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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1화 (81/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1화

앨런이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한껏 찌푸린 얼굴로 짜증을 내려던 그는, 발의 주인이 필릭스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의 코에서 힘없는 콧김만 픽픽 뿜어져 나왔다.

뒤따라 나오려 서 있던 도서부원들이 철퍼덕 엎어져 있는 앨런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리며 몰래 웃었다.

“미안.”

진심이 전혀 담기지 않은 것 같은 필릭스의 사과 앞에서 혼자 창피해하던 앨런은 벌떡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옷을 툭툭 털었다.

후배들 앞에서 대놓고 핀잔을 줄 때는 언제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복도를 떠났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그의 귀 끝은 여전히 붉기만 했다.

감히 루시의 기를 꺾으려 한 데 대한 복수다.

앨런이 황급히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필릭스가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루시가 사람들 몰래 잡아끌었다. 필릭스는 나풀거리는 종이 인형처럼 그녀의 손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루시는 그를 데리고 비어 있던 옆 교실로 들어갔다.

“쟨 원래 저렇게 불평, 불만이 많아? 너한테 유독 더 그러는 것 같더라.”

문을 닫자마자 필릭스가 물었다. 루시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대답했다.

“저 선배는 모든 후배들한테 그래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녀는 필릭스가 앨런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일을 넌지시 언급하며 말했다. 필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앞으론 안 그럴게.”

그러나 그의 고분고분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무언가 의심하는 듯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정말이에요? 정말 도서부에 들 생각이에요?”

“걱정하지 마. 사람들 눈에 띄는 행동은 절대 안 할 거야.”

그냥 네 옆에서 널 지켜만 볼게.

그는 뒷말을 숨기며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이번에도 루시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그가 도서부에 가입하려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 모양이었다.

“아마 다른 애들은 내가 아드리안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생각할걸? 아드리안이 워낙 바쁘잖아. 그래서 내가 도우러 왔다고만 생각할 거야.”

그는 루시가 단호하게 오지 말라고 말할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

“네가 원한다면 너한테는 말도 안 걸게. 쳐다보지도 않을게.”

확실하게 장담은 못 하겠지만.

필릭스의 섣부른 장담에 루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그렇지?”

필릭스의 표정이 금방 환해졌다.

“역시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지? 그래, 그럼 도서부 활동 같이 잘해 보자.”

그가 뻔뻔하게 악수하자는 손을 내밀었다. 루시는 기가 찬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냉정했다.

“아드리안 선배 말, 잊은 거 아니죠? 선배 아직 도서부 회원 아니에요. 오늘 회의도 억지로 참석한 거잖아요.”

이렇든, 저렇든 필릭스에게는 상관이 없었다. 그의 목적은 그저 최대한 루시와 함께 있는 시간을 얻는 것뿐이었으니.

“뭐, 명예 회원도 나쁘지 않지.”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루시!”

그때, 문밖에서 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복도를 돌아다니며 루시를 찾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저 다음 수업이 있어요.”

“그래, 어서 가 봐.”

만약을 위해서 필릭스는 루시를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게 했다. 누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본다면 또 무슨 소문을 퍼트릴지 모를 일이니까.

그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가 교실을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 밖에 서 있다가 그가 나오자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바로 노엘이었다.

그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식물원에서 하는 거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선배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네요.”

은근히 건들거리는 듯한 태도에 필릭스는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이놈은 언제나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더군다나 루시에게 기사의 꽃을 바쳤다는 생거짓말로 한밤중에 여학생 기숙사로 달려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 일로 몇 대 쥐어박아 주기까지 했는데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당당한 모습이 기가 찰 지경이었다.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데요, 루시 선배를? 들어나 봅시다.”

뜬금없이 나타나 마치 루시의 친정 식구같이 굴며 질문하는 그 모습에 필릭스는 도리어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가 뭔데 상관이야?”

“사실 전 아직 이 만남, 허락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네가 뭔데.”

“루시 선배는 제가 정말 아끼는 선배라고요. 우리 형이 정신만 멀쩡했어도 적극적으로 밀어 줬을 텐데.”

노엘은 자신도 참견할 자격이 있다는 듯이 팔짱을 끼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내뱉었다.

“전 루시 선배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직접 다른 신랑감이라도 찾아 주려고?”

필릭스의 말에 노엘은 처음으로 놀라며 입을 떡 벌렸다.

“설마……! 루시 선배랑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자식아. 이미 머릿속에선 애가 셋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필릭스는 노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이미 필릭스도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기도 했다.

“저도 루시 선배가 괜찮은 집안에 시집가서 편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선배 집안은 좀…… 과하잖아요? 선배네 집에 들어가면 루시 선배가 고생할 게 눈에 훤히 보인다고요.”

노엘이 눈치를 보다가 슬쩍 덧붙였다.

“그렇다고 선배가 눈치가 있기를 해, 표현을 잘하기를 해…….”

그는 말하면서도 불시에 날아올 필릭스의 발을 미리 피할 생각으로 잽싸게 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필릭스는 그저 생각에 빠진 얼굴로 노엘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 자식 눈에도 그게 보일 정도란 말이지?

노엘이 한 얘기는 주제넘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눈치가 없었던 것. 표현을 못 했던 것. 필릭스조차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네가 굳이 말 안 해 줘도 알아.”

“……안다니…… 다행이네요?”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던 필릭스가 순순히 인정하자 미리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노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선배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저도 더 이상 말 얹지 않을게요. 두 분이서 잘 알아서 하시겠죠.”

“이제까지 참견할 만큼 해 놓고 무슨 소리야.”

필릭스가 식물원에서의 일과 기사의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며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그건 두 사람이 너무 답답해서 그랬죠. 뭐 앞으로 혼자 잘해 보세요.”

그 말을 끝으로 노엘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사람 속만 뒤집어 놓고 가네.”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 * *

노엘과의 대화는 왠지 필릭스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서 기숙사로 돌아가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소파에는 아드리안이 또 한 명의 시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필릭스, 잠깐 얘기 좀 할까.”

한번 잔소리를 시작하면 지칠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 아드리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필릭스는 벌써부터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서 앉아 봐.”

아드리안이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긋나긋한 말투였지만 어쩐지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느껴졌다.

필릭스가 옆으로 가 앉자 아드리안이 뜸도 들이지 않고 말을 꺼냈다.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해 보실까.”

역시나 그는 필릭스가 도서부에 무작정 쳐들어온 일에 대해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갑자기 도서부에 들겠다니, 무슨 생각인 거야?”

“널 도와주려고.”

필릭스는 미리 준비했던 대답을 내놓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날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나도 알아. 좀 늦긴 했지?”

필릭스가 씩 웃었다. 대충 넘어가 보려는 속셈이었지만 아드리안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를 설득해 보기 위해 필릭스는 회의 때 본 광경에 대해 말을 꺼냈다.

“오늘 가 보니까 내 도움이 필요하겠던데? 앨런 그로스인지 뭔지, 그 자식이 도서부 분위기를 완전히 흐리고 있잖아.”

그 말에 아드리안은 필릭스를 향해 짓고 있던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고 한숨만 내쉬었다. 아드리안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앨런 그로스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썩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필릭스가 재빨리 입부를 신청했다.

“그냥 날 도서부에 넣어 줘. 내가 한 번에 해결 가능하니까.”

“네가 어떻게?”

“그냥 조용해질 정도로 살짝 겁만 줄게.”

필릭스가 주먹을 탁탁 맞부딪치며 씩 웃었다. 예상대로 아드리안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서라. 갈등은 그렇게 해결하는 게 아냐.”

아드리안다운 말이었다. 그의 인내심은 정말 대단해서, 필릭스는 사는 동안 그가 짜증 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라면 폭력을 쓰느니, 차라리 성서 속의 성자처럼 몇 날 며칠을 무릎 꿇고 기도하여 앨런 그로스를 긍정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 빌 것이다.

“진짜 얘기 안 해 줄 거야? 도서부에 들어오려는 이유.”

아무래도 그의 추궁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아드리안도 필릭스가 성에 차는 대답을 해 줄 때까지 계속 물어볼 태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시의 일을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필릭스는 다른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 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때, 아드리안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필릭스, 그냥 대놓고 물을게.”

그의 표정은 조금 난감해 보이기도 했고 심각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까지 필릭스를 추궁하듯 질문하던 태도는 버리고,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 혹시…… 날 따라 하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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