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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6화 (96/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6화

“……뭐?”

아드리안의 어깨를 잡고 있던 필릭스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는 하루아침에 전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필릭스는 한참 후에야 멍한 질문을 던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아드리안은 음울한 눈으로 형을 보며 설명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나란 인간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눈빛.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아무리 어렸어도 다 느낄 수 있었다고.”

필릭스는 아드리안의 말을 들으며 아스라한 어릴 적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아드리안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건 필릭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엄격하고 조금도 웃지 않는 아버지 앞에만 서면 몸이 얼음처럼 얼어붙곤 했다. 단 한 마디의 따뜻한 말조차 해 주지 않는 냉정한 아버지 앞에서 그 역시 지독한 두려움과 긴장감만을 느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아드리안.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심지어 자기 아내에게도 모질게 구는 몹쓸 인간이라고.”

필릭스의 말에 아드리안의 푸른 눈이 얼어붙은 겨울 호수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나직하게 내뱉었다.

“우리가 여섯 살 때, 그 사람이 내 목을 조른 적이 있어.”

“……뭐?”

동생의 말은 또 한 번 충격적이어서 필릭스는 멍한 얼굴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술에 취해 있지도,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었어. 멀쩡한 정신 상태로,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그저 내 목을 졸랐어. 그게 응당 그 순간에 해야 하는 일이라는 듯이.

아득하게 다가온 그의 목소리는 필릭스의 머릿속을 한번 헤집은 후, 멀리 날아가 흩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기분에 필릭스는 망연한 얼굴로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달려와 아버지를 말렸어.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애원했어. 제발 날 살려 달라고. 제발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아드리안이 그때를 회상하듯 어두운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똑같은 두 개의 푸른 눈이 서로를 응시했다. 다만 한쪽은 충격에 휩싸여 있었고, 다른 한쪽은 죽은 듯이 가라앉아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어. 어머니가 당신의 자식이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고. 그때 어머니는 방법을 바꿔 다른 말로 설득하기 시작했지. 우리의 얼굴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지고 있으니, 날 어딘가에는 써먹을 수 있을 거라는 말로 말이야. 그 사람은 그제야 내 목 조르는 걸 멈추더라. 어머니가 날 살리기 위해 할 수 있었던 말은 고작 그런 말뿐이었어. 당신의 아들이잖아요, 같은 그 사람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 아니라.”

아드리안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어. 어머니의 말처럼 내가 써먹을 데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아버진 그 뒤론 날 죽이려 하지 않았어. 대신 나를 너의 대체품 정도로 이용하기 시작했지.”

아드리안이 이야기를 멈추자 방 안에는 참담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대체 왜…….”

대체 왜 아버지는 아드리안을 죽이려 했단 말인가.

자신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아드리안과 그는 한날에 태어난 쌍둥이였다. 어느 한쪽만 죽이려 할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대체 왜 너를…….”

필릭스의 허망한 중얼거림에 아드리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몰라, 필릭스.”

그의 입에서 자포자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모르듯이 나도 몰라. 왜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 했는지.”

이 엄청난 사실을 듣고 나서야 필릭스는 깨달았다. 어머니가 왜 그동안 강박적이다시피 아드리안을 보호하려 들었는지.

왜 어머니에게는 항상 아드리안이 우선이었는지.

“그때부터 어머니는 날 과보호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어머니는 자신이 모르는 틈에 아버지가 날 또 죽이려 할까 봐 언제나 두려움에 떠셨어.”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힘겹게 말을 끝마친 아드리안이 침대 위로 털썩 무너졌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날 더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마. 사실이 아니니까.”

그 말에 더 무어라 대꾸할 수 있을까.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놓은 동생 앞에서 필릭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필릭스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이제는 겨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교정을 따라 어둠 속을 천천히 걸었다.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잠잠하고 고요했지만, 그가 던진 말들은 필릭스의 마음속에 격랑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대체 왜 아드리안을 죽이려 했던 것일까.

그가 가문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미친 것처럼 군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식까지 해치려 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걷지 않아 그는 가까운 화단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사람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휘청거리며 방을 나갔던 어머니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여전히 아카데미에 남아 있었다.

파리한 안색의 그녀도 곧 필릭스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난 아드리안이 아니에요.

그렇게 알려 주려고 했지만 어머니가 먼저 그를 불렀다.

“필릭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을 달싹였다. 필릭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어렸던 시절의 아드리안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느꼈을 두려움은 필릭스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아팠을지,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는 아마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들을 보며 가슴이 찢어졌을 어머니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의 손에 죽을지도 모르는 아들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야만 하는 어머니의 삶도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필릭스는 입술을 꾹 물며 생각했다.

상처를 받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어렸고, 어머니의 무관심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미성숙한 어린 애일 뿐이었다.

아무리 어머니에게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가 자신을 버리다시피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필릭스는 실망스럽고 울적한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받을 작위와 재산으로 내 아픔이 모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공작부인이 마침내 발을 떼었다. 그녀는 시녀의 손도 뿌리치고 필릭스에게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필릭스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그는 어머니를 그대로 지나쳐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교정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공작 부인은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뒤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필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괴롭고 착잡한 심정으로 길을 걸었다.

하나뿐인 동생에게 그런 가혹한 일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

아들을 보호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조금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느끼는 실망감.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외롭고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에서는 단 하나의 얼굴만 떠올랐다. 지금 보고 싶은 사람은 딱 한사람뿐이었다.

네가 마법처럼 내 앞에 나타나 준다면 이 순간이 덜 외로울지도 모르겠어.

그때, 어둠이 내려앉은 맞은편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믿을 수 없게도 루시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마르고 핼쑥해진 그녀는 터덜터덜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필릭스를 발견하고는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며칠 새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다.

“루시.”

그가 놀란 얼굴로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역시 동그래진 눈으로 필릭스를 바라보던 루시가 다시 발을 떼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힘없이 미소를 띤 채 걸어오던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필릭스 선배.”

그녀가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왜 울어요?”

루시의 말에 필릭스는 그제야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손가락 끝에 축축한 것이 묻어났다.

필릭스는 말없이 그녀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루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를 토닥여 주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지금 제일 힘든 사람은 고향에서 전쟁이 벌어진 그녀일 것이다. 위로는 못 해 줄망정 도리어 질질 짜는 꼴을 보이고 말다니.

그러나 필릭스는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그녀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무슨 일 있어요?”

“……어머니가 너무 원망스러워.”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말을 꺼냈다.

“그런데 또 너무 불쌍해.”

루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말없이 필릭스를 토닥여 주었다.

눈물을 보이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여겨 그는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오래도록 루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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