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3화
출입문 밖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필릭스는 저절로 숨을 삼켰다. 꽃병이 벽에 부딪혀 깨지던 날카로운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메아리치는 듯했다.
내가 아는…… 아드리안이 맞는 건가.
그는 눈앞이 흐릿해진 사람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여러 번 감았다가 떠 보아도 여전히 서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저 사람은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맞았다.
필릭스처럼 다른 도서부원들도 적잖이 놀란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정적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하던 아드리안의 표정이 점점 풀어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시 뒤, 손바닥 뒤에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평소와 같은 점잖은 분위기가 다시 떠올라 있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부원들을 향해 아드리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미안. 다들 놀랐지?”
그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는 태연히 발을 떼며 덧붙이듯 말했다.
“꽃병은 놔둬. 내가 치울 테니까.”
“제,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노엘이 청소 도구를 가지러 가는 아드리안의 뒤를 쫓았다. 아드리안이 창고 쪽으로 사라지자마자 콜린은 인상을 찌푸리며 앨런 그로스를 돌아보았다.
“선배,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 점잖은 아드리안 선배가 꽃병까지 집어 던지게 만들다니!”
“뭐? 이게 내 잘못이란 말이야?”
앨런이 마찬가지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콜린에게 응수했다. 도서관 안은 또 한 번 시끄러워질 위기에 처했다.
“다들 그만해요!”
아드리안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루시가 소리쳤다.
“이만하면 됐잖아요. 앨런 선배, 이번 문집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건 선배 자유지만 괜한 추측으로 분란까지 일으키진 마세요. 할 말이 있으면 결정을 내린 피터 선생님께 직접 가서 말씀하시란 말이에요. 아니면 제가 대신 전해 드릴까요?”
루시의 말에 앨런이 입을 다물었다. 아드리안이 저렇게까지 화를 낸 마당에, 피터 선생까지 개입하면 자신이 난처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는 삐딱한 표정으로 자신을 몰아붙인 도서부원들을 쏘아보더니 그대로 도서관을 나왔다. 출입문 앞에 서 있던 필릭스와도 마주쳤지만, 그는 움찔하며 놀라더니 그대로 도망치듯 뛰어가 버렸다.
잠시 후, 빗자루를 들고 돌아온 아드리안과 노엘이 산산조각 난 꽃병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나머지 부원들도 주변을 어슬렁대며 도우려는 시늉을 했다.
필릭스는 자신도 들어가서 아드리안의 상태를 살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이내 관두었다.
어쩐지 그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화를 내 버린 모습을 자신에게 그다지 보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번에는 필릭스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자 도서부원들은 놀랐던 마음을 가다듬고 아드리안의 행동을 이해해 주기 시작했다.
“그래도 용케 얼굴에는 집어 던지지 않으셨네요! 저였다면 얼굴에 명중시켰을 텐데!”
참새처럼 조잘거리는 콜린의 말소리를 뒤로하며 필릭스는 발길을 돌렸다.
* * *
예상대로 아드리안은 방으로 돌아와서도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필릭스 역시 도서관에 갔다가 그런 광경을 보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다.
아무리 아드리안이 아카데미를 대표하는 모범생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한사람에 불과했다. 그것도 이제 막 성인의 경계선에 발을 걸치려 하는.
그의 인내심도 무한한 게 아니었다. 한 번쯤은 터졌을 만한 일이었단 생각이 들자, 필릭스는 아드리안이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아드리안을 걱정하는 건 필릭스뿐만이 아닌 듯했다.
다음 날,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필릭스에게 루시가 가만히 다가와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오늘 아드리안 선배 괜찮던가요?”
그녀가 주저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어제 도서부에서 다툼이 좀 있었거든요. 아드리안 선배가 말리시다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글쎄……. 별다른 점은 못 느꼈어.”
필릭스의 대답에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에는 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복도를 떠나려 했다.
“거기, 잠깐!”
그때, 복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릭스와 루시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노인 하나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역사 담당 선생인 아르켈이었다.
필릭스와 루시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우연히라도 아르켈의 눈에 띄게 된 것은 좋은 징조라고 보기 어려웠다. 저 괴팍한 선생은 평소에도 학생들을 불러다가 면박을 주거나 낮은 성적에 대해 비웃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의 사무실에 잡혀 들어갔다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나온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혼내시려는 건가 봐요.”
갑자기 루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필릭스가 돌아보자 그녀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어두워져 있었다. 몸은 마네킹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갔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역사 시험을 두 문제나 틀려 버렸거든요…….”
루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르켈은 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이쪽을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이제 꼼짝없이 그의 사무실로 불려 가게 됐다고 생각했는지 루시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베르크!”
아르켈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소리쳐 부른 것은 바로 필릭스였다. 그는 필릭스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얼른 가까이 오라는 손짓이었다.
“넌 어서 가 봐.”
필릭스가 루시에게 말했다. 괜히 너까지 휘말리기 전에 어서 자리를 벗어나라는 뜻이었다.
“키넌!”
그러나 루시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아르켈의 불호령 같은 외침이 또 한 번 날아들었다.
루시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돌아보자 아르켈이 방금 전과 똑같이 손을 까딱였다. 그러더니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자신의 사무실 문을 천천히 열어젖혔다.
전혀 반갑지 않은 초대였다.
루시와 필릭스가 멀뚱히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자, 아르켈이 눈을 부라렸다. 냉큼 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루시와 필릭스는 아르켈의 사무실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갔다.
그 앞에 가 서자, 열린 문 사이로 아르켈의 사무실 풍경이 슬쩍 보였다.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과 의자, 책장 등. 여느 선생들의 사무실 풍경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주인이 아르켈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쩐지 음침하고 사악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아르켈은 곧장 필릭스와 루시를 사무실 안으로 떠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철장 안으로 죄수들을 밀어 넣는 간수 같아 보였다.
아르켈의 사무실은 그란 사람을 입체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만 같았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반질거리는 마룻바닥과 얼룩 하나 없는 벽지.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책상.
심지어 책장의 책들은 단순히 그 종류에 따라 분류된 것이 아니라 비슷한 크기와 모양대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 이상한 기준이 엿보이는 정리벽에 필릭스는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시선을 애써 돌린 곳에는 그 어느 것보다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바로 아르켈이 채점하다 놔둔 학생들의 과제였다.
거의 대부분의 과제 위에는 붉은색으로 X자가 가차 없이 그어져 있었다. 정말이지 섬뜩한 광경이었다.
문을 닫고 들어온 아르켈이 눈을 번뜩이며 필릭스와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는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한 사람처럼 눈 밑이 거뭇했다. 그 때문인지 더욱 예민하고 험상궂어 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신…….”
필릭스가 입을 열어 질문을 하려는 순간, 아르켈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방 안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잘 들어 봐. 이 소리…….”
그의 진지한 표정에 필릭스와 루시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이러는 걸까, 하는 마음으로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정말로 어디선가 수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고양이 소리 아닌가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묘한 울음소리에 필릭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 맞아! 저 소리 때문에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어!”
별안간 아르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역성을 냈다.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는 것 같은 바로 그 소리는 열어 둔 창밖에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창가 쪽을 향해 언짢은 눈빛을 던진 아르켈이 곧 필릭스에게 말했다.
“자네가 저 악마 좀 처리해 줘야겠네!”
별안간 황당한 부탁을 하며 아르켈이 창가를 손가락질했다.
“처리하라뇨?”
“말 그대로야! 쫓아내든, 잡아서 데려가든, 자네가 알아서 하란 말이야!”
아르켈은 막무가내로 명령을 내렸고 필릭스는 그의 닦달에 하는 수 없이 창가로 걸어갔다.
“저…… 그냥 관리인을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루시가 황급히 필릭스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아르켈에게 말했다.
“여긴 삼 층인데요? 필릭스 선배라고 해서 뭘 어떡하겠어요?”
“밑에 지붕이 있어서 괜찮아!”
아르켈이 뻔뻔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 말에 불안한 표정의 루시가 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필릭스도 그 옆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정말로 좁은 이 층 지붕 위로 사람이 충분히 딛고 내려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보였다.
그때 창문 아래서 또 한 번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번에 아르켈의 표정이 바뀌며 다시금 필릭스를 재촉했다.
“이까짓 높이가 뭐가 겁나나! 자네는 아직 팔팔한 나이니 여기서 떨어진다고 해서 죽진 않아! 하지만 늙은 난 오늘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