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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5화 (85/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5화

뭘 어쩌려는 거지?

심술궂은 표정으로 서 있는 아르켈을 보며 필릭스 역시 눈을 가늘게 떴다. 아르켈은 금방이라도 불쌍한 고양이를 향해 부지깽이를 휘두를 것처럼 눈을 희번덕였다.

“어서 데려와!”

루시가 자리에서 요지부동이자 아르켈이 다시 한번 윽박지르듯 말했다. 루시가 고양이를 꼭 끌어안은 채 움찔거렸다.

보다 못한 필릭스가 나서려는데 아르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놈이 추워하잖아! 어서 벽난로 앞으로 데려오라고!”

그 말에 필릭스와 루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등가죽이 얇으니 더 추워하는 것 같군! 여기다 내려놔, 몸이 따뜻해지게!”

아르켈이 벽난로 불빛이 비추고 있는 마룻바닥을 가리켰다. 이어 그는 의자 위에 깔려 있던 자신의 방석을 가져와 그곳에 툭 내려놓았다.

여전히 그의 한 손에 들려 있는 부지깽이를 조마조마한 눈길로 바라보며, 루시는 천천히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머뭇거리던 그녀가 고양이를 푹신해 보이는 방석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고양이는 멀뚱한 얼굴로 잠시 서 있더니 이내 방석 위에 웅크리고 앉았다.

아늑하게 방 안을 데우며 타오르는 벽난로와 방석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고양이.

아르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화롭고 따뜻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고양이가 얌전히 자신이 깔아 준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아르켈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고양이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루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르켈은 순식간에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내쫓아야지!”

그러더니 그는 벽난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부지깽이로 장작을 쑤셨다. 순식간에 불씨가 튀어 오르며 장작은 더 크게 타올랐다. 벽난로 앞이 더욱 따뜻해졌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습에 필릭스는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아르켈이 딱히 고양이에게 해코지할 것 같지도 않았고, 루시와의 용건도 끝난 것 같았으니 이제 사무실을 나가도 될 것 같았다.

필릭스는 고양이를 들여다보고 있는 아르켈을 향해 말했다.

“그럼 저흰 나가 보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아르켈이 황급히 붙잡았다.

“그냥 가면 어떡해! 난 고양이가 뭘 먹는지 모른단 말이다. 가서 이놈이 먹을 것 좀 구해 와.”

“예? 저희가요?”

아르켈이 ‘그럼 내가 가리?’ 하는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식당에 가서 구해 와 봐.”

“지금은 식사 준비 시간일 텐데요. 가 봤자 린다 아주머니가 아무것도 주시지 않을…….”

“넌 학생회장이잖아! 가서 사정이라도 해 봐.”

“전 아드리안이 아니라 필릭스입니다만.”

“알 게 뭐야!”

아르켈은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그는 이번 한 번이 아니라, 당분간 계속 그들이 고양이를 위해 밥을 챙겨 줄 것을 요구했다. 한마디로 자신은 고양이를 귀여워만 할 테니 돌보는 건 너희가 하라는 심산이었다.

필릭스는 골치가 아파 왔다.

갑자기 불려 와서 고양이를 구출해 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고양이 뒤치다꺼리까지 하라고?

“왜 저희 둘이 귀찮게 고양이를 돌봐야 하는…….”

그런데 불만을 늘어놓으려던 필릭스가 말을 뚝 멈췄다.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시와 단둘이 고양이 돌보기?

장소가 상당히 꺼림칙하긴 했지만, 좋은 기회가 아닌가.

“좋아요.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필릭스가 돌연 태도를 바꿔 대답했다.

“네?”

그의 대답에 루시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필릭스는 뻔뻔한 얼굴로 아르켈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대신 언제든 고양이를 챙겨 줄 수 있도록 사무실 열쇠를 주세요.”

* * *

도서부에 가입하려던 계획을 실패한 뒤, 루시와 함께 있을 다른 방법을 생각하던 필릭스는 아르켈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물론 그 장소가 아르켈의 사무실이라는 게 좀 불쾌하긴 했지만, 루시의 존재가 그의 악한 기운들을 모두 물리쳐 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르켈은 수업을 하느라 사무실을 비우는 때가 많았으므로, 그때만 골라 오면 루시와 오붓한 시간을 원 없이 보낼 수 있어 좋았다.

“고양이 이름은 뭐로 지어야 할까?”

“이름이요?”

점심시간, 식당에서 얻어 온 생선을 고양이 앞에 놓아 주며 필릭스가 물었다.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루시는 생각에 빠졌다.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기를 한참,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지 그녀는 필릭스에게 작명 기회를 넘겨 버렸다.

“떠오르는 이름이 없어요. 동물을 키워 보고 싶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선배는 어떤 이름이 괜찮다고 생각해요?”

사실 필릭스도 생각해 놓은 이름은 없었다.

“음……. 그럼 비비는 어때?”

그가 그냥 떠오르는 아무 이름을 말했다. 그건 공작저에서 키우는 사냥개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필릭스가 제안한 이름을 듣더니 루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선배네 집 개 이름이잖아요.”

필릭스는 깜짝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자 루시는 순간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어…… 선배가 언제 얘기하지 않았어요? 음, 언제더라…….”

루시는 변명하듯 눈알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루시에게 우리 집 개에 대해 말했었던가?

필릭스가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듯 허공을 바라보자, 루시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럼 루루는 어때요?”

상당히 급조해 만든 이름 같아 보였지만 필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루? 좋은 이름이네.”

루시가 생각해 낸 이름이라 그런지 꽤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르켈이 나타났다. 그는 수업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뛰어온 듯 허연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왔다.

“브로토멜리우스!”

그가 고양이를 향해 외쳤다.

브로토멜리우스?

그 거창하고 쓸데없이 고풍스러운 이름에 필릭스가 기막힌 표정으로 아르켈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고양이에게 루루라는 깜찍한 이름을 붙여 준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르켈은 돌아오자마자 고양이의 상태부터 살피고 나섰다.

“브로토멜리우스의 밥은 잘 챙겨 주었나?”

그가 엄한 목소리로 다그치듯 물었다. 자긴 똥 한 번 치운 적 없으면서 뻔뻔스럽게.

아르켈 대신 고양이를 돌본 것이 벌써 삼 일째였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대신 돌봐 줄 수도 없었다. 그들도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매일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것도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자신이야 그렇다 치지만 루시는 공부도 해야 하고 도서관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결심한 필릭스가 아르켈에게 운을 뗐다.

“이 고양이, 계속 키울 작정이세요?”

“무슨 소리야! 내보내야지!”

저 소리만 벌써 수십 번째였다. 이제 고양이는 완전히 아르켈의 사무실을 제집으로 인식한 듯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내가 고작 고양이 하나 못 내보낼 것 같냐고!”

필릭스의 불만 가득한 표정을 본 아르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돌연 고개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더니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내가 아는 귀부인이 데려가기로 했다. 마침 쥐잡이 고양이를 얻고 싶어 했거든. 오늘은 진짜로 보낼 거야.”

그 말을 하는 아르켈의 표정은 무척이나 섭섭해 보였다.

“귀부인이 직접 여기로 오신다고요? 오늘요?”

“그래.”

필릭스는 아르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순간을 그냥 넘기기 위한 변명처럼 들렸다.

“하지만 고작 쥐잡이 고양이 한 마리 데리러 귀부인이 여기까지 방문하실 리가…….”

필릭스의 말에 아르켈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귀부인은 키넌을 보러 오는 거야. 그리고 겸사겸사 고양이를 데려가기로 한 거지.”

그 말에 이번에는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저를요?”

“그래, 키넌! 너!”

아르켈이 호통을 치듯 말했다.

“내가 저번에 분명 말했잖아. 너한테 후원자를 구해 주기로!”

“아니, 그때 제가 분명…….”

그러나 아르켈은 루시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제 말만 하기 바빴다.

“그래서 내가 그 부인께 오늘 와 달라고 했다. 그 부인이라면 네가 졸업할 때까지 후원해 줄 수 있을 거야!”

아무래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루시는 곤란한 얼굴로 아르켈을 보다가 이내 제대로 설명해야겠다는 얼굴로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똑똑.

그러나 루시가 입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 벌써 왔나 보군.”

아르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어서 들어오시오.”

그가 문을 열며 문가에 서 있던 귀부인에게 말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귀부인은 아르켈만큼이나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꼿꼿하게 펴고 선 자세에서 여전히 건재한 위엄과 힘이 느껴졌다.

이거 복잡하게 됐네.

필릭스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골치가 아파 왔다. 그는 같은 마음이겠지, 하며 루시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루시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놀란 얼굴로 귀부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그 귀부인 역시 루시를 보자마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이어 루시가 입을 열어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트리아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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