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80화
누군가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 필릭스는 자신이 모든 면에서 한심하고 서툴렀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좋아하고, 궁금해하고, 질투하고, 오해하고.
이 과정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히 따랐다. 상대방의 처지가 어떤지,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가 비교적 사회적 신분이 낮은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서.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루시의 존재를 알게 된 시점에서야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부주의한 행동이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 순간에는 말 그대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루시를 지켜 주기는커녕, 그가 오히려 그녀를 덫으로 몰아넣은 꼴이었다.
왜 그렇게 성급하게 나섰을까. 왜 태연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루시와 아버지가 한 공간에 있는 광경을 발견했던 그 순간에는 머리가 새하얘지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루시를 아버지에게서 떨어뜨려 놓아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최악의 생일이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달은.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 이상 루시에게 다가가면 안 되는 걸까.
정말로 그 애를 좋아하면 안 되는 걸까.
……아니, 그건 불가능했다.
루시를 좋아하지 않는 건 이제 그의 선택지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다른 선택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아버지조차 휘두를 수 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공작이 되는 것.
아버지를 뛰어넘어 아무도 감히 자신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가는 것.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돌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느 누가 반대하더라도 루시와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필릭스는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며 그동안 등한시해 왔던 가문의 사업도 새로이 배우기 시작했다.
루시를 지키기 위한 첫 단계였다.
한 가지 그를 복잡하게 만드는 점이 있다면, 끊임없이 그를 찾아오는 불안함이었다.
루시가 정말로 자신이 고백할 때까지 기다려 줄까. 고작 기다려 달라는 한마디 말로 내가 그녀를 붙들어 둘 수 있을까.
그리고 며칠 전 루시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을 보았을 때는,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또다시 자신에 대한 헛소문으로 마음이 불안하지 않도록 그녀의 곁에 계속 있어 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다른 학생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은 곤란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서 그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구실이.
* * *
“도서부에 들겠다고?”
아드리안의 한쪽 눈썹이 잠깐 삐죽 솟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왔다.
필릭스는 평소에도 종종 급작스럽고 이해하지 못할 행동으로 동생을 당황시키고는 했다. 그러나 지금 아드리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우리 두 달 후에 졸업인 건 알고 있지?”
필릭스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사실 하나를 아드리안이 일깨워 주었다.
“이제 와 가입해서 뭐 하려고? 그리고 모집 기간은 학기 초야. 지금은 부원을 충원할 계획이 없는데.”
동생의 냉정한 거절에 필릭스는 선 채로 잠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모집 기간이란 것도 있었나?
사실 가입이 안 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하고 무작정 온 것이라 받아쳐야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푹 꽂은 채로 자신이 도서부에 들어야 하는 이유를 고민하고 있던 그는 다른 부원들과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를 발견했다.
그 얼굴을 보니 갑자기 더욱 힘을 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솟아올랐다. 그는 당당한 태도로 아드리안에게 응수했다.
“왜 충원을 안 해? 도서관 갈 때마다 너희 부원들 힘들어서 죽상을 하고 있던데. 도와줄 사람 하나 더 생기면 도서부에도 좋은 일 아냐?”
‘내 말이 틀렸냐?’는 얼굴로 그는 나머지 부원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러자 몇몇 부원들이 아드리안 몰래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원칙적으로 아카데미에서 정해 준 모집 기간이 따로 있어. 지금은 그 기간이 끝난 지 한참 지났기 때문에 새 인원을 받아 줄 수가 없는 거야, 필릭스. 명단을 이미 제출했다고.”
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드리안이 교칙을 들먹이며 맞받아치자 필릭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순 없는데.
고민하는 그의 시야에 루시만 신경 쓰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이 눈에 띄었다.
“잠깐만. 쟤도 도서부 아니잖아.”
그가 루시 옆에서 흥미롭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콜린 코너를 가리켰다.
“전 명예 부원이에요!”
아드리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콜린이 먼저 나서며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래서 회의 참여 기회도 부여받았죠.”
그제야 필릭스는 구실이 생겼다는 얼굴로 부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어느 책상에 의자를 빼고 앉으며 멋대로 선언했다.
“그럼 나도 명예 부원 할게.”
예상 외로 아드리안은 별말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제 형을 포기해 버린 얼굴이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언제는 내 말을 들었니?’
꼭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아드리안의 속마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필릭스를 쫓아내는 대신 아드리안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상황을 종결시켜 버렸다.
“……자, 다들 우리 형은 무시하도록 해.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하고 회의를 이만 끝마치도록 하자.”
아드리안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 루시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부원들도 필릭스의 존재를 의식하며 자꾸 그를 흘끔거렸다.
특히 노엘 로먼과 루시의 친구로 보이는 어느 여학생은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흘리며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사실 재작년부터 문집에 실을 원고 구하기가 어려워졌어.”
아드리안이 다시 회의를 이끌어 갔다.
“아무래도 요즘엔 다들 글을 잘 안 쓰나 봐. 원고 모집 공고를 내도 들어오는 글이 잘 없더라고. 누가 좋은 생각이 있다면 의견 내줬으면 해.”
아드리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콜린이 손을 번쩍 들었다.
“모자라는 원고 수만큼 제가 제공해 드릴 수 있는데요.”
“그건 해결 방안이 아니야.”
콜린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손을 내렸다.
이번에는 루시가 손을 들었다.
“원고료를 지불하면 어떨까요? 물론 한 번 원고료를 주기 시작하면 문집을 만들 때마다 계속 줘야 하겠지만……. 그동안 학생들의 글을 공짜로 받아서 문집을 만들었다는 게 걸리기도 하고, 도서부 예산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서요.”
필릭스가 동의하는 의견을 내려고 했지만, 다른 학생이 먼저 나섰다. 바로 동급생인 앨런 그로스였다.
“그래 봤자 푼돈이잖아. 이 아카데미에 그런 푼돈 받자고 시를 쓸 사람이 어디 있다고.”
묘하게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필릭스의 눈꼬리가 대번에 홱 올라갔다.
이건 또 어디서 굴러온 개뼉다구야?
“어휴! 앨런 선배는 매번 저렇게 부정적이라니까?”
루시의 단발머리 친구가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원고에 대한 보수를 주자는 건 좋은 생각이잖아요! 꼭 돈이 아니더라도. 그럼 들어오는 원고도 꽤 늘 테고요!”
“대체 그 보수를 뭐로 할 건데?”
의견에 반박하는 의견이 나오고, 또 그 의견에 반박하는 의견이 나왔다. 교실 안은 순식간에 시끌시끌해졌다.
가만 보니 묘하게 도서부는 한 사람이 물을 흐리고 있는 게 보였다.
도서부 대부분의 학생들이 앨런 그로스라는 저 남학생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앨런과는 별로 친하지 않아 대화도 해 본 적 없었지만 필릭스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타고나길 성격이 부정적이고 매사에 짜증이 가득하단 것을.
게다가 또 어찌나 비겁한지 후배들의 말은 잘도 무시하면서 회장인 아드리안의 말은 찍소리 못 하고 받아들였다.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아첨꾼 유형이었다.
“자, 다들 그만해.”
아드리안이 부원들을 부드럽게 제지시켰다. 상대방에게 매섭게 쏘아붙이며 시끄럽게 굴던 학생들이 잠잠해졌다. 앨런 그로스마저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보아 온 듯 아드리안은 지겨운 얼굴로 상황을 정리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원고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추려 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시나 소설을 쓰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원고 구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 것 같아. 계속 이러면 아예 도서부 문집을 발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아드리안은 잠깐 고민하더니 말했다.
“나도 루시의 의견에 대해서는 제미마가 한 말에 동의해. 꼭 돈이 아니더라도 다른 보상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교실 안의 분위기가 하도 썰렁했기에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의견을 나누어 보자고 하며 아드리안이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는 어서 앨런과 다른 부원들을 떨어뜨려 놓고 싶은 눈치였다.
회의가 끝나자 부원들이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다. 그 어수선한 틈바구니 속에서 루시가 필릭스에게 ‘잠깐 나 좀 봐요’ 하는 눈빛을 보냈다.
바라던 바였다. 다만 그는 너무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루시의 뒤를 따라갔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아 있었다.
필릭스는 교실을 나와 문 옆에 잠깐 멈춰 서 있다가 시기적절한 순간 한쪽 발을 불쑥 내밀었다. 예상한 대로 무언가 그의 발끝에 뭉툭하게 걸려 왔다.
필릭스의 발에 걸려 꼴사납게 허우적거리던 앨런은 결국 바닥에 큰 소리를 내며 엎어지고 말았다.
“아, 실수.”
필릭스가 넘어진 그를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