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7화
루시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함이 마땅했지만, 콜린이 낀다는 사실을 알자 벌써부터 피곤함이 몰려 왔다. 그렇다고 트리아나 부인과 혈연관계인 콜린더러 빠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팔팔한 기운으로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아파서 불참할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동안에 시간은 늦가을 바람처럼 순식간에 흘러갔고 마침내 추수 감사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베로스 제국의 제일 큰 휴일 중 하나인 감사절에는 제노미움 아카데미에서도 3일이라는 방학이 주어진다.
수도에서 나고 자랐거나, 고향이 근방인 학생들은 보통 짐을 꾸려서 저택으로 떠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는 3일 동안 가족들과 함께 한 해의 풍요로움과 가문의 번영에 감사하며 안온한 시간을 즐기다 돌아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타지에서 온 학생들은 짧은 시간 내에 고향을 방문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저희들끼리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계획들을 세우기 바빴다.
루시 또한 제국 동부 변방에 위치한 브롬이라는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고향을 방문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트리아나 부인의 저택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계획이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가족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답장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깜깜무소식이네.”
늦은 저녁.
식당을 나오던 필릭스는 루시의 목소리를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짧아진 하루 속, 벌써 어둑해진 교정을 익숙한 두 뒷모습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루시와 콜린이었다.
필릭스가 가만히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둘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워낙 거리가 멀다 보니 답장이 오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그래도 이렇게 오래 걸린 적은 없었는데. 혹시 우편 마차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편지를 다시 보내 봐야 할까 봐.”
“무슨 편지?”
필릭스가 뒤에서 갑자기 말을 거는 바람에 루시와 콜린이 동시에 펄쩍 뛰었다.
“깜짝이야! 언제부터 뒤에 서 계셨던 거예요?”
콜린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러나 필릭스는 그런 그를 무시하며 곧장 루시에게 물었다.
“중요한 편지야?”
“아뇨, 그냥 집에 보낸 편지예요. 고향에 못 가니 미리 감사절 카드를 보냈거든요. 보통 우편 배달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쯤 답장이 왔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좀 늦네요.”
필릭스가 대꾸하기도 전에 콜린이 먼저 끼어들었다.
“원래 이맘때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많으니 배달량이 많아 늦는 거겠지.”
그의 말이 맞았다. 감사절이 되면 너도나도 친지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우편 배달부들이 쉬지 않고 일을 하는 편이었다.
대답하던 콜린은 갑자기 시무룩해지더니 그답지 않게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올해는 마을 사람들 모두 정신없을 거야. 여름에 홍수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잖아. 아마도 겨울을 날 식량을 구하느라 바쁘겠지, 모두.”
진지해야 할 상황에서도 눈치 없이 발랄하기만 하던 콜린이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니 낯설기만 했다.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젓한 모습으로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마을은 다들 고생일 텐데 우리만 이렇게 만찬에 가도 되는 걸까?”
그의 말에 루시도 덩달아 풀이 죽었다.
“……정 걱정이 되면 따로 전령을 보내서 소식을 알아 봐 줄까?”
필릭스가 제안했다. 하지만 루시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갑자기 전령이 마을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엄마는 도리어 깜짝 놀랄 거예요. 콜린의 말대로 겨울나기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늦어지는 거겠죠. 더 기다리면 올 거예요.”
그 뒤, 교정을 걸어가는 동안 루시와 콜린은 둘만 아는 고향 얘기를 나누었으므로 필릭스는 그저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 대화를 듣고 있자니 둘이 정말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온 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문득 한 가지 말이 떠올랐다.
‘루시는 제 약혼자거든요!’
너무나 순진무구한 얼굴로 충격적인 말을 내뱉던 콜린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그 한마디 때문에 한때 제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또렷이 떠오른 기억에 필릭스는 순간 욱, 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아악!”
멀쩡히 걷던 콜린이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왜 갑자기 귀를 당기세요!”
“당기다니? 귀에 벌레가 앉아 있어서 쫓아 준 것뿐이야.”
필릭스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귀를 당겨 주었지만 그때 받은 충격에 비하면 그다지 시원한 복수는 아니었다. 그는 이참에 이 문제를 확실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너 정말로 루시랑 약혼했어?”
그 난데없는 질문에 즉각 반응을 보인 것은 콜린이 아니라 옆에서 걷고 있던 루시였다.
“가,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세요?”
“전에 이 녀석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나서. 너 분명 그때 그랬지? 루시가 네 약혼자라고.”
“그러니까 그건 어른들이 그냥 하는 말이라니까요?”
루시가 황당한 투로 말했다. 그러나 그 해명에 콜린은 동참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시, 어른들 말에 그냥 하는 말은 없다? 장난 같아 보여도 마을 사람들은 다 너와 나의 결혼을 기대하고 있을걸?”
“마을 사람들이 다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고?”
옆에서 루시가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것도 보지 못한 채 필릭스는 인상을 구겼다.
온 마을이?
대체 어떻게 돼먹은 마을이기에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정작 본인은 생각도 없는 결혼을 밀어붙일 생각을 하냔 말이다.
필릭스의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혔다.
“어, 어릴 때는 누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듣지 않나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마을 사람 아무도 없을걸요.”
루시가 둘러대는 말에 콜린이 킥킥대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필릭스는 기분이 더욱 안 좋아졌다.
필릭스가 또 한 번 귀를 잡아당길 태세로 자신을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콜린은 한껏 들뜬 채로 재잘대기 바빴다. 이번에는 트리아나 부인의 저택에서 있을 만찬 얘기에 열을 올리며 어떤 음식들이 차려질지 하나하나 열거하는 중이었다.
각기 다른 표정의 세 사람이 어두운 교정을 걸어 나갔다.
* * *
추수 감사절이 되자, 아카데미 학생들은 마차를 타고 수도에 있는 자신들의 저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떠들썩하던 교정과 기숙사는 절반이 넘는 학생이 줄어들자 훨씬 차분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학생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나름대로 호화스런 감사절을 보내기로 한 것 같았다.
기숙사에서 트리아나 부인의 저택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던 중, 필릭스는 소파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아드리안을 향해 의아한 눈빛을 던졌다.
평소의 아드리안이었다면 진작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감사절을 보내기 위해 공작저로 돌아갔을 터였다. 그런데 그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책장만 천천히 넘기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아드리안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왜?”
“집에 안 갈 거야?”
“음…….”
아드리안은 도리어 소파에 길게 드러누우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기숙사에서 푹 쉴 거야.”
그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아드리안은 자신의 대답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드러누운 자세 그대로 눈까지 감았다.
필릭스는 다른 날도 아닌 추수 감사절에 혼자 있을 동생이 걱정되어 말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 기숙사에 혼자 있어도 되겠어?”
“오늘 같은 날이니 더욱 혼자 있고 싶어.”
이번에도 뜻밖의 대답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형에게 아드리안은 다시 눈을 뜨며 느긋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괜찮다니까?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고 좋아. 오늘 밤엔 네 코 고는 소리도 없을 테니 정말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아. 진정한 휴일이지.”
그의 장난스런 대답에 필릭스도 마지못해 웃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편치 못했다. 며칠 전 그가 화병을 던져 깨뜨린 광경을 목격한 이후로 줄곧 아드리안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럼 어서 다녀와.”
아드리안에게는 미리 다른 친구의 집에 다녀올 것이라 얘기해 두었다. 필릭스가 워낙에 공작저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것을 아는 아드리안은 그 말에 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정문으로 나간 필릭스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루시와 콜린을 만나 마차에 올랐다. 즉시 출발한 마차는 이제 푸른 기운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세차게 달려 나갔다.
마차 안에서 콜린은 역시나 종알거리는 것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이미 몇 차례 겪은 일이었기 때문에 필릭스는 따로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콜린이 정신없이 떠드는 동안 루시와 몰래 눈빛을 주고받는 것도 나름 짜릿한 일이었다. 심지어 필릭스는 콜린이 감사절을 즐기러 나온 인파로 북적이는 창밖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루시의 잔머리를 가만히 귀 뒤로 쓸어 넘겨주기도 했다.
‘춥지 않아?’
‘안 추워요.’
필릭스가 입을 뻐끔거리며 묻는 말에 루시도 가만히 입술을 움직여 대답했다.
필릭스의 시선이 그녀의 무릎에 가지런히 놓인 두 손으로 향했다. 희고 작은 손은 추운 듯 손끝이 빨개져 있었다.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는 콜린을 확인한 뒤, 필릭스가 루시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춥지 않다는 대답과는 달리 루시의 손은 무척이나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