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6화
“루시!”
상대편에서도 곧장 대답이 날아왔다.
트리아나 부인이라고 불린 노부인은 이곳에서 루시를 만날 것이라곤 전혀 상상치 못했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
“세상에! 정말 루시 맞구나.”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을 깜빡이며 몇 번 더 루시의 얼굴을 살핀 후에 트리아나 부인은 앞으로 나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루시 역시 반가운 얼굴로 그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의 반가운 만남 앞에서 사정을 모르는 필릭스와 아르켈은 멀뚱한 얼굴로 서 있었다. 둘의 만남을 지켜보던 아르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알고말고!”
부인이 루시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녀를 티 테이블로 데리고 가 앉혔다. 아르켈의 사무실에는 이미 여러 번 방문해 본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내 조카인 코너 남작의 영지에 살던 아이야. 수년 전에는 같이 여행을 한 적도 있었지. 그 이후론 내가 몸이 아파 집 밖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기고 말았어. 어릴 때도 영특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제노미움에 온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군!”
부인은 여전히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아르켈에게 설명했다.
“그럼 오늘 만나게 해 준다던 아이도……?”
부인이 아르켈을 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블린. 바로 루시 키넌을 말했던 거였어.”
루시와 부인은 오랜만에 만난 것이 정말 반가웠던 모양인지, 주변에 서 있던 필릭스와 아르켈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바빴다.
아르켈은 분주히 움직이며 벽난로에 주전자를 올리더니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고양이 똥조차 치우기 귀찮아하더니 웬일로 성실히 손님을 대접하려는 모양이었다.
“가끔 부인의 소식을 콜린에게 물어봤지만, 콜린도 자세히는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동안 여행을 하기에는 몸이 약해져 수도에만 틀어박혀 있었단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겠더라고. 동부에 방문한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군. 코너 남작과도 서신을 주고받은 지 꽤 되었고. 다들 잘 있지?”
“네, 남작님도 남작 부인께서도 모두 건강하세요.”
그렇게 루시와 트리아나 부인 사이에 몇 마디 더 정다운 대화가 오갔다.
“그런데 아르켈 선생님과 아는 사이이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우린 어릴 적부터 친구였단다.”
“함께 아카데미를 나온 사이지.”
루시의 말에 부인과 아르켈이 차례로 대답해 주었다. 그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필릭스는 의외라는 얼굴로 아르켈을 쳐다보았다. 그에게 친구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고 있자니, 괴팍한 줄 알았지만 은근히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아르켈과 주름진 얼굴 속에서 유쾌한 기운을 내뿜는 트리아나 부인은 꽤나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학생에게 후원을 해 주지 않겠느냐는 아르켈의 부탁에 흔쾌히 수락한 것이란다.”
부인은 그녀의 무뚝뚝한 친구가 용케도 멀쩡히 내어 온 차를 우아한 동작으로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그게 루시 너라니 더 기꺼운 마음이 드는구나.”
“저, 그런데…….”
루시는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몇 주 전에 이미 다른 분으로부터 후원을 받게 되었어요.”
그 말에 주전자를 다시 내려놓던 아르켈이 이마를 긁적이며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번거롭게 해 드려서. 제가 분명 아르켈 선생님께 말씀드렸는데 듣지 못하신 것 같아요.”
“뻔하지, 아르켈이라면. 또 제 말만 버럭버럭 내지르다가 남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한 거겠지.”
부인이 알 만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누구 후원을 받게 된 거지?”
아르켈이 물었다.
“저의 아버지이신 베르크 공작입니다.”
필릭스가 대신 대답하자, 아르켈이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베르크 공작의 후원을? 이거, 내가 나설 일이 아니었군.”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르켈은 ‘베르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신뢰의 눈빛을 띠었다.
“베르크 공작가의 후원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 경제적으로 그만큼 탄탄한 후원자가 이 제국에 또 어디 있겠나.”
아르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부인은 눈을 크게 뜨고 필릭스의 얼굴을 쳐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베르크 공작의 아들이라고요? 그렇다면…….”
“필릭스 베르크 공자야. 이 아카데미의 3학년이지.”
아르켈의 소개에 필릭스가 정중히 인사하자 부인은 그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저는 에버른 후작 부인과 아는 사이기도 하지요. 지금도 몸 상태가 좋은 날이면 후작 부인께서 주최하시는 모임에 나가곤 합니다.”
필릭스의 외할머니인 에버른 후작 부인은 귀족 여성들을 위한 사교 모임을 자주 열고는 했다. 그러다 보니 그도 어릴 적 잠시 후작가에서 머물던 무렵, 연회장에 많은 귀부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곤 했었다.
“어쩌면 에버른 후작가를 방문했을 때 공자님을 만났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트리아나 부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야옹.
그때 사무실 한구석에서 조용히 몸을 말고 있던 고양이가 몸을 일으키며 느긋한 울음소리를 냈다. 네 사람 모두 이야기를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브로토멜리우스!”
아르켈이 황급히 다가가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브로토멜리우스?”
트리아나 부인은 필릭스가 그 이름을 듣고 난 후 지었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그녀는 아르켈이 고양이를 달래듯 배를 살살 긁어 주는 모습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르켈 리오드가 고양이를 끌어안고 쓰다듬는 광경을 보다니, 내가 죽을 때가 다 됐나 보군. 이미 정이 많이 든 것 같은데, 정말 내가 데려가도 되겠어?”
부인의 물음에 아르켈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이깟 고양이 하나 없다고 슬퍼할 것 같아?”
그러더니 당장 부인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와 고양이를 떠넘기듯이 안겨 주었다.
“고양이 하나 떠난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아, 난.”
트리아나 부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양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그럼. 이 고양이는 내가 데려갈게.”
“브로토멜리우스야.”
아르켈이 이름을 정정해 주었지만 트리아나 부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괴짜 같은 이름 말고 귀여운 이름으로 새로 지어 줘야지.”
“벌써 가려고?”
어쩐지 아르켈이 아쉬운 얼굴로 물었다.
“가야지, 그럼.”
트리아나 부인이 짐짓 서두르는 척하며 벗어 두었던 숄을 둘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시도 얼른 따라 일어나 부인을 도와주었다.
이제 고양이도 이 사무실을 떠날 테니, 필릭스와 루시도 더 이상 고양이를 돌보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필릭스는 루시에게 어서 나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을 알아챈 루시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봐. 아르켈.”
인사를 한 후, 세 사람은 묘한 표정의 아르켈을 사무실에 남겨 두고 복도로 나왔다. 필릭스가 문을 닫는 순간, 그 틈 사이로 아르켈의 섭섭한 눈길이 졸졸 따라 나오는 듯했다.
사무실을 나온 세 사람은 함께 일 층 홀로 내려갔다.
“그나저나 루시,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갑다. 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서 명문 아카데미에 왔다니 내가 다 자랑스럽다.”
트리아나 부인은 친손녀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로 루시에게 말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금방 헤어져야 해서 아쉽구나. 다가오는 추수 감사절에 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떠니, 루시?”
부인은 곧 필릭스에게도 말했다.
“물론 공자님도 함께 오셔도 좋고요.”
루시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오랜만에 부인의 저택에 가고 싶어요.”
루시를 퍽 아끼는 부인의 모습을 본 필릭스도 흔쾌히 초청을 받아들였다. 잘하면 부인으로부터 루시의 어릴 적에 대한 얘기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초대를 받으며 홀에 당도했을 즈음.
갑자기 누군가 그들을 소리쳐 부르며 계단을 다급하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기다려!”
바로 아르켈이었다. 그는 노쇠한 다리로 움직이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할 만큼 빠르게 달려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트리아나 부인에게서 곧장 고양이를 빼앗아 들었다.
“브로토멜리우스는 못 데려가.”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를 꼭 안으며 말했다. 세 사람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내가 볼 때 이 녀석은 아무런 능력도 없어! 먹고 싸는 것밖에는 못 한단 말이야. 에블린, 네가 아무리 훈련시켜도 이 녀석은 쥐 한 마리 못 잡을걸.”
그 말을 들은 트리아나 부인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르켈, 넌 어쩜 어릴 때랑 똑같니.”
그녀가 어린 애 타이르듯 말했다.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말해! 애초에 이 고양이 데려갈 생각도 없었어.”
그러더니 미련 없이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녀가 필릭스와 루시에게 말했다.
“그럼 조만간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 드리도록 하지요.”
“무슨 초대장?”
아르켈이 뚱한 얼굴로 물었지만 부인은 가볍게 무시하며 우아한 태도로 홀을 떠났다.
* * *
트리아나 부인의 초대장은 이튿날 곧바로 기숙사에 도착했다.
루시에게 초대장을 받았냐고 확인하던 필릭스는 자신들 외에도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콜린이었다.
물론 필릭스는 그 소식이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콜린이 트리아나 부인의 조카 손주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저 성가시다는 눈으로 쳐다봐 줄 수밖에는.
이 자식만 없으면 완벽한데.
필릭스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초대장의 내용을 한 번 더 읽고 나서는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대장에는 단순히 저녁 식사뿐만이 아니라, 저택에서 하룻밤 묵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트리아나 부인의 권유도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