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90화
돌연 심각해진 표정에 부인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 부인께서 주최했던 여성 사교 모임에 루시를 데려간 적이 있었지요. 그 여행이 아마 8년 전 가을이었던가…….”
콜린도 그때를 회상하며 거들었다.
“루시가 후작가에서 돌아와 얼마나 자랑을 했는지 몰라요! 거기서 먹은 요리며, 디저트며, 정원을 산책하다 본 아름다운 호수까지……. 게다가 정원에서 본 꽃 이름을 죄다 읊을 기세로 하루 종일 시끄럽게 굴었다고요!”
“호수?”
“정원 근처에서 커다란 호수를 봤다고 했는데요? 선배네 어머님의 친정이니 선배도 가 본 적 있으시겠네요.”
호수…….
필릭스는 멍한 얼굴로 테이블 위를 응시했다. 불현듯 어떤 희미한 기억들이 마구 뒤엉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언뜻 보면 잠잠한 것 같았지만, 머릿속에서는 아주 빠르게 8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 가을로.
사실 8년 전 가을을 회상해 봤자 생각나는 건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뿐이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후작저로 가는 마차에 올랐던 것. 그리고 그 마차 안에서 아드리안이 아니라는 자신의 고백에 어머니가 보였던 실망스런 얼굴.
한 달 내내 어머니에게 외면당한 채 혼자 웅크려 있던 어린 날의 자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서글픈 기억이었기에 그는 의식적으로 그 가을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써 왔다. 필릭스에게 그 가을은 지워진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트리아나 부인에게서 루시가 후작저를 방문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느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사소한 기억 하나가 그의 의식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 작은 기억은 단숨에 그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리고 마침내 잊고 있던 얼굴 하나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어렴풋한 형상 속에서도 어떤 부분들은 선명한 모습을 되찾아 갔다.
등 뒤로 가지런히 땋은 머리. 연고를 건네던 희고 작은 손. 그리고 신비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아…….”
마침내 필릭스는 왜 그동안 잊고 있었나 싶었던 어느 기억에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선배, 왜 그러세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일어선 그를 콜린이 흔들며 물었다. 필릭스는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중얼거렸다.
“설마…….”
뒤에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는 콜린과 부인을 내버려 두고서 필릭스는 재빨리 이 층으로 뛰어올라 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정말 그때 그 소녀가 루시라면, 나는 도대체 왜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한걸음에 루시의 방 앞에 도착한 그가 숨을 들이쉰 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루시.”
곧 문 너머에서 루시의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 잠깐만요! 저 옷 입는 중인데요!”
그리고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문 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 뒤에서 루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갈아입고 나갈게요!”
하지만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필릭스의 입에서는 조급한 질문 하나가 튀어 나갔다.
“혹시 너야?”
“……네?”
앞뒤를 다 잘라먹은 질문에 루시가 얼빠진 소리로 되물었다.
“그때 그 애가 너야?”
머릿속이 복잡해 필릭스의 입에서는 연거푸 두서없는 물음만 튀어나왔다.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필릭스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차분히 물었다.
“8년 전 가을에 말이야. 에버른 저택의 호숫가에서 나한테 말 걸었던 여자애. 나한테 상처 연고도 주고, 발목에 모가나 풀을 붙여 줬던 아이. ……그거 너 맞아?”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 아직 머리가 축축하게 젖은 루시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놀란 듯 커다란 눈이 필릭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이 에메랄드 같은 눈.
이 눈을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놀란 것처럼 보인 것도 잠시, 루시는 살짝 원망이 담긴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이제야 생각이 난 거예요?”
필릭스는 곧장 문을 열어젖히고 루시를 꽉 껴안았다. 기쁨이 그의 마음속 가득 차올랐다.
그는 상기된 얼굴을 루시의 머리에 꾹 누르며 물었다.
“넌 날 기억하고 있었어?”
“……그럼요. 그 예쁜 얼굴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의 품에 폭 싸여 루시가 중얼거렸다.
“게다가 말똥 냄새가 난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어진 말에 필릭스가 루시를 놓아준 뒤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정말 그랬다고? 기억 안 나는데……. 너한테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
루시가 입술을 한 번 꾹 다물더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기억 안 나는 척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아니었다. 자신이 정말로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지금도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데.
필릭스는 루시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비누 향기를 맡으며 슬며시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 다시 루시를 꽉 껴안았다. 루시도 말없이 그의 품에 꼭 안겨 들어왔다.
필릭스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그 옛 만남이 기억나자 무척 놀랍고 기뻤다. 동시에 다시 한번 행복하고 굳건한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루시와 자신은 단단한 인연의 실로 꽉 묶인, 운명이 아닐까 하는.
* * *
트리아나 부인의 저택에서 보낸 휴일은 어쩐지 짧게만 느껴졌다. 너무나 즐겁고 평화로운 시간이라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고맙게도 부인은 그들이 떠나는 순간까지 손에 이것저것 들려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부인이 붙여 준 시종이 아니었다면 다 들고 가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초대에 감사했습니다, 부인.”
“나도 즐거웠어요. 다들 조심히 돌아가요.”
부인의 인사를 받으며 그들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한번 덜커덩거린 뒤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단 하룻밤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필릭스에게는 더없이 특별한 곳이 된 저택과 정원이 창밖으로 조금씩 멀어져 갔다.
그의 맞은편에는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 저택을 더없이 뜻깊은 장소로 만들어 준 당사자가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앉아 있었다.
그에게 루시는 이제 완벽히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다른 누구와도 이런 인연은 만들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루시, 내 옆으로 와.”
필릭스가 콜린의 옆에 앉아 있는 루시에게 말하며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그의 말에 루시는 당황한 표정으로 콜린을 의식하듯 흘끔거렸다. 아직 콜린이 자신들의 사이를 알아차렸다는 걸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이제 자신의 눈치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필릭스의 행동에 콜린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루시가 계속 당황한 채 앉아 있자 필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콜린의 발을 툭툭 건드렸다.
“나랑 자리 바꿔.”
“나참! 그냥 좀 가면 안 돼요?”
콜린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지만 필릭스가 억지로 일으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바꿔 주었다.
루시의 옆에 앉자마자 필릭스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콜린의 표정을 살피던 루시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더니 작게 속삭였다.
“혹시 콜린한테 말했어요? 전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응, 어제 우리가 손잡고 있는 거 봤대.”
그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얘기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단단히 을러 놨어. 걱정 마.”
“그게 아니라…… 제가 미리 말하지 않아서 섭섭해할까 봐서요.”
“섭섭해하면 죽이겠다고도 해 놓을까?”
“다 들리는데요?”
콜린이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
필릭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엄지로 루시의 손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러자 콜린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이제 필릭스는 루시에 대한 마음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에 대한 사랑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던 차였다.
그런데 어젯밤 자신과 그녀를 이어 주는 기억 하나를 깨닫고 나서는 그녀에 대한 확신이 더욱 커졌던 것이다.
그리고 수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루시만은 자신을 잊지 않고 내내 기억해 주었다는 사실에 고마움이 왈칵 솟구쳐 오르곤 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는 루시의 동그란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무언가 와 닿는 느낌에 뒤를 돌아본 루시가 그것이 필릭스의 입술임을 깨달은 뒤 얼굴을 붉혔다.
“저는 유령인가요?”
콜린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곧장 날아왔다.
“제가 안 보이세요?”
이번에도 필릭스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루시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몇 번 얼굴을 비비적대던 그가 루시와 뺨을 마주 대고서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노란 낙엽이 듬성듬성 달려 있는 나무들이 휙휙 지나쳐 갔다.
을씨년스럽던 가을 거리가 마치 봄날처럼 화사해 보였다.
* * *
삼 일 동안의 휴일이 끝난 뒤, 아카데미는 집에서 돌아온 학생들로 다시 북적거렸지만, 분위기는 축 처져 있었다. 학생들은 놀고먹던 나태함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해 수업 시간에도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다.
다들 정신은 어디 멀리 가 있는지 초점이 없는 눈으로 창밖만 멀거니 내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홀로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벌써부터 기말고사 준비를 하겠다며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필릭스는 루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바닥으로 축 처질 만큼 책으로 꽉꽉 들어찬 가방을 힘겹게 둘러메고 걷고 있었다.
“이리 줘.”
필릭스가 그녀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생각보다 더욱 묵직한 무게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넌 평소에도 열심히 하잖아. 그러니까 본래 하던 대로만 해도 문제없을 거야.”
그의 말에 루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벼락치기로 1등 한 사람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