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4화
아르켈이 빽 소리를 질러 대자 필릭스는 하는 수 없이 창턱 위로 뛰어올랐다. 아무래도 고양이를 빨리 구해 내고 이 사무실을 떠나는 게 상책인 것 같았다.
그런데 무언가 뒤에서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났다. 뒤돌아보니 루시가 기겁을 하며 그의 재킷 자락을 쥐고 있었다.
“또 뛰어내리시게요?”
당황한 얼굴로 묻는 루시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걱정 마. 난 안 다쳐.”
필릭스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전에 여학생 기숙사에서 뛰어내렸을 때도 그는 멀쩡했다.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도 루시는 안심하지 못한 얼굴로 옷자락을 계속 쥐고 있었다.
“지붕에서 미끄러져 떨어지면 어떡해요?”
“안 떨어지도록 조심할게.”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아르켈의 책상으로 가더니 그 위에 놓여 있던 가죽 장갑 하나를 챙겨 돌아왔다.
“이거 끼세요. 고양이한테 물릴 수도 있으니까요.”
“키넌! 그건 내 장갑이야!”
아르켈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소리쳤지만 루시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억지로 쥐여 준 장갑을 들고 필릭스는 이 층 지붕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부드러운 착지였다.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는 위험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삼 층에서 이 층 지붕으로 뛰어내린 것이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위험한 높이는 아니었다. 필릭스가 까치발을 들고 서면 창문 너머로 아르켈의 사무실 내부가 보일 정도였으니.
필릭스는 아르켈과 둘이 남은 루시가 걱정되어 안을 슬쩍 엿보았다.
난 고양이 때문이라 치고 대체 루시는 왜 부른 거지? 정말로 시험에서 고작 두 문제 틀린 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
필릭스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아르켈이 루시를 향해 말했다.
“자넨 어서 이리 와 앉아.”
그는 한쪽 구석에 마련된 티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냥 평범한 테이블이었지만 어쩐지 아르켈의 사무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가구였다.
그가 대체 누구와 하하호호 웃으며 차를 마실 수 있단 말인가.
루시는 긴장한 얼굴로 마지못해 티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아르켈이 집무용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다시 티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가 가져온 것은 알록달록한 사탕이 가득 들어 있는 유리병이었다.
아르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에 루시가 어리둥절해하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곧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생각을 필릭스는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사탕 모양의 독약인가?’
아르켈은 그런 그녀에게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자, 먹어.”
“예?”
“귀가 먹었나! 어서 먹으라고!”
아르켈이 신경질적으로 사탕이 든 유리병을 루시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사탕이 달그락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당황한 루시가 두 손으로 병을 받아 들었다.
“네, 네.”
“그리고 이것도!”
아르켈은 대체 왜 가지고 있는지 모를 어린이용 과자와 초콜릿까지 가져와 테이블 위로 쏟아부었다. 그러더니 루시가 과자를 뜯어 입 안에 넣는 것까지 확인해 보겠다는 듯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진짜 독약 아냐?
조심스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릭스의 머릿속에도 의아한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루시도 여전히 그런 의심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무척 수상쩍다는 눈길로 과자를 살폈다. 그러나 앞에서 아르켈이 눈도 떼지 않고 보고 있었기에 이윽고 그녀는 과자 하나를 뜯어 조심스럽게 귀퉁이를 깨물었다.
인상을 찡그릴 것이라는 필릭스의 예상과는 달리, 과자를 입에 넣은 루시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아니, 그녀는 놀란 얼굴로 과자를 내려다보더니 마저 입 안에 넣었다.
“어때! 부드럽고 달콤하지!”
아르켈이 질문인지 호통인지 모를 말을 소리치자, 루시는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닌 듯 그녀는 머뭇거리며 과자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루시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확인한 아르켈이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필릭스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르켈이 루시에게 괴팍하게 구는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둘에게서 눈을 떼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곧 그는 벽과 지붕 사이에서 작은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구멍 안을 들여다보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한 쌍의 호박색 눈이 보였다. 그 눈의 주인은 필릭스를 보더니 후다닥 깊은 곳으로 도망가 버렸다.
아무래도 저 고양이를 꺼내려면 애 좀 먹을 성싶었다.
그때 열어 놓은 창문으로부터 아르켈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덕분에 필릭스는 지붕 위에 엎드려 구멍 안을 들여다보면서도 아르켈과 루시가 나누는 대화를 놓치지 않고 엿들을 수 있었다.
“……이번 자네 성적 말인데.”
아르켈은 본격적으로 루시를 부른 용건에 대해 말하려는 듯 보였다. 우려한 대로 그는 루시의 성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마지막 문제의 답은 아예 제대로 쓰지도 못했더군?”
아르켈이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정확하게 답을 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 심지어 이번에 1등을 한 로먼 녀석까지도 말이야. 난 자네가 만족스러운 답을 써 주리라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텅 빈 답지를 보니 아주 실망스럽더군. 문제가 어려웠나?”
“그게…….”
갑작스럽게 시작된 아르켈의 취조 같은 물음에 루시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직접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필릭스는 다급한 마음으로 구멍 안을 살폈다. 어서 고양이와 루시를 구해 이 사무실에서 나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뭐, 한 번쯤 실수는 할 수 있어. 4등이라……. 그래, 많이 미끄러진 건 아니지. 다음번엔 다시 1등까지 끌어올릴 수 있겠지?”
아르켈의 질문에 루시가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작아 무어라 대답을 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거라고 필릭스는 짐작했다.
“좋아. 역사 학회는 안 그래도 평민들이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야. 하지만 아예 사례가 없지는 않으니까. 자네 정도라면 분명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좋은 성적만 유지한다면 말이지.”
그런데 대화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학회라뇨?”
루시 역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자네가 졸업을 하는 동시에 베로스 역사 학회의 신입 회원으로 추천할까 하네. 아마 훌륭한 역사학자로서 많은 것을 연구하고 배울 수 있을 거야.”
“자, 잠시만요!”
“얼른 먹어!”
아르켈이 루시의 말을 가로막으며 과자 그릇을 앞으로 밀어 주는 소리가 들렸다. 루시가 방금 들은 말에 대해 따져 묻기도 전에 그는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장학금을 받으며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다음 학기 장학금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르켈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루시에 대해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설마하니 장학금 얘기까지 꺼낼 줄은 필릭스조차 상상도 하지 못했다.
“2등도 아니고 4등을 했으니, 이대로라면 다음 학기 장학금은 무리가 아닌가? 분명 에릭 로먼에게로 돌아가겠지!”
그 말을 들으며 필릭스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장갑을 낀 손끝에 말캉한 것이 와 닿았다. 고양이였다.
그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고양이는 마침내 한 구석에 바짝 몸을 붙이고 웅크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필릭스가 다시 구멍 속으로 깊게 손을 넣어 마침내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혹시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아카데미를 계속 다니기 어렵다거나 그런 궁색한 형편은 아닌가?”
아르켈이 또 질문을 던졌다. 그는 상대에 대해 관심이 있어야만 할 수 있을법한 세심한 질문을,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말투로 하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건…….”
“만약 그렇다면 하루빨리 후원자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 직접 구하기 어렵다면 내가 아는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 있네!”
망할 영감탱이. 일찍도 말한다.
필릭스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천천히 구멍 속에서 팔을 빼냈다. 그러자 어리둥절한 표정의 고양이가 곧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의 털 색깔이 노란빛이라는 것을 몇 초가 흐른 뒤에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시커멓게 때가 탄 고양이였다. 구멍 안에서 이리저리 손을 피할 때와는 다르게, 밖으로 나온 고양이는 얌전하고 순해 보였다.
필릭스가 한 손에는 고양이를 안은 채 다른 손으로는 창턱을 짚고서 위로 가뿐히 뛰어올랐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미 후원을 받고 있어서요…….”
아르켈의 말에 대답해 주던 루시가 필릭스의 기척을 느끼고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 들린 고양이를 본 루시와 아르켈이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한 사람은 금세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에게로 다가왔고, 다른 한 사람은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뒷짐을 진 채 고양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시는 얌전히 필릭스의 손에 들려 있는 고양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어느새 루시의 품으로 옮겨 간 고양이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야옹” 하고 울었다.
루시가 살살 목을 긁어 주자 고양이가 골골 소리를 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삐쩍 말랐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르켈이 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뼈밖에 안 남았어! 쥐새끼처럼 숨어서 남의 잠이나 방해하고 밤새도록 울기만 하니까 그렇지!”
그는 갑자기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더니, 벽에 세워 둔 부지깽이를 집어 들고 바닥을 쿵쿵 쳤다.
“당장 이리로 데려와!”
그 거친 태도에 고양이를 안은 루시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