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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5화 (95/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5화

필릭스는 편지를 구겨 구석으로 던져 버렸다. 설마 했지만 생각보다 냉정한 아버지의 결단을 마주하니 더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정말 아버지에겐 아드리안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없단 말인가.

아니, 우리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에게 있어 자식들이란 정말로 가문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되는 말들일 뿐이란 말인가.

아드리안은 싸울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검을 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기사로서의 삶 또한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더 잘 발휘하게 해 줄 아카데미였다.

필릭스는 입술을 짓씹었다.

루시와 아드리안.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주먹을 꽉 쥐는 것뿐이라니. 입술을 깨무는 것뿐이라니.

이렇게 가만히 서서 상황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나 분하기만 했다.

무력감이 찾아왔다. 베르크 공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뭘 하나. 자신은 주변인을 지켜 낼 힘도 없는데.

만약 그렇다면…….

어쩌면 루시의 고향을 위하여, 그리고 아드리안을 위하여 자신이 대신 전쟁에…….

“허튼 생각 하지 마.”

그의 귓가로 단호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필릭스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방으로 돌아온 아드리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늘한 표정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넌 남아서 가문을 이어야 해. 이 의무를 다해야 하는 건 바로 나야.”

마치 필릭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드리안이 꿋꿋하게 말했다.

의연한 동생의 얼굴을 보는 필릭스의 마음에 반발심이 솟아올랐다.

“꼭 아버지 같은 말을 하네, 아드리안. 넌 누군가와 검으로 싸우는 걸 좋아하지도 않잖아.”

“이게 그렇게 따질 문제야? 검 휘두르는 걸 좋아해서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없어.”

아드리안이 냉정하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필릭스는 어떻게든 그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넌 전쟁을 버틸 만한 사람이 아냐.”

“그럼, 넌? 넌 전쟁터에 무슨 운명이라도 두고 있어? 네가 나 대신 가겠다는 말이야? 아버지가 그걸 용납하실 것 같아?”

아니, 불가능하다.

필릭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결코 자신의 아들들이 제멋대로 역할을 바꾸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는 일은 없을 거야.”

아드리안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커다란 가방을 꺼내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아카데미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조로웠다.

“처음엔 종자로 들어가 몇 달간 기사들의 잡일이나 떠맡겠지.”

실전 경험도 없는 사람을 곧바로 전쟁에 투입시키지는 않았다. 아드리안의 말대로 처음 기사단에 들어간 신입은 얼마간 정식 기사들의 시중을 들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식사를 담당하고 물자를 옮기는 등, 전쟁터 배후의 일들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걱정 마. 아무도 나를 당장 최전선으로 떠밀지는 않을 테니까.”

아드리안은 꺼낸 가방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필릭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그는 아드리안을 그대로 떠나가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가 동생을 구제할 생각이 없다면 자신이라도 나서야 했다. 아드리안을 대신할 사람을 직접 구해서라도 그의 참전을 막을 생각이었다.

창밖으로 저녁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친구의 방을 찾아가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 왔다. 매우 조급하고 성마른 노크 소리였다.

필릭스가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뜻밖의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입학식 때도 아카데미에 오지 않았던 그녀. 바로 창백한 낯빛, 가느다란 체구의 베르크 공작 부인이었다.

“어머니.”

필릭스의 놀란 음성이 복도에 낮게 내려앉았다. 공작 부인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부른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무언가를 확인하듯 필릭스의 얼굴을 한 차례 훑었다.

곧 그녀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아들이 아드리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의 어깨너머로 방 안을 넘어다보았다.

필릭스는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문가에서 비켜섰다.

아드리안은 침대에 앉아서 옷을 가방 안으로 던져 넣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갑자기 찾아온 어머니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 여기까지 어쩐…….”

아드리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공작 부인은 곧장 그에게 달려가 손목을 거머쥐었다.

그 연약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부인은 단숨에 아드리안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아드리안……! 당장 여길 떠나야 한다!”

공작 부인이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그녀의 말은 중얼거림 같기도 했고, 혹은 허공을 보며 외치는 애원 같기도 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아드리안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진정시키려 했다.

“도망가야 해……! 아드리안, 얼른 도망가야 해…… 이 어미 말을 들으렴…….”

공작 부인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문가에 선 필릭스는 충격을 받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이제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아들과, 그 아들을 구하기 위해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달려온 어머니.

필릭스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가 공작 부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 뒤 아드리안에게서 어머니를 떼어 내며 말했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무작정 어디로 데려간단 말씀이세요?”

“아드리안을 데려가야 해……!”

“대체 어디로요? 외국으로 빼돌릴 게 아니라면, 지금 아드리안이 숨을 곳은 없어요!”

“아드리안을 데려가야 해……!”

“제발 그만 하세요!”

필릭스가 어머니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짝, 소리와 함께 필릭스의 뺨에 날카로운 감촉이 스쳐 지나갔다. 공작 부인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것도 멈춘 채 조용히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아들의 뺨을 때린 제 행동에 스스로도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움찔거리며 필릭스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나, 나는……그러려던 게 아니야, 필릭스…….”

“됐어요. 돌아가세요.”

필릭스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지금 어머니의 행동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그의 냉정한 말에 공작 부인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입술이 달달 떨렸다. 무언가 쉼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필릭스의 귀에까지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정신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시선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온몸을 떨었다.

“어머니.”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공작 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는 그토록 아끼는 아들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뒤이어 공작 부인이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휘청거렸다. 겨우 벽을 짚고 선 그녀가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널 그런 곳에 보낼 수는 없어…….”

그녀는 결국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드리안이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버지 몰래 오신 거죠?”

그의 물음에 어머니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일이 더욱 복잡해질 뿐이에요. 그만 돌아가세요.”

아드리안의 말에 어머니는 절망적인 눈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 정적이 하염없이 흘렀다.

한참 후, 창백한 안색의 공작 부인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미친 사람처럼 아드리안을 끌고 가려 했던 기세가 수그러진 채, 그녀는 넋이 나간 얼굴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방 밖으로 나가니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던 베르크가의 시녀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공작 부인이 문 앞에서 사라지기 전 아드리안을 향해 축축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아드리안은 그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어머니가 돌아간 방 안에는 기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필릭스는 뺨을 쓸어내리며 알 수 없는 허탈함에 휩싸였다. 어머니에게 맞은 뺨이 화끈거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시 한번 깨달은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여전히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은 아드리안뿐이다. 자신은 그 경계 속에 발 한 짝조차 들여놓을 수 없었다.

사실 어머니는 아드리안 대신 자신이 전쟁터로 나가기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머니에게 ‘돌아가라’는 말 대신, ‘자신이 대신 전쟁터로 갈 것’이라 말했다면.

그랬다면, 자신의 뺨을 때리는 대신 처음으로 꽉 안아 주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숨겨 줄게.”

“뭐?”

어머니와 아드리안을 동시에 숨기면 될 일 아닌가. 저 하나 희생하면 모든 게 끝날 일이다.

“어머니와 함께 외국으로 떠나.”

제국에 다시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전쟁터로 나가거나 끔찍한 아버지의 곁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필릭스의 말에 아드리안이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그게 실행 가능한 계획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어머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셔.”

그의 말이 맞았다. 그들의 어머니는 두 아들 중 아드리안의 일이라면 앞뒤 분간 없이 달려드는 경향이 있었다.

“아드리안, 어머니는 널 사랑해.”

“어머니는 너 또한 사랑해.”

“말은 똑바로 해야지. 어머니는 너만을 사랑하시는 거야.”

필릭스는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참아 왔던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정말로 어머니의 사랑을 바라지 않으리라 다짐했기에 말할 수 있었다.

“아냐!”

줄곧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던 아드리안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런 게 아냐!”

하지만 한번 터진 필릭스의 감정은 이미 막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 그럴 때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동안 어머니께 받지 못한 관심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날 사랑하지 않아. 어머니가 사랑하는 건, 아드리안, 너뿐이야.”

“그렇지 않아! 넌 아무것도 몰라, 필릭스.”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

그때 어떤 상황에서도 무서울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하던 아드리안이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금세 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되었고, 잇새로는 연신 거친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드리안…… 너 괜찮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그의 상태에 필릭스가 천천히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넌 몰라, 필릭스.”

그가 형의 손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 했던 적이 있어. 그것도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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