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8화
명백한 온도 차에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루시는 딱히 손을 빼지는 않았다. 단지 그의 손아귀에 잡힌 자신의 손을 잠깐 꼼지락거렸을 뿐.
루시가 움직임을 멈추자 자신감을 얻은 필릭스는 손가락을 스르륵 움직여 깍지를 끼었다. 이번에도 루시는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그녀의 발이 잠깐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해가 저물어 가는 초저녁, 조금은 어둑해진 마차 안에서 둘의 손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점점 비슷한 온도가 되어 갔다.
“와, 거리가 정말 혼잡하네요! 다들 가족을 보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봐요.”
창밖을 보던 콜린이 쾌활하게 조잘대는 소리에도 필릭스는 짜증이 나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오직 루시에게만 향해 있었다.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루시 역시 자신에게 온 감각을 집중하고 있음을.
마치 콜린과는 딴 세상인 것처럼 필릭스와 루시는 오랫동안 손을 맞잡은 채 휙휙 스쳐 지나가는 베델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 * *
트리아나 부인의 저택은 마치 그녀의 위엄을 형상화해 놓은 것 같았다.
넓은 잔디밭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고풍스런 외관이 마치 부인처럼 위풍당당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선 마차가 천천히 멈추어 서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다.
“와!”
마차에서 내린 루시가 감탄을 내뱉으며 저택을 둘러보았다. 어릴 적 방문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그녀의 눈이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콜린, 봐 봐! 예전에 봤던 그대로야!”
루시와 콜린이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저택을 둘러볼 수 있도록 느긋하게 기다려 주던 시종은 곧 그들을 홀로 안내했다.
손님을 대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 홀 안은 수많은 촛불들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어서 오렴!”
여러 명의 하녀들을 뒤에 거느린 채 기다리고 있던 트리아나 부인이 두 팔 벌려 그들을 환영했다. 그녀는 콜린과 루시를 차례로 안아 준 뒤, 필릭스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어서 와요, 필릭스 공자님.”
그 환대의 분위기는 곧장 만찬장으로 이어졌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만찬 시간이 가까워졌으므로 트리아나 부인은 곧장 음식을 내오라 명했다. 곧 식탁 위는 거위와 사슴 요리, 으깬 감자 요리와 각종 빵 등으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 필릭스도 음식을 보자마자 저절로 허기가 밀려왔을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신께 드리는 트리아나 부인의 감사 기도와 함께 만찬이 시작되었다.
훌륭한 그 맛에 그저 먹기 바빴던 그들은 한동안 주방장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느라 다른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필릭스는 뭔가 빠진 듯한 느낌에 식탁을 죽 둘러보았다. 정말 완벽한 만찬이었지만, 뭔가 어색했다.
이내 그는 감사절에 절대 빠지지 않는 요리 하나가 식탁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새끼 돼지 요리가 없어요!”
필릭스보다도 먼저 식탁을 요리조리 둘러보던 콜린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추수 감사절 식탁에는 반드시 새끼 돼지 요리를 올리는 것이 베로스 제국의 전통이었다. 그 요리가 없다면 감사절을 제대로 지내지 않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콜린의 지적에도 트리아나 부인은 이미 알고 있다는 투로 태연하게 대답했다.
“트리아나 가문에서는 돼지 요리를 먹지 않는단다, 콜린.”
루시도 몰랐던 사실이었던 듯 의아한 눈을 들어 부인을 바라보았다. 콜린 역시 그동안 이 저택에서 했던 식사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대고모님의 저택에선 돼지 요리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네요.”
“바로 예언 때문이지.”
부인이 시종에게 거위 요리를 자르도록 손짓하며 대답했다.
“예언이요?”
“베로스 제국의 몇몇 가문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예언들이 있단다. 바로 오래전 대신전에서 내린 것들이지.”
가문마다 신탁으로 전해지는 예언이 있다는 사실은 필릭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예언들은 바로 베로스 제국 건국 때부터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어떤 가문들은 그 예언을 가언처럼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고, 다른 가문들은 그저 미신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트리아나 가문의 예언은 ‘가주가 돼지를 해하면 죽음에 이르리라’는 것이었지.”
이어 부인은 오래전 사별한 남편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평소 사냥을 즐겼던 트리아나 전 백작은 어느 날, 예언을 무시하고 멧돼지에게 활을 겨누고 말았다. 그러나 언제나 백발백중이던 그의 화살은 그 순간만큼은 멧돼지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이에 흥분한 멧돼지가 돌진하자 놀란 말이 앞발을 쳐들었고, 백작은 순식간에 낙마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날의 일은 한 번 더 트리아나 가의 사람들에게 예언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 뒤로 가주는 물론 모든 트리아나 사람은 절대 식탁에 돼지고기를 올리지 않지.”
오래전 죽은 남편의 이야기를 하는 부인의 표정은 담담했다. 슬픔은 풍화되고 풍화되어 일찍이 그녀의 얼굴에서 멀리 날아가 버린 듯했다.
“하지만 그이의 죽음이 정말 예언 때문인지는 모르겠어.”
태연한 얼굴로 고기를 썰어 입에 넣은 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날 내 남편은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거든. 취한 채로 말에 오르다니, 그답지 않게 어리석은 행동이었지. 내 생각엔 예언이 아니라 술이 내 남편을 죽인 거야.”
마치 남 얘기를 하듯 무감한 말투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만찬장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아이고. 내가 손님들 앞에서 무슨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오래전 얘기라 부주의하게 떠들고 말았군. 신경 쓰지 말렴.”
부인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이어 콜린이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듯 입을 열었다.
“가문의 예언이라니! 전 들은 적이 없어요. 부모님은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해 주신 적이 없거든요. 혹시 대고모님께서는 코너 남작가의 예언이 뭔지 들은 것 없으세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남작이었던 아버지께서는 나에게는 그런 말씀을 전혀 안 하셨지. 어쩌면 후계자였던 오라버니에게는 알려 주셨을지도 몰라.”
그러나 콜린은 이미 돌아가신 그의 할아버지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예언도 알려 주지 않았다며 실망스럽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가문에도 뭔가 굉장한 예언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콜린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필릭스는 콜린의 쉬지 않고 나불거리는 입방정 때문에 코너 남작이 일부러 알려 주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선배는요?”
콜린이 필릭스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눈을 빛냈다. 그는 무언가 엄청난 예언이 있을 거란 기대감으로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베르크 가문이라면 분명 예사롭지 않은 예언이 내려졌을 것 같아요.”
콜린이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솔직하게 생각을 말했다. 옆자리에 앉은 루시 역시 은근히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필릭스는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수 없었다.
그의 가문에는 아무런 예언도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쎄. 우리 가문엔 아무런 예언도 없어.”
그는 솔직히 아버지인 베르크 공작이 신을 믿기는 할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그가 하는 사업들을 떠올리자면, 결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 그라면 신의 예언조차도 코웃음을 치며 넘겨 버렸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필릭스조차도 예언에 대해서는 미신이라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접시로 시선을 내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예언 따위, 애초에 듣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라.”
“현명하군요.”
트리아나 부인이 필릭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말했다시피 난 내 남편이 예언 때문에 죽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운명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예언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화제는 트리아나 부인의 건강과 취미 생활로 옮겨 갔다. 그 뒤에는 브롬에 있는 콜린과 루시의 가족들에 대한 안부, 그리고 제노미움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차례대로 이어졌다.
식탁 중앙에 놓인 초가 반 넘게 타들어 갔을 때쯤, 만찬은 슬슬 끝이 났다.
트리아나 부인의 지시에 하녀 두 명이 만찬장으로 들어와 필릭스와 루시, 콜린을 하룻밤 묵게 될 방으로 안내했다. 셋은 부른 배를 계속 쓰다듬으며 하녀들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셋에게는 각각의 손님방이 주어졌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필릭스는 루시에게 함께 산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콜린이 곁에 있는 바람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녀석까지 데리고 함께 걷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필릭스는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왔다.
루시의 방 앞으로 다가간 그가 가만히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벌써 잠들었나?
창밖이 깜깜하긴 했지만,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필릭스는 몇 번 더 문을 두드려 보았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때 옆방 문이 열리더니 콜린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선배, 루시는 방에 없을걸요?”
그가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아마 정원에 있을 거예요. 걘 밤낮 가리지 않고 정원 구경하는 걸 좋아하니까.”
“딱히 루시를 찾고 있던 건 아닌데.”
필릭스가 관심 없는 척하며 거짓말을 했지만, 콜린은 갑자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 아까부터 계속 루시 방 앞을 서성거리면서 문을 두드려 댔잖아요! 저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다고요!”
“숨기긴 뭘 숨겨?”
민망한 마음에 필릭스의 목소리가 괜히 높아졌다. 그런 그를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콜린이 말했다.
“아까 마차에서 다 봤는데요? 둘이 손잡고 있는 거. 창문에 다 비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