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9화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필릭스의 앞으로 콜린이 다가왔다.
“루시랑은 계속 붙어 다녔는데, 대체 어느 틈에…….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예요?”
그가 섭섭한 낯빛을 띠며 물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일 친한 친구에게 연인이 생겼을지도 모른단 사실을 깨닫게 되어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시끄러워.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가만 안 둔다.”
필릭스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자 콜린이 냉큼 귀를 가렸다.
“제가 누구한테 얘길 한다 그래요?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거든요?”
있기는, 개뿔.
필릭스는 마음속으로 말을 삼키며 정원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콜린이 그의 어깨를 턱 잡고 나섰다. 그의 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진지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필릭스 선배. 루시는 제 친구이자 가족이나 다름없는 애예요. 울리면 가만 안 둘 거예요.”
그의 왜소한 체격은 전혀 위협을 주지 못했지만, 필릭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콜린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방에 들어갔다.
콜린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필릭스가 이내 발길을 돌려 층계를 내려갔다. 그는 콜린이 알려 준 대로 루시를 찾아 정원으로 향했다.
어둑한 정원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은 오직 달빛뿐이었다. 필릭스는 그 속에서 홀로 작은 연못가에 앉아 있는 루시를 발견했다.
“루시.”
그가 부르자 추운 듯 두터운 망토를 목까지 여미던 루시가 그를 돌아보았다.
“선배!”
그녀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떠올랐다.
“추운데 왜 나왔어요?”
자신이 더 추워 보이면서도 루시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는 넌 여기서 혼자 뭐 해?”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루시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연못을 바라보고 앉았다. 필릭스도 그 옆으로 다가가 가만히 자리를 잡았다.
연못 위에는 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낙엽들이 빈틈없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은 항구에 정박한 배들처럼 뒤뚱뒤뚱 흔들렸다.
“어떤 옛날 생각?”
그가 묻자 루시가 어슴푸레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어릴 때 여기서 놀았던 기억이랑, 이것저것이요.”
“나도 네 어릴 적 모습이 궁금해.”
필릭스가 갑자기 말했다. 불쑥 던진 말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궁금했다.
루시 키넌이 어릴 적엔 어떤 아이였는지.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얌전하고 수줍음이 많았는지. 약초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그때부터였는지.
“네 어릴 적 모습을 콜린 코너만 아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러니까 나한테도 알려 줘. 어릴 땐 어떤 아이였는지.”
“음…….”
갑작스러운 물음에 루시가 난감한 듯 턱을 긁었다. 그녀가 대답을 어려워하자 필릭스가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다.
“콜린은 모르는 네 모습을 말해 줘. 그래야 나한테 공평하지.”
잠시 생각에 잠겼던 루시는 여전히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하지만 콜린이 모르는 제 모습은 없는데요? 어릴 땐 거의 한집에 살다시피 붙어살았단 말이에요.”
그 마을은 무슨 공동 육아라도 하는 거야?
그렇게 내뱉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필릭스가 인내심을 유지하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네 첫사랑 얘길 해 봐. 설마 첫사랑 얘기까지 콜린이랑 공유한 건 아니지?”
“첫사랑이요?”
루시가 황당한 얘길 들은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첫사랑. 마을에 좋아했던 남자애 하나쯤은 있었을 거 아니야.”
집요한 물음에 루시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열었다.
“그게 첫사랑인지는 모르겠는데…….”
“모르겠는데?”
“계속 생각이 나던 남자애는 있었어요.”
계속 생각이 나?
필릭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경련이 일듯 미세하게 떨리는 입가는 막지 못했다.
“어떤 남자앤데?”
“그냥 어쩌다 한 번 만난 애였어요.”
“어쩌다 한 번 만나?”
필릭스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루시는 어쩌다 한 번 만난 남자애를 첫사랑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말해 봐. 잘생겼어?”
“네.”
망설임 없는 루시의 대답에 필릭스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솔직히 그렇게 잘생긴 남자애는 처음 봐서 충격을 받았었어요.”
“부연 설명은 안 해도 돼.”
필릭스는 조경석에 등을 기대며 잠시 말을 잃었다. 좀처럼 표현을 잘 안 하는 애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니 정말로 잘생긴 녀석인 게 틀림없었다.
“말이라도 계속 붙여 보지 그랬어?”
필릭스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성격은 별로 안 좋아 보였어요. 게다가 저한테 말똥 냄새가 난다고 하던데요.”
“미친놈 아냐?”
필릭스가 참지 못하고 욕을 했다. 그러자 루시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왜 그렇게 웃어?”
“그냥요. 아무튼 그 애가 제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인 것 같아요. 저도 최근에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최근에야 깨달아? 그러니까 나랑 함께 지내는 시간에도, 먼 옛날 겨우 한 번 만났던 남자애를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루시는 연못을 보며 어떤 추억에 잠긴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입가에 지그시 떠올라 있는 미소를 보니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질투가 샘솟았다.
갖고 싶었던 걸 모조리 빼앗겨 버린 것 같았다.
루시의 어릴 적 추억을 공유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바로 콜린 코너였다. 게다가 그녀의 첫사랑은 딱 한 번밖에 본 적 없는 웬 성격 파탄자라지 않은가.
너한테는 내가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필릭스가 억울한 눈길로 그녀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자, 생각에 잠겨 있던 루시가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나도 뭔가가 되고 싶어.”
제일 친한 소꿉친구 자리도, 첫사랑 자리도 다른 놈들한테 빼앗겨 버렸다.
그러니 다른 남은 자리라도 꿰차야 했다.
“무슨…….”
루시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필릭스는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단단히 맞잡았다. 그러곤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세차게 뛰는 필릭스의 심장 박동을 느낀 루시가 얕은 숨을 뱉어 냈다. 그런 그녀를 응시하는 필릭스의 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소꿉친구보다, 첫사랑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필릭스는 루시의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말을 토해 냈다. 떨렸지만 그래도 한 자 한 자에 진심을 담아 전했다.
“너에게.”
그 말을 들은 루시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필릭스는 초조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루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것을 신호로, 떨리는 숨을 들이켠 필릭스가 곧장 루시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늦가을의 추위 속에 망토를 꼭 여미고 있던 루시는 입술도 차가웠다. 필릭스는 자신의 모든 온기를 전해 주려는 듯 그녀에게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처음 느껴보는 찌릿한 기분에 필릭스는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보다 거칠게 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루시를 당기고 또 당겼다.
루시의 망토가 스르륵 벗겨져 뒤로 툭 떨어졌다. 그녀가 다급히 필릭스의 옷자락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루시의 목을 더 단단히 끌어당기며 몸을 붙여 왔다.
“자……잠깐……!”
마침내 루시의 몸이 연못 쪽으로 눕다시피 기울어졌을 때쯤, 그녀가 숨을 토해 내듯 더듬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필릭스는 더욱 거칠게 루시에게 몸을 기울였다.
“으읍, 서, 선배…… 이러다……!”
‘연못에 빠져요!’라는 루시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자신의 팔뚝을 다급하게 움켜쥐는 루시의 손길에 필릭스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한 그가 재빨리 루시의 등을 한 손으로 받치며 시야에 들어온 조경석으로 다른 쪽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몸이 기울더니 필릭스가 조경석을 붙잡기도 전에 그들은 연못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몽롱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차가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필릭스는 얼른 루시를 안고 연못 위로 들어 올렸다.
다행히 연못의 수위는 필릭스의 무릎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온몸이 다 젖어 버린 그들의 옷에서는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루시! 괜찮아?”
그녀의 얼굴에 미역처럼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필릭스가 물었다. 루시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턱을 달달 떨었다.
“제, 제가…… 빠, 빠질 거라고…….”
“미안해!”
그는 차가운 물 속에서 하얗게 질려 버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얼음장 같은 그녀의 몸을 느끼고서야 그는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았다.
분명 근사하고 진지한 말로 진심을 전할 생각이었는데.
그토록 자제력을 잃고 달려들었다는 사실에 필릭스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 감기 걸리겠다, 어서 들어가자.”
땅에 떨어져 있던 망토를 주워 황급히 루시 위로 뒤집어씌우고, 그는 그녀를 데리고 저택으로 향했다.
둘이 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두웠던 계단 위에서 불빛 하나가 나타났다. 등불을 든 하녀였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필릭스가 연못에 빠졌음을 알리자 하녀는 얼른 수건을 가지러 복도로 사라졌다. 하녀의 발소리를 들은 듯, 잠시 뒤 트리아나 부인까지 허둥지둥 잠옷 바람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홀딱 젖은 루시와 필릭스의 모습을 보고는 경악한 듯 입을 벌렸다.
“세상에, 루시! 필릭스 공자님! 이게 무슨 일인가요?”
그녀가 황급히 달려와 그들을 데리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몸이 너무 차가워!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부인은 황급히 하녀들을 불러 새 옷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하녀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사라졌다.
필릭스가 방으로 돌아가 있자 하녀들이 새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옷을 입고 나오자 응접실에 트리아나 부인과 콜린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 때문에 저택의 온 사람들이 깼다고 생각하니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루시는 아직 옷을 갈아입는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발이 미끄러져서 연못에 빠지고 말았어요.”
그의 사과에 트리아나 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루시가 정원으로 들어갈 거라는 걸 내 미리 짐작했어야 했는데. 정원에 불을 미리 밝혀 놓는다는 걸 깜빡했지 뭔가요.”
“대체 뭔 짓을 했기에 연못에 빠져요?”
콜린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러자 트리아나 부인이 건네는 겉옷을 받아들며 필릭스가 콜린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여튼, 루시는 정원을 너무 좋아한다니까.”
부인이 못 말리겠다는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수도 여행 때도 에버른 후작가의 정원을 가장 좋아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기억나요! 그날 하루 종일 정원에서 본 꽃 얘기밖에 안 했잖아요.”
“하지만 그럴 만하지. 에버른 후작가의 정원은 사시사철 아름답기로 유명하잖아요?”
트리아나 부인이 동의를 구하듯 필릭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필릭스는 겉옷을 걸치다 말고 가만히 멈춰 서더니 되물었다.
“루시가 에버른 후작가의 정원에 왔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