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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7화 (97/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7화

퍼더덕!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무에서 갑자기 날아오른 새의 날갯짓 소리에 필릭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커다란 덩치를 한껏 숙여 자신보다 한참 작은 루시의 어깨에 오랫동안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긴 몰라도 남들의 눈에는 참 볼썽사나운 꼴이었을 것이다.

날이 어두워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다 울었어요?”

“……안 울었는데.”

필릭스는 부디 루시의 눈에도 자신의 축축이 젖은 얼굴이 잘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가 아무것도 묻지 않으며 너무나 티 나게 못 본 척해 주려는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필릭스는 더욱더 민망해졌다. 뒤늦게 몰려온 창피함으로 얼굴은 붉게 물들어 갔다.

“이 밤에 왜 혼자 교정을 돌아다니고 있었어?”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필릭스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그냥 답답해서요.”

브롬에서 루시의 가족들로부터 서신을 받은 지 근 삼 일이 지났다. 그 뒤론 단 한 통의 소식도 도착하지 않았다.

물론 난리 통 속에 있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소식을 전달받길 바라는 것도 무리한 기대였지만.

소식을 즉각 받을 길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루시를 대신해 필릭스는 아예 사람 하나를 브롬으로 보냈다. 얼마나 속히 루시네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고 돌아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그 와중에 이미 전투 중인 기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제국 기사단의 일부가 동쪽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온 수도에 전해졌다.

전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그 소식만으로도 사람들은 안심한 듯 숨을 돌렸다.

“……이제 들어가야 해요.”

루시가 적막이 흐르는 교정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간간이 근처를 지나가던 학생들의 희끄무레한 그림자도 이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통금 시간이 지나면 플로라 사감님은 절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거든요.”

그건 남자 기숙사 사감인 로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들은 기숙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몇 발자국 떼지 않았을 때, 루시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참, 내일 날이 밝으면 콜린 좀 확인해 주세요. 방에 틀어박혀 있느라 얼굴도 못 봤거든요.”

“그래, 알겠어. 내일 아침에 가 볼게. 아마 별일 없을 거야.”

“그럼 다행이지만…….”

안 그래도 콜린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그는 근 이틀 동안 기숙사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언제나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면서 주변을 시끄럽게 만들던 말썽꾸러기였으므로, 지금처럼 조용한 상태가 몹시 걱정되기는 했다.

“콜린은 내가 알아볼 테니까, 넌 네 몸이나 잘 챙겨.”

“고마워요.”

부끄럽지만 루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쏟아 낸 덕분인지, 필릭스는 한결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는 루시를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준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드리안을 마주하면 무슨 얘길 해야 할까.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했지만,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는 아드리안의 어렴풋한 형체가 보였다.

그가 들어오는 기척에도 상대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아드리안과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진짜 잠들어서가 아니라,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 * *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필릭스가 마주한 것은 텅 빈 아드리안의 침대뿐이었다. 아마 꼭두새벽부터 방을 나선 것 같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아드리안의 옷장을 열어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도 그가 꾸려 놓은 짐 가방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필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아드리안 대신 다른 엉뚱한 사람이 짐 가방을 든 채로 소란 피우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전날 루시와의 약속대로 콜린의 상태를 확인하러 그의 방으로 갔을 때, 콜린 코너가 자기 몸집만 한 커다란 가방을 든 채 악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룸메이트로 보이는 남학생이 황당한 얼굴로 콜린의 가방을 붙잡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네가 가서 뭘 어쩌겠다고 그래!”

“이거 놔!”

필릭스는 그 모습을 기막힌 얼굴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뭐 해?”

“브롬으로 돌아가려고요!”

문가의 필릭스를 발견한 콜린이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아버지를 전쟁터에 보낼 순 없어요!”

그러니까 콜린은 지금 코너 남작가를 대표해 자신이 직접 싸우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필릭스는 기가 차서 허, 하며 바람 빠진 소리로 웃었다. 콜린이야말로 싸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너 검 휘두를 줄은 알아?”

“아버지보단 제가 나을걸요!”

필릭스는 코너 남작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체격의 콜린보다는 나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돌려주세요!”

콜린이 펄쩍 뛰며 그에게서 다시 가방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옆에 서 있던 콜린의 룸메이트에게 가방을 넘겨 버리곤 콜린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콜린, 코너 남작가에 자식이라곤 너 하나뿐이잖아.”

남작이 사는 동안 아들을 하나 더 낳지 않는 이상, 콜린은 코너 남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 사실을 일깨워 주자 콜린이 울상이 되어 필릭스의 손을 뿌리치려던 동작을 멈추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렇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가족들은 아무런 소식도 없고……!”

“네가 기사단에 들어간다고 해서 당장 고향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건 아니야.”

필릭스는 에둘러 말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싸울 수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콜린의 체격은 웬만한 여학생보다도 작은 수준이었다. 사실 그에게 맞는 갑옷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그가 검을 들고 싸우겠다고 하면 아마 사람들에게 비웃음이나 살지도 모른다.

필릭스의 신랄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콜린은 좌절한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애초에 남작님이 허락이나 하시겠어?”

그는 콜린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아드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절대 아니야. 차라리 자신이 대신 나가고 싶은 심정일 거라고.

필릭스의 말에 콜린은 약간의 정신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알겠어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무슨 다른 방법?”

찝찝한 대답에 필릭스가 이마를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나 콜린은 대답 없이 짐을 싸느라 어질러 놓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뭉스러운 표정의 콜린을 뒤로한 채, 필릭스는 아드리안을 찾아 도서관으로 갔다. 어제 들었던 이야기 때문에라도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을 것 같았다.

도서관은 한산했다. 더 이상 테이블을 빽빽하게 채우고 앉아 여유롭게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동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전쟁터에 내보낼 아들이 없는 집안의 학생들, 그리고 외국인 유학생들만이 유유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반납대에는 사서 에린 부인이 혼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도서부원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서관을 그냥 떠나려던 필릭스는 책장 뒤로 삐죽 튀어나온 연갈색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루시가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루시?”

갑작스레 들린 필릭스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 에린 부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부인은 벌써 와 있어.”

“아아.”

루시는 그제야 반납대에 앉아 있는 에린 부인을 돌아보았다.

“딴생각을 하느라 오신 줄도 몰랐네요.”

두 팔로 감싸고 있던 무릎을 쭉 펴던 루시가 번뜩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참, 콜린은요?”

“……방에 얌전히 있어.”

루시가 걱정할까 봐 좀 전에 그가 벌인 소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저보다 더 상심이 크겠죠. 콜린은 브롬을 이어받을 차기 영주니까요.”

상심이 크다 못해 무모한 짓까지 벌이려고 하더라.

필릭스는 그 말을 꿀꺽 삼키며 루시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섣부른 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타일러 놨으니까.”

그때 한 남자가 도서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곧장 사서에게로 다가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도서관을 둘러보던 에린 부인이 루시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 남자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필릭스가 그 앞을 막아섰으나, 다가온 남자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품에서 꺼낸 것을 루시에게 내밀었다.

“루시 키넌 양에게 온 서한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루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토록 기다리던 브롬에서 온 답장인 걸까.

하지만 필릭스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벌써?

아무리 전령을 보냈다곤 하지만, 답장이 오기에는 너무나 이른 시기였다.

루시가 얼른 남자에게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조급한 손길로 봉투를 찢은 뒤, 한 번 접힌 편지를 재빨리 펼쳐 들었다. 그런데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루시의 얼굴이 이상하게 굳어 갔다.

필릭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고향으로부터 안 좋은 소식이라도 전해진 걸까.

잠시 후 루시가 고개를 서서히 들더니 필릭스를 초조한 눈길로 응시했다. 그녀가 천천히 편지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편지에는 딱 세 줄의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익숙한 글씨체이기도 했다.

“선배…….”

루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편지의 내용을 읽은 필릭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루시 키넌 양에게.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당신을 저택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아서 베르크 공작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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