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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3화 (93/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3화

야만족의 침입 소식은 곧 온 제국에 알려졌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잠잠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듣고 교정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등, 평온한 일상을 영위해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동부 변경 지방은 수도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제국의 서쪽에 치우쳐 있는 수도 베델에서는 마차를 타고 보름은 달려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수도 사람들에겐 야만족의 침입이니, 약탈이니 하는 소문들은 아마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터였다.

트라크 족이 침입한 일은 몇몇 동부 출신 학생들 사이에서나 회자가 되었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게다가 트라크 족이 또다시 침입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동부의 출중한 기사들이 손쉽게 막아 줄 것이란 믿음 때문인지 이 사안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 이번 경우에도 약탈이 금방 진압되기도 했고.

그런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아직 안심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안색이 늘 좋지 않았으며, 바쁘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평소와 다르게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겠지.

트라크 족이 어떻게 국경 안으로 침입했는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또다시 침략을 시도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에 루시가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루시 외에, 축 처진 어깨로 유령처럼 복도를 떠도는 학생이 또 한 명 있었다.

“콜린 코너,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열린 가방 틈새로 물건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계속 걸어가는 콜린을 잡아 세우며 필릭스가 주의를 주었다.

언제나 활발하고 기운이 넘치던 콜린은 반짝거리는 눈빛을 잃은 채 필릭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건이 다 떨어졌잖아.”

필릭스의 지적에도 콜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네에…….”

다 죽어 가는 목소리를 흘리며 그가 떨어진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필릭스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50년 전에 있었던 전쟁 이야기를 숱하게 듣고 자라서인지 루시와 콜린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며 침체되어 있었다.

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향과 멀리 떨어진 여기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때문에 필릭스는 주말이 되자마자 루시와 콜린을 데리고 함께 외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람이 많은 곳으로 데리고 나가 고향에 대한 생각을 아예 잊게 해 주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루시는 그렇다 치고 콜린의 상태가 예상보다 더 좋지 못했다.

“어딜 보고 걷는 거야? 똑바로 걸어!”

터덜터덜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콜린은 바로 눈앞의 돌부리도 보지 못해 넘어질 뻔했다. 필릭스가 얼른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 일으켜 주었다.

콜린은 그의 손에 볼썽사납게 매달린 채로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그가 또 다 죽어 가는 소리를 냈다.

필릭스는 콜린이 스스로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굴 때마다 늘 성가시다고 생각하며, 제발 그가 잠시라도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막상 콜린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좀비처럼 흐느적거리기만 하자, 그 바람은 싹 달아나 버렸다. 과하게 기운이 넘치는 콜린 코너보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근심과 걱정에 빠져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콜린 코너였다.

얜 무슨 상태가 이렇게 극단적이야?

필릭스가 아무리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으려 해도 콜린의 기분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우아하면서도 오만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애송이들! 왜 그렇게 축 처져 있는 거야?”

평소였다면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을 테지만, 그 순간만큼은 필릭스도 반가운 낯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근처의 한 마차 안에서 로제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곧 그녀의 시선이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필릭스의 옆에서 축 늘어져 있는 루시와 콜린에게로 향했다.

“걔네 상태 왜 그래?”

로제의 물음에 필릭스는 대답도 없이 곧장 루시와 콜린을 끌고 로제의 마차로 다가갔다.

“잠깐 실례.”

“뭐, 뭐야?”

로제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는 것을 무시하며 필릭스는 마차 안으로 루시와 콜린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혼자서는 이 둘이 만들어 내는 암울한 분위기를 상쇄해 주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남의 기분 따윈 쥐똥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떠들어 대는 로제라면, 좀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남이 어떤 슬픔에 잠겨 있든 간에 꿋꿋이 새로 산 옷을 자랑하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겠지.

차라리 그런 로제의 자랑질이라도 들으며 계속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같이 좀 타고 가자.”

필릭스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건장한 몸까지 마차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말했다.

“너도 저번에 신세 졌잖아? 기억나지?”

몇 달 전의 일을 언급하자, 로제가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어. 나도 혼자 가기 적적하던 차였으니까.”

결과적으로 필릭스가 루시와 콜린을 데리고 로제의 마차에 오른 건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상대가 듣건 말건 자기 할 말만 하는 로제의 시원스럽고 쾌활한 기운에 루시와 콜린도 서서히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창밖만 바라보던 콜린은, 로제가 부티크와 디저트 가게 이야기를 시작하자 흘끔흘끔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몇 분 후에는 아예 로제 쪽으로 몸을 틀었다.

타운에 가까워질 때쯤엔 함께 부티크에 가자는 로제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더니, 다시 입이 트였는지 원래의 활달한 그로 돌아와 대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안색이 창백하던 루시의 얼굴에도 점점 혈색이 돌아왔다.

필릭스가 가만히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루시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처음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타운에 도착한 뒤에도, 그들은 로제가 이끄는 대로 여러 곳의 부티크를 따라다녔다.

그러자 콜린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기운을 되찾아 나갔다. 그는 부티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옷을 구경하고, 로제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주기도 했다.

그 틈에 필릭스는 루시의 상태를 살피며 그녀를 살뜰히 보살폈다. 간신히 회복한 기운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말이다.

로제가 슬그머니 뒤로 다가와 은근한 질문을 던진 건 그때였다.

“……뭐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뭐가?”

“너랑 루시 말이야.”

로제는 필릭스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짓궂은 웃음을 보였다.

“천하의 필릭스 베르크가 여자한테 쩔쩔매는 모습을 보다니.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네?”

“남들한테 떠들고 다니지나 마.”

로제가 쌀쌀맞고 시건방지긴 해도 입방정을 떨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기에 크게 걱정하진 않았지만, 필릭스는 만약을 위해 일러두었다.

“걱정 마. 이 재밌는 사실은 일단 나만 알고 있을게.”

로제가 킬킬거렸다. 그러더니 눈빛을 바꾸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루시 키넌.”

그녀의 눈에서 위험하게 번뜩이는 눈빛을 보며 필릭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로제는 한때 자신의 인기를 위해 그에게 들이댔던 여학생이 아닌가. 혹 자신이 실패한 일을 루시가 해냈다고 생각해 못살게 구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슬며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순진한 얼굴로 은근히 야망이 넘치잖아?”

걔가 넌 줄 아냐?

실없는 소리를 하는 로제를 향해 필릭스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결국 발바닥이 퉁퉁 부을 때까지 온 부티크를 돌아다니고 난 다음에야 로제의 쇼핑은 끝이 났다.

로제뿐만 아니라 필릭스의 양손에도 무언가가 가득 들려 있었다. 바로 루시를 위해 구매한 옷들이었다.

그녀가 이런 걸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뭐든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루시가 한사코 거부해도 관심을 보이는 것들은 죄다 사들였다.

그렇게 각기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그들이 대로변으로 나왔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멀리서부터 땅을 뒤흔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거리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멈춰 서며 웅성거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재빨리 양옆으로 갈라졌다.

한 무리의 기사들이 빠른 속도로 대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 기사단이었다.

필릭스가 일행을 벽으로 밀치며 대로의 중심에서 물러나자, 거센 폭풍이 지나가는 것처럼 기사들이 짙은 남색 망토를 휘날리며 눈앞에서 멀어져 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로 뿌연 먼지가 하늘 위로 높이 흩날렸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콜록대며 손을 휘저었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대로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기사단이 사라진 곳을 한 번 흘긋 돌아보고는 도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뭐지? 제국 기사단이 출정한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로제가 중얼거렸다. 기사단의 출정 전에는 항상 수도에서 성대한 출정식이 열리고는 했다. 저렇게 급박하게 내달리는 것을 보니 무언가 위급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루시와 콜린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기껏 기운을 되찾았던 둘은 기사단의 모습을 본 뒤 급격하게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기분이 회복될 여지조차 없게 만드는 소식 하나가 다시금 온 제국에 전해졌다.

다름 아닌 로잔의 군대가 트라크 족을 앞세워 동부를 침략해 왔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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