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4화
대략 오십 년 동안 인접한 나라들과 작은 충돌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번의 전쟁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제국이었다. 그런 와중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온 나라는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다.
트라크 족의 약탈을 먼 동부 지방에서 일어난 단순한 갈등으로만 치부했던 수도 사람들도 그제야 점차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아카데미 학생들을 더욱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온 제국에 내려진 징집령이었다. 모든 귀족 가문을 대상으로 내려진 황제의 명령에 아카데미는 일순 혼돈에 휩싸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모든 가문에서는 한 명의 성인 남자를 전쟁터로 보내야 했다. 이를 어길 시 국법에 따라 엄하게 처벌되었다.
대부분의 장남들은 후계자로서 가문을 이어야 했으므로, 전쟁터로 보내지는 것은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었다.
벽에 붙은 징집령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필릭스는 곧장 발길을 돌려 복도를 뛰어갔다.
그가 마침내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 맞은편에서 나타났다. 그 사람도 필릭스를 보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아드리안.”
필릭스의 입에서는 생각보다 침착하지 못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걱정과 두려움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그 밖의 온갖 것들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정작 차분한 것은 상대방이었다.
고작 한 달 전 생일이 지나 성인이 된 베르크가의 차남은 형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놀라움과 혼란이 뒤섞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학생들 틈에서도 그는 평소와 같은 단정한 모습을 유지한 채 올곧이 서 있었다.
그의 텅 빈 눈동자에는 어떠한 억울함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 * *
전쟁은 하루아침에 아카데미를 거대한 풍파 속으로 몰아넣었다.
3학년 남학생의 절반은 징집의 대상이 되는 둘째나 셋째 아들들이었다. 게다가 이미 열아홉 번째 생일이 지나 성인이 된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들은 아버지나 형 대신 제국 기사단에 입단하여 지정된 날짜 안에 동부로 떠나야만 했다.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들의 얼굴에 남은 것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뿐이었다.
그날 밤, 필릭스는 기숙사 방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카데미를 한차례 휩쓸고 간 폭풍 덕에 기숙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정적이었다.
이어 필릭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옆 침대였다. 아드리안은 평소처럼 교복을 벗어 깔끔하게 정리한 뒤 단정한 모습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내일의 일정을 미리 확인하듯 일정표를 무심한 표정으로 훑어 내려갔다. 얼굴엔 소름 끼친다 싶을 정도로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당장 징집될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제는 다음 날의 일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떠한 동요도 없이 내일을 준비하는 저 사람은 정말 자신이 아는 아드리안이 맞는 걸까.
그가 담담하면 담담할수록 필릭스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할 말 있으면 해.”
아드리안이 여전히 일정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너무나 평온한 말투였다.
“…….”
필릭스가 대답이 없자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는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그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을 믿지 않았다.
어느 누가 전쟁터로 떠나게 될 상황을 앞두고 태연하게 웃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필릭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다른 대안이 있을 거야.
넌 무사할 거야.
그 어떤 말도 아드리안을 위로할 수 없었다. 필릭스는 적당한 말로 아드리안을 기만하는 대신 입술만 콱 깨물었다.
“……너 대신 보낼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고민 끝에 나온 말은 고작 그것이었다.
황제의 징집령은 오직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가에만 내려진 것이었다.
한때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세와 재력을 이용하여 대신 전쟁터로 보낼 기사를 고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점점 악용되어 대부분의 귀족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힘없는 기사들에게 떠넘기기만 하자 황제는 대체 복무를 금지시켜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야 했다.
물론, 벌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제 아들 대신 몰래 다른 사람을 전쟁터로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들통난다면 중벌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시도했다.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차마 전쟁터로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과연 아버지도 그렇게 해 줄 것인가.
필릭스는 자신의 냉혈한 아버지를 떠올리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아드리안을 자신의 대체품 정도로 여긴다 하더라도 그가 베르크가의 자손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공작은 아드리안을 홀대하며 이용해 왔지만,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 무려 아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말이다.
필릭스는 이번만큼은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기꺼이 전쟁에 대신 나갈 사람을 구해 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공작가의 권력이라면 가능하고도 남았다. 기사단의 상관을 매수하는 것도 그의 아버지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터.
“……나를 대신할 사람?”
그러나 아드리안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회의적이다 못해 노골적인 비웃음까지 섞여 있었다.
“글쎄. 어쩌면 아버지에겐 나를 치워 버릴 아주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지.”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필릭스는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드리안이 저런 식으로 부정적인 말을 내뱉을 때마다 그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도 알잖아, 필릭스. 아버지는 날 위해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필릭스는 그렇게 소리쳐 주고 싶었다.
그러니 벌써 포기하지 말라고, 그런 절망적인 말 따위는 입에 담지 말라고 어깨라도 잡아 흔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말은 필릭스의 입 안을 맴돌기만 했다.
그가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자, 아드리안이 ‘거봐’ 하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나는 그런 헛된 희망은 오래전에 내버렸어.”
그는 그렇게 내뱉은 뒤, 필릭스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촛불을 꺼 버렸다.
어둠과 함께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헛된 희망.
어두워진 후에도 아드리안의 목소리는 필릭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침대 속으로 들어가는 아드리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멈춘 후에도, 필릭스는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헛된 희망이 아니야.
그렇게 장담해 주지 못하는 자신을 한없이 자책하며.
* * *
루시는 전쟁 소식이 알려진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하루 종일 수업에도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의 도서부 친구들을 붙잡고 물어보아도 그저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필릭스는 초조해졌다.
그녀가 자신의 고향을, 가족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전쟁 소식을 들은 루시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할지 필릭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여학생 기숙사 건물을 빙 돌아가 루시의 방이 있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벽이라도 타고 올라가 루시가 괜찮은지, 혹시 밤새도록 울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여기서 뭐 해?”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니 로제가 서 있었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여학생 기숙사를 올려다보고 서 있는 필릭스를 향해 의심스런 눈길을 보냈다.
“……루시는 계속 방에서 안 나오고 있어. 내가 아침에 식사를 가져다주면서 확인해 봤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
필릭스가 묻기도 전에 로제는 그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 주었다.
“괴롭겠지. 고향이 그렇게 됐으니. 콜린은 어때?”
“……당장 짐 싸서 고향으로 가겠다는 걸 말렸어.”
“잘했네. 싸움도 제대로 못 하면서 어딜 가겠다는 거야.”
로제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루시는 내가 수시로 상태를 확인하고 있어. 그러니까 넌 여학생 기숙사에 억지로 들어올 생각은 하지 마.”
로제는 평소의 도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필릭스는 그녀가 일부러 의연한 척 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 한구석에서 숨길 수 없는 불안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밀라드 백작은 제국에서도 이름을 떨친 기사였다. 그 역시 제국의 평화를 위해 동부로 떠나게 될 터였다.
“안타까운 얼굴로 보지 마!”
필릭스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읽어 낸 로제가 버럭 성을 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기사의 딸로서 언제나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염두에 두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너한테 그런 동정 어린 눈길 받고 싶지 않아.”
“동정이 아니야.”
필릭스가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나도 믿기지 않아서 그래. 가족을 전쟁터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그 말에 로제가 눈빛을 바꾸며 필릭스를 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아드리안이 성년이 되었고, 징집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로제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희 아버지라면 아드리안을 위해 충분히 사람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사정을 모르는 로제가 던진 말은 필릭스를 또 한 번 씁쓸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만 갈게.”
대답을 회피하며 그는 몸을 돌렸다.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했다.
루시, 아드리안, 전쟁, 징집…….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필릭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아드리안을 전쟁터로 보낼 리가 없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드리안은 아직 ‘쓸모’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의 기대는 단 한 통의 편지로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공작가에서 온 서신이었다.
수신인은 아드리안이었으며, 곧장 기사단에 입단할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드리안 대신 편지를 열어 본 필릭스는 그 활자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한 줌의 희망을 가차 없이 배반하는 그 내용에 온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