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2화
이제는 루시가 자신을 정말로 짐승처럼 여겨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번들거리는 입술을 소매로 훔친 뒤, 발그레한 루시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미안. 너랑 이럴 목적으로 여기 따라온 건 아냐.”
놀란 건가?
루시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필릭스는 가만히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닦아 주었다.
묵묵부답인 루시 앞에서 필릭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후회하는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앞으론 이러지 않을게.”
그러자 루시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필릭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루시였다.
“……싫은 건 아니었는데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필릭스가 멈칫하며 그녀를 다시 보았다.
“계속…… 그래도 되는데요?”
필릭스의 멍한 표정을 보며 루시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그 말이 완전히 이해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자신과의 입맞춤이 싫지 않았다는 그녀의 말에, 필릭스의 마음속에서 기쁨과 행복이 뒤섞여 떠올랐다.
이어 그의 눈이 또다시 정염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툰 남자애처럼 굴고 싶지 않았다.
루시 역시 무언가를 더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루시에게 다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럽고 느긋하게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 * *
한참이 지나, 필릭스와 루시는 교실을 나왔다.
둘 다 표정이 멋쩍었다. 공부하기 위해 앉아 있던 시간보다 키스한 시간이 더 길었다는 사실에 둘은 민망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필릭스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자신이 루시 앞에서 절제하며 차분히 행동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루시를 향한 갈급함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럼 여기서부턴 따로 가요.”
복도를 나온 뒤 루시가 그를 향해 말했다. 필릭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가 조금 앞서 걸어가며 일 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필릭스도 그녀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바라보며 뒤를 따라갔다.
둘의 달뜬 기분을 억지로 가라앉혀 준 건, 브롬에서 온 한 통의 편지였다.
둘은 본관 앞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진 뒤, 각자 기숙사와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루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정문 쪽을 바라보았다.
매일 아카데미에 들르는 우편 배달부가 말을 정문에 매어 둔 채 교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시가 황급히 방향을 틀어 그에게로 달려갔다.
감사절 연휴를 보내고 돌아온 뒤, 우편원이 방문할 때마다 루시는 급히 달려가 자신에게 온 편지가 없는지 확인했다. 브롬에 있는 부모님께 보낸 감사절 카드의 답장이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필릭스는 우편물이 많아 지체되고 있는 것 같다고 안심시켜 주었지만 루시는 걱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알고 보니 집으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한 동부 출신 학생들이 몇 명 더 존재했던 것이다. 아마도 동부 쪽 우체국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우편 마차가 사고로 전복되거나 편지를 잃어버리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다.
우편원에게 달려간 루시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드디어 답장이 온 모양이었다. 필릭스는 기뻐하는 루시의 얼굴을 멀리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그의 얼굴에도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다시 기숙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필릭스가 문득 루시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필릭스는 의아한 얼굴로 발길을 돌려 루시에게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루시, 무슨 일이야?”
“선배…….”
루시가 편지를 든 손을 떨어뜨리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떡하면 좋아요?”
그녀의 입가가 경련이 일듯 떨렸다. 힘들게 입을 열어 그녀가 말했다.
“동부 국경에서 전투가 있었대요.”
* * *
루시가 받은 편지에는 감사절 카드에 대한 답장 몇 줄 뿐만 아니라, 최근에 발생한 우려스러운 사건에 대한 몇 줄의 내용도 함께 쓰여 있었다.
감사절이 되기 며칠 전, 제국의 동쪽 국경을 침입한 트라크 족이 몇몇 마을을 약탈했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도 브롬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 루시네 부모님과 코너 남작 부부 역시 별 탈 없이 무사하다는 것, 그러니 나중에 소식을 전해 듣더라도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 등이 차분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꾹 쥔 루시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피해가 없다고 해도 트라크 족의 이름을 들은 이상 걱정이 될 수밖에 없겠지.
필릭스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트라크 족은 옆 나라 로잔 왕국 위에 있는 트라크 산맥 근처를 떠돌아다니며 약탈을 일삼는 야만족이었다. 로잔의 국왕은 그 야만족들이 자신들의 백성을 약탈하고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 많은 병력을 소모해 왔다.
심지어 트라크 족과의 전투를 치르느라, 베로스 제국과 분쟁 중이던 땅을 잠정적으로 포기했을 정도였다.
베로스 제국의 입장에선 다행인 일이었다. 로잔 왕국과의 분쟁이 더 길어졌다간 제국민들의 부담도 더욱 커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얻게 된 땅은 제법 효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땅과 야만족 사이에는 늘 로잔 왕국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트라크 족의 습격 또한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야만족들이 갑자기 베로스 동쪽 국경까지 침입해 들어왔다고 하니 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트라크 족이 로잔 왕국의 병사들을 뚫고 제국까지 당도한 것인지, 아니면 로잔 왕국이 일부러 약탈자들의 길을 열어 준 것인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브레든 백작이 야만족을 북쪽으로 몰아냈다고 하니 상황이 더 악화되지는 않을 거야.”
브레든 백작은 수십 년 전부터 제국의 동쪽을 지켜 온 노련한 기사였다. 그 외에도 동쪽 국경에는 실력 좋은 기사단이 지키고 있으니 야만족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또다시 약탈을 해 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네…….”
그의 위로에 루시는 울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루시는 좀처럼 불안을 떨쳐 내지 못했다. 수도와 브롬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상황을 즉각 전달받을 수 없다는 데서 더 큰 불안함을 느끼는 듯했다. 실제로도 약탈이 벌어지고 난 뒤 며칠이나 지난 후에야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으니까.
“전령을 보내 상황을 확인해 줄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필릭스가 말했다. 그러자 루시가 조금은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는 불안해하는 루시를 도서관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보니 필릭스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도서관 앞에 도착했을 때, 차마 그냥 보낼 수 없었던 필릭스가 가만히 루시를 끌어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황궁에선 우리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테니 이미 이 사태를 논의하고 있겠지. 별일 없을 거야.”
그가 루시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루시의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그때, 도서관 문이 열렸다. 누군가 안에서 나오다가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필릭스는 그 사람의 기척을 감지하고 루시에게서 떨어졌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필릭스의 표정이 당황스럽게 변했다.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으로 둘을 보고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필릭스와 루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어 그가 놀란 기색을 감추며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말했다.
“루시, 안에서 제미마가 기다리고 있어.”
“아, 죄송해요.”
루시는 황급히 필릭스의 어깨에서 자신의 가방을 받아 든 뒤, 도서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녀의 가방 속에서 요란하게 부딪히던 책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아드리안이 필릭스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너희 둘이……?”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둘러댈 말도 없어 필릭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필릭스, 아버지가 아시면 가만 안 있으실 거야.”
자신의 후배를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필릭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진절머리가 났다.
“……조심하고 있어.”
“이게 조심하는 거야? 만약 너희를 발견한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어?”
그의 냉정한 지적에 필릭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아드리안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질문했다.
“혹시…… 아버지도 이미 알고 계시는 거 아냐? 왜 갑자기 루시의 후원자가 되겠다고 나서신 거지?”
“아버지는 아직 확실히 몰라. 내가 알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고.”
필릭스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아드리안은 머리만 쓸어 넘겼다. 그는 여전히 의문이 많아 보이는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잠시 후, 그는 더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드리안이 그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간 뒤, 본관을 향해 멀어져 갔다. 사라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필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드리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가 도서부원들을 향해 꽃병을 집어 던졌을 때부터 필릭스는 그의 변화를 눈치챘다.
원체 자신의 속마음을 남에게 털어놓는 법이 없는 동생이라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더욱 염려스러웠다.
아마 내가 무슨 일이 있냐고 캐물어도 절대 대답해 주지 않겠지.
필릭스도 신경질적으로 애꿎은 머리만 쓸어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