보며 루시는 확신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굴 만나는 게 처음이어서 아버지는 그저 궁금해하시는 것뿐이야.”
필릭스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기는 표정으로 말하려고 애썼다. 루시는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필릭스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가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뭘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걱정거리만 늘어날 뿐.
필릭스는 괜히 루시에게 미안해졌다. 자신이 평범한 아버지를 두었다면, 아니, 적어도 베르크 공작처럼 끔찍한 인간을 아버지로 둔 게 아니었더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그렇게 축 처져 있지 마.”
필릭스가 루시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어.”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면, 정면으로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루시는 여전히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지만, 결연한 필릭스의 얼굴을 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필릭스는 좀처럼 근심을 떨치지 못하는 루시를 안심시켜 준 뒤 발길을 돌려 도서관을 나왔다.
“어떻게 해결할 건데?”
그때,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 하나가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 돌아보자, 출입문 옆에 아드리안이 서 있었다.
“루시와의 관계는…… 좀 더 신중했었어야지, 필릭스.”
루시와의 대화를 모두 들은 듯한 그는 형을 나무라듯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끼는 후배가 괜한 일에 말려들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무엇을 우려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필릭스는 할 말이 없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는 아드리안의 말에도 틀린 것이 없었기에.
“……루시에겐 별일 없도록 내가 신경 쓸 거니까…….”
“루시도 루시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필릭스.”
아드리안의 말에 필릭스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아드리안의 얼굴에는 필릭스를 향한 안타까움이 떠올라 있었다.
“최근 들어 아버지 말은 줄곧 듣지 않던 네가 사업을 배운다고 하질 않나, 부르는 대로 즉각 달려가질 않나……. 네가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혹시 루시와 나 때문이야? 권력을 얻게 되면 우릴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드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머뭇거리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다며.”
필릭스는 아드리안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금으로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버지를 화나게 하지 말자고, 일단은 그의 말에 따르자며 항상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 바로 아드리안 그 자신이었다.
“너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상황은 피해 왔잖아, 아드리안. 이제 와서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네가 원했던 게 이런 거 아니야?”
필릭스의 물음에 이번에는 아드리안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망설이던 그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래, 난 언제나 네가 제대로 된 후계자의 모습으로 살아 주길 바랐어. 나도 네 대역하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게 싫었으니까.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아닌 온전한 나로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나한텐 그런 자유가 결코 생기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거든.”
아드리안이 음울한 눈을 들어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막상 네가 변하니까 겁이 나. 네가 온전히 네 몫을 다 하게 되면…… 그럼 네 대역이었던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아드리안의 말에 필릭스는 바로 옆에서 폭발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멍멍해졌다.
그의 동생은 아직도 자신의 목을 조르는 아버지의 손길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대체품으로도 쓰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드리안, 날 믿어. 아버지가 너에게 손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도록 할 거야.”
필릭스의 말에 아드리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믿는다는 뜻일까, 믿지 않는다는 뜻일까.
아드리안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 * *
저녁 무렵, 필릭스는 공작가로 향했다. 아드리안과의 대화로 마음이 복잡해진 채였다.
공작은 저택에 루시가 아닌 필릭스가 나타나도 그다지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식탁 앞에 석상처럼 앉아 필릭스가 들어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루시를 보고 싶어 하셨다고요.”
필릭스는 인사도 없이 대뜸 말했다. 공작은 그런 불손한 태도에도 언짢은 기색 없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나는 키넌 양의 후원자니까. 생활하는 데 부족한 것은 없는지 신경 쓰는 것이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공작은 뻔뻔한 얼굴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필릭스는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와 소모적인 대화를 나누는 데는 조금의 시간도 쓰고 싶지 않았다.
“긴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가요. 루시를 핑계로 저를 불러낸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가 참을성 없는 태도로 말했다.
“우선 앉아라.”
공작이 여유를 부리며 자리를 권했다.
“그래, 네가 워낙 조급해 보이니 곧장 본론을 말하지.”
필릭스가 자리에 앉자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는 대로 황제는 동부 국경에 성벽을 쌓으려 할 거다.”
뜬금없는 말에 필릭스는 눈을 날카롭게 떴다.
고작 며칠 전 전쟁이 발발하여 제국민들 사이에서도 한참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벌써부터 전쟁이 끝난 후를 들먹이는 아버지의 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필릭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작이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동안 로잔 왕국은 제국과 야만족의 사이를 막아 주던 성벽이나 마찬가지였지. 그러나 이젠 로잔에서 야만족을 포섭해 제국의 동부 국경을 침략했으니 그 성벽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 전쟁이 끝나면 야만족을 막을 새로운 성벽이 필요하게 될 테지.”
공작은 높낮이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석재가 필요할 것이다. 네가 황실보다 먼저 이카르로 가서 석산들을 독점하도록 해라.”
“…….”
필릭스는 할 말을 잃고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나라는 전쟁 중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아드리안은 며칠 내로 그 전쟁터를 향해 떠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머릿속에 돈을 불릴 생각밖에 없다니.
이 사람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건가.
“아직 제국군이 다 출정하기도 전인데, 아버지는 벌써 전쟁이 끝난 것처럼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필릭스가 비꼬았다. 그러나 공작은 단호한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제국군이 이길 거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의심도 서려 있지 않았다.
“로잔의 전력은 애초에 제국군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아. 한 가지 성가신 부분이라면 로잔이 포섭한 야만족의 기마병들인데, 그들 역시 말 위에 있을 때는 제법 위협적이지만 단지 그뿐이지. 말에서 떨어트린다면 전투력 자체는 별 볼 것이 없어.”
공작은 마치 남의 나라 전쟁을 이야기하듯 무감한 얼굴로 설명했다.
“로잔이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도 동부의 일부 땅만이라도 계속 분쟁 지역으로 남겨 두고 싶어 그런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어. 그러니 우리는 전쟁의 과정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올 기회들을 잡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
공작은 설명을 끝낸 후, 필릭스의 대답을 기다리듯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을 겁니다. 지금쯤 황실에서도 벌써 이카르의 석재를 사들이려고 시도했겠죠.”
“이카르 왕실에서는 베르크가 외에는 협상을 하려 들지 않을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미 몇 달 전에 베르크 가에서 그 석산들에 대한 우선 협상 권리를 받아 냈단 뜻이다.”
“몇 달 전이요?”
필릭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석재가 필요하게 될 줄 어떻게 알고 움직이신 거죠?”
물음을 던지는 순간 필릭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버지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전쟁이 날 것을 미리 알고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