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1화
“……벼락치기라니.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공부했는데. 너도 함께했잖아.”
그의 말에 루시가 이번에는 의심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요, 이전 학기에 분명 죄다 0점이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고작 몇 주 공부해 놓고 1등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어디 설명해 봐라, 하는 눈빛으로 그녀가 빤히 쳐다보았다. 난감해진 필릭스가 일부러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음…… 선생님이 훌륭해서?”
그 말에 루시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필릭스가 그동안 관찰해 온 결과, 그건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간신히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또 한 번 추궁했다.
“저번 학기에 백지 답안지를 낸 거…… 정말로 답을 몰라서 그랬던 거예요?”
그 물음에 심장이 뜨끔해진 필릭스는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글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나저나 오늘부터 시험공부할 거지? 그럼 거기로 갈까? 삼 층에 있는 그 교실 말이야.”
말을 돌리는 그를 보며 루시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중간고사에선 고작 몇 주 만에 일등을 하셨으니, 이번에도 선배가 어떤 성적을 받을지 너무나 궁금해지네요.”
“무슨. 다 네가 옆에서 도와준 덕분이지.”
“그래요? 그럼 이번에도 제가 옆에서 열심히 채찍질해 드릴게요.”
루시의 말에 필릭스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자신을 위해 품에 책을 한가득 안고 나타나곤 했던 루시의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번엔 무려 채찍질이라고까지 표현했으니 뭘 얼마나 들고 나타날지 살짝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루시의 그런 모습까지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루시가 뭘 하든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그녀가 아무리 많은 책을 가져다주며 읽으라고 강요해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를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끌고 나가 에벨로자 무곡을 추자고 해도 기꺼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기꺼이 추는 거지, 뭐.
그게 루시라면.
* * *
최근 필릭스의 삶은 자신이 아닌 루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사람에게 휘둘리다시피 하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었으니까. 특히나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하며 들이대는 여학생들은 성가시기만 했다.
그러나 루시는 달랐다. 그녀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삶에 관여해도 좋을 것 같았다. 얼마든지 끼어들고 참견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로 인해 그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감수해 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과정이 즐겁기만 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인내심의 최대치를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곤란을 겪고 있었다.
“자,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하면 되겠네요. 이번엔 시험 준비를 일찍 시작했으니까, 저번처럼 무리한 일정은 잡지 말도록 해요.”
“그래.”
삼 층의 빈 교실 안. 필릭스는 루시가 밀어주는 책들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짧게 대답했다. 시선은 줄곧 책상에 고정한 채였다.
“힘내요, 힘!”
루시가 응원하듯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필릭스는 책을 펼치는 척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초조하면서도 난감한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고, 이따금 목울대가 크게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루시는 그런 그가 이상한 듯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
걱정이 묻어나는 루시의 목소리에 필릭스는 고개를 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그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붉고 도톰한 입술로 향했다.
그 입술을 애끓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그는 뜨끔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러더니 책장을 아무렇게나 넘기며 무작정 보이는 글자 위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문제였다.
루시와 단둘이 있으면 자꾸만 그녀의 입술이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이상야릇한 기분에 휩싸이며 곤란한 상태가 되곤 했다.
연못가에서 키스한 뒤로 그는 루시와 또다시 입을 맞춘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당당히 밝힐 수도 없는 관계 속으로 그녀를 끌어들이면서 계속 입술을 들이대는 건 너무나 파렴치한 짓이 아닌가.
게다가 식물원에서 돌아오던 마차 안에서 그는 짐짓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했었다.
“내가 그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래?”
그는 분명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기다리지 못하고 냅다 입을 맞춘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민망하고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날 어떻게 봤을까.
루시는 그 후 키스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겉으론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속으론 놀랐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는 되도록이면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교실에서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자 그의 인내심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기 시작했다.
조용한 적막 속에서 모든 것이 과하게 의식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침 삼키는 소리까지도 신경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꾸만 루시의 입술로 시선이 가는 자신에 대해서는 환멸이 났다. 스스로가 자제심이 없는 짐승같이 느껴졌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 알렉이 어느 여학생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끈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에 대해 아니꼽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쯧쯧, 아주 짐승들이 따로 없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차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그런 음흉한 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루시의 입술을 흘깃대다가 그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공부나 해, 필릭스 베르크.
스스로를 꾸짖듯 말하며 책에 몰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글자에 집중하다 보니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왜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요?”
갑자기 날아온 루시의 목소리에 필릭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뭐가?”
설마, 들켰나. 내가 그녀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자 루시가 미간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놀라요? 아까부터 계속 목차만 주구장창 들여다보고 있으시잖아요.”
그녀의 말에 필릭스는 자신이 읽고 있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약초학 교재의 목차 부분에 펼쳐진 그 페이지에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오백 가지의 약초 목록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황급히 책을 팔랑거리며 대충 아무 곳이나 펼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얼버무렸다. 하지만 얼굴에서 오르는 열은 생생히 느껴졌다. 루시도 그것을 보았는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갑자기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미지근한 그녀의 손은 열이 오른 그의 얼굴을 서늘하게 식혀 주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그 간질거리는 접촉에 움찔 몸을 떨었다.
“아프면 억지로 안 해도 돼요.”
루시가 필릭스의 손에서 책을 가져가 덮더니, 다른 책들과 함께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니, 저 때문에 억지로 앉아 있었던 거죠?”
루시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필릭스는 멍한 얼굴로 고개만 내저었다.
“아픈 거 아니야. 그냥…… 집중이 안 돼서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가요. 어차피 저도 도서관에 가 봐야 해요.”
루시는 책을 모은 뒤 가방에 주섬주섬 집어넣기 시작했다. 필릭스는 몰래 괴로운 한숨을 내쉬며 루시를 따라 가방을 챙겼다.
그래, 차라리 단둘이 있는 상황은 되도록 만들지 않는 게 좋겠어.
그는 계속 루시의 입술을 흘긋대던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나 자제력이 없고 엉큼한 사람인지 처음 깨달았다고.
얼른 기숙사로 돌아가서 찬물에 몸이나 담가야겠다. 그럼 정신이 좀 들겠지. 키스 생각도 더는 안 날 테고.
그는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도망치는 사람처럼 문을 열고 먼저 나가려 할 때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루시가 가만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필릭스가 뒤돌아보자 루시가 갑자기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와 닿는 그 말랑하고 기분 좋은 감각에 필릭스는 줄곧 꽉 쥐고 있던 한 줌의 인내심이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 입술을 뗀 루시가 붉어진 얼굴로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어 그녀가 우물쭈물 자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밖에는 사람이 있으니까…….”
문고리를 잡고 있던 필릭스가 곧장 다시 문을 닫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철컥, 걸쇠를 내걸었다. 다른 쪽 손에 들려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필릭스가 두 손으로 루시의 얼굴을 감싸 쥔 뒤 곧바로 끌어당겼다.
긴 키스가 시작되었다.
불순한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던 조금 전의 다짐과는 다르게, 필릭스는 아주 열심히 루시의 입술을 탐했다.
두 번째였지만 마치 처음 하는 것 같은, 서툴고 조급한 행위였다. 첫 번째 키스에서 상대를 연못에까지 빠트려 가며 배웠던 교훈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그는 또다시 루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마침내 루시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을 때에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루시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아…….”
필릭스의 입에서 자괴감이 뒤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