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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2화 (82/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2화

필릭스는 잠시 멍해졌다. 아드리안의 질문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 하려는 거냐고? 그게 무슨 말이지?

그는 머리를 굴리며 고민했다.

그런 형을 진지한 얼굴로 보고 있던 아드리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필릭스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농담이야, 필릭스.”

아드리안은 금세 평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우린 쌍둥이잖아. 안 그래도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하는데 최근에는 점점 더 똑같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해 본 말이야. 시험에서도 같은 점수를 받아 동시에 일등을 했고. 네가 도서부까지 가입하면 우린 정말 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라.”

“그럴 리가.”

필릭스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할 때마다 언제나 핀잔을 주기 바쁘던 동생이 이런 실없는 농담을 하다니.

“내가 암만 너처럼 행동해도 난 나야. 넌 너고. 우리가 아무리 닮았대도 완전히 똑같아질 순 없어.”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진지한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그런가.”

아드리안은 눈을 허공으로 돌리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하긴, 우리가 정말로 속까지 똑같았다면 쌍둥이도 아니었겠지. 애초에 완전한 하나로 태어났을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드리안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 목소리가 왠지 묘하게 느껴져 필릭스는 아드리안의 얼굴을 살피려 했지만, 찻잔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 * *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함께 자라 온 아드리안은 필릭스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릭스는 가끔 자신의 반쪽과도 같은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처음으로 필릭스는 자신이 아드리안의 모든 면을 알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 끝에, 그는 도서부에 가입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루시와 만나는 건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될 테니까.

제일 큰 이유는 아드리안 때문이었다. 분명 농담이라고는 했지만 어쩐지 씁쓸해 보이던 그의 표정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대신에 필릭스는 마지막으로 도서부 문집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 난리를 벌여 놓고 갑자기 나타나지 않으면 루시가 어리둥절해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앨런 그로스가 또 그녀에게 딴지를 걸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괜한 우려였다. 이번 회의에는 문학 담당인 피터 선생도 참석했기 때문이다.

이전 회의에서 원고료를 주자는 의견을 내고 앨런에게 핀잔을 들은 뒤, 루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낸 것 같았다.

그건 바로 문집에 글이 실리는 학생들에게 한하여 문학 가산점을 주자는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다!”

피터 선생은 그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심지어 그는 더 나아가 제노미움 문학상을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왜 다른 아카데미에는 다 있는 교내 문학상이 제노미움에는 없는 건지 모르겠다! 노래 대회, 무용 대회는 있는데 말이야!”

그는 진심으로 열을 내며 안타까워했다. 심지어 그가 도서부원들에게 아예 문학상을 주최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은근히 묻는 바람에 아드리안은 말을 돌리느라 무진 애를 썼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상황에 그런 것까지 떠맡았다간 도서부원들은 일에 치여 죽게 될지도 모른다.

문학상에 대한 집착을 좀처럼 놓지 못하는 피터 선생을 설득해, 결국 그에게 제일 잘 쓴 글을 뽑도록 하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그리고 그 학생에게는 두 배의 문학 가산점은 물론, 문집 첫 페이지에 글이 실리는 특전을 주기로 했다.

가산점을 주는 건 좋은 생각 같았다. 대체로 성적을 신경 쓰는 아카데미 학생들은 원고료에는 코웃음을 칠지 몰라도 문학 가산점은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회의는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났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부원들 모두가 표정이 좋아 보였다. 필릭스의 맞은편에 앉은 루시도 마찬가지로 후련한 얼굴이었다.

필릭스는 발을 살짝 뻗어 그녀의 발을 툭툭 건드렸다. 몰래 잘했다고 눈빛이라도 보내 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루시는 자신의 신호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필릭스는 한 번 루시의 발을 건드렸다. 그래도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선배.”

그때 루시 옆에 앉아 있던 노엘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불렀다.

“그거 제 발인데요.”

영문을 모르는 다른 부원들이 무슨 말인가 싶어 노엘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노엘을 바라보는 필릭스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노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는 필릭스만큼이나 소름이 끼친다는 표정을 하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필릭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발을 여기까지 뻗고 난리야! 안 오므려?”

“참나, 선배가 오므리면 되잖아요!”

그들의 투닥거리는 대화가 테이블 위를 오갔다. 말다툼은 아드리안이 눈치를 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며칠 후, 필릭스는 루시에게서 문집 하나를 충분히 채울 정도의 원고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피터 선생이 제일 잘 썼다고 뽑은 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콜린 코너였다.

놀랍지도 않았다. 문학의 밤 이후, 콜린이 자작시를 써서 낭송한 일은 아주 유명했고, 그 시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루시는 제일 친한 친구의 시가 자신이 만든 문집의 제일 앞 페이지에 실리게 되자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필릭스도 기분이 좋았다. 루시가 좋다면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으니.

그날 저녁, 폐관 시간이 다가올 무렵에 필릭스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제 문집 만드는 일도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루시도 바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공부를 모두 끝낸 학생들이 도서관을 나오고 있었다. 지금쯤 도서부 학생들은 남은 반납 도서를 정리하며 일을 마무리 짓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도서관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안에서는 평소와는 달리 시끄러운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앨런 그로스의 짜증 가득한 말소리였다.

“하지만 아드리안! 문집의 제일 첫 페이지는 3학년 도서부장의 시로 시작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그건 우리 도서부 선배님들도 오랫동안 지켜 온 규칙이었다고!”

“그렇긴 하지만, 그건 하나의 관례일 뿐이야. 이제 그걸 깨뜨려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

앨런의 말에 이어진 건 아드리안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는 정중하지만 냉정한 말투로 흥분한 앨런을 차분히 설득하고 있었다.

필릭스는 출입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앨런과 아드리안 말고도 다른 도서부원들이 한데 모여 서 있었다.

듣자 하니 앨런 그로스의 불만은 이것이었다.

원래 시를 싣는 순서는 3학년, 2학년, 그리고 1학년 순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문집에서는 피터 선생이 뽑은 콜린의 시가 제일 앞으로 가게 된 것이다.

앨런은 이 점을 아주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도서부도 아닌 콜린의 시가 도서부원들의 시보다 더 앞 페이지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매우 자존심 상해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3학년 도서부장인 아드리안의 시가 제일 앞장에 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그는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루시와 콜린에게로 몸을 돌렸다.

“솔직히 이상해!”

그가 둘을 쏘아보며 말했다.

“문학 가산점을 걸고 원고를 받자는 의견을 낸 게 키넌인데, 하필 제일 잘 쓴 원고로 뽑힌 사람도 키넌과 제일 친한 코너다?”

앨런은 그야말로 억지를 부리며 이번에는 루시와 콜린을 공격하고 있었다.

“루시 키넌이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문학 가산점 얘기를 꺼낸 거 아냐? 솔직히 콜린 코너가 제일 잘 쓸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잖아!”

루시는 황당한 얼굴로 그에게 응수했다.

“선배! 콜린의 시를 제일 잘 쓴 글로 뽑은 건 제가 아니라 피터 선생님이에요!”

루시의 친구 제미마도 분개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억지 좀 작작 부리세요! 글 순서 바꾸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자꾸 트집을 잡으시는 거예요?”

제미마의 말에 이어 이번엔 다른 도서부원들까지 한마디씩 보태고 나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앨런을 질린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도서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앨런은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듣지도 않고 제가 가진 불만을 쏟아 내기 바빴다.

“그만!”

제지하려는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도서관은 서로 언성을 높여 싸우는 시끌벅적한 소리로 가득 차 있어, 그의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넌 들어온 이후로 쭉 선배 의견은 무시하고 네 독단으로만 행동하고 있잖아!”

“선배가 할 말은 아니죠! 매번 후배들만 골라서 괴롭히고 분란을 일으키는 게 누군데 그래요?”

도무지 소란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때.

쨍!

어디선가 날아온 꽃병이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꽃병 조각에 학생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모두들 꽃병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드리안이 싸늘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도서관 안에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감히 입을 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만들 하라고 했지.”

아드리안의 입에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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