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9화
루시의 뺨을 감싸 쥔 필릭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을 한꺼번에 토해 낸 그가 숨을 가다듬듯 느리게 어깨를 들썩였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맞추어 오며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내 잘못이야.”
이제 그는 루시만큼이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거, 나도 최근에야 알았어. 네 귀에까지 들어가기 전에 처리하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엄지손가락이 천천히 루시의 눈 밑을 쓸었다.
“너한테 미리 말해 줬어야 했는데.”
그의 손가락이 쓸고 지나간 자리가 열이 나는 것처럼 홧홧해져 루시는 눈을 파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본 필릭스는 그녀가 또다시 울음을 터트리려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자신의 품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이제 그는 큰 손으로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애를 달래듯 하는 그 손길에 루시는 점차 마음이 진정되어 갔다. 쉼 없이 흐르던 눈물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날 믿어 줘, 제발.”
조용히 안겨 있는 루시의 정수리 위로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믿을게요.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축축이 잠긴 목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루시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완전히 그치기 위해 노력해 보았다. 그를 돕는 것처럼 필릭스의 손은 계속해서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루시는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어졌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 얼마나 엉망일지 직접 보지 않아도 너무나 예상이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필릭스의 품에 안겨 펑펑 울다니. 울 때야 속 시원했지, 다 울고 나니 보통 창피한 게 아니었다.
루시의 훌쩍임이 잦아들자 필릭스가 꽉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그의 체온으로 뜨겁던 품 안에서 풀려나자 금방 차가운 바람이 루시의 몸을 휘감았다.
그 찬 공기에 완전히 정신을 차린 루시가 황급히 필릭스를 등지고 섰다. 그리고는 소매로 부랴부랴 젖은 얼굴을 닦아 냈다.
그녀의 등 뒤에서 필릭스는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갑자기 울고, 약혼했냐고 뜬금없이 묻고…… 선배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죄송해요, 갑자기 울어서.”
차마 그를 돌아보지 못하고 루시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울어도 돼.”
필릭스가 대답했다.
“화내도 돼. 무슨 말이든 해도 되고, 무슨 질문을 해도 돼.”
불어오는 바람에 바스락대는 낙엽 사이로 그의 말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한테 하고 싶은 건 뭐든 해도 괜찮아.”
루시를 달래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루시는 얼굴을 닦아 내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저 정말 뭐든 하게 될지도 몰라요.
루시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투정을 부리고, 떼를 쓰고. 선배가 관련된 일이면 저도 자꾸 유치한 사람이 되니까요.
둘은 얼마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루시는 빨개진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리고 필릭스는 그녀가 다시 자신을 돌아보길 기다리며.
그리고 마침내 루시가 필릭스를 다시 돌아보았을 때 그는 민망해하는 루시의 표정을 모른 척해 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자, 이제 여기서 나가자.”
루시는 그를 따라 뒤뜰을 나갔다.
울어 빨개진 눈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진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도서관 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그 누구도 루시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제 갈 길 가기 바빠 보였다.
그중 단 한 사람만이 수상한 거동으로 루시의 시선을 끌었다.
작별 인사까지 했던 클로틸 공주가 다시 도서관 앞으로 돌아와 교정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꽃다발을 들고서.
곧 공주는 루시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루시!”
그녀가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며 루시 앞에 섰다.
“루시 찾아서 도서관에 갔어요. 없다고 해서 계속 찾았어요.”
“저한테 할 말이 있으신가요?”
“이거 주려고 다시 왔어요, 자.”
클로틸 공주가 들고 있던 꽃을 루시에게 내밀었다.
“보답 싫으면 이거라도 줄게요.”
루시의 코끝에 향긋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그녀는 받은 꽃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나한테요?”
“네!”
공주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어…… 고마워요.”
루시의 인사에 공주가 흐뭇한 미소로 답했다.
“그럼 이제 진짜 안녕이에요!”
공주는 쾌활한 목소리로 루시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루시 곁에 서 있던 필릭스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듯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시종들에게로 돌아갔다.
“누구야?”
루시의 꽃과 멀어져 가는 공주를 번갈아 바라보던 필릭스가 물었다. 루시는 공주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내년에 후배로 봤으면 하는 사람이요.”
언제 울었냐는 듯 그녀의 얼굴에는 후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바야흐로 금빛의 계절.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나뒹구는 황금빛 낙엽들이 온 교정을 뒤덮었다. 점점 헐벗어 가는 나무에서도 눈이 내리듯 이파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루시는 창밖으로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며 한 손에는 턱을 괴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슬쩍 숨긴 입가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루시, 나 과제 좀 보여 줘!”
갑자기 그녀의 책상 위로 손 하나가 침범했다. 그러더니 재빠른 손놀림으로 콜린은 루시의 노트를 낚아채 갔다.
시간도 넉넉했던 과제였는데 미리 안 해 두고 대체 뭘 한 건지, 콜린은 얄미울 정도로 당당하게 루시의 과제를 베낄 준비를 했다.
“어휴, 그래라.”
평소 같았다면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 내며 즉시 노트를 빼앗아 갔을 루시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콜린에게서 신경을 끈 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트를 차르륵 펼치던 콜린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너 요즘 이상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루시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정말 이상하네.”
“도대체 뭐가.”
“요즘 좀처럼 화를 안 내잖아. 내가 뭔 말을 해도 그래라 하고, 수업 중에도 실실 웃고 있고. 너…… 정말 공부하다 미쳐 버린 거야?”
반쯤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겠지만, 콜린은 그 가설에도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는지 다시 한번 루시의 열을 재고 나섰다.
“진짜 그런 거야?”
“왜 이래!”
콜린이 열을 재다 말고 양 볼을 찌부러뜨리자 루시가 드디어 짜증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제야 콜린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래야 루시 키넌이지.”
그와 말씨름하기도 성가셨던 루시는 그의 손을 쳐 내고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음 수업은 아직 한참 남았잖아.”
“오늘부터 도서부에서 문집을 만들기로 했어. 다른 교실에서 부원들이랑 회의하기로 해서 가 봐야 해.”
독서의 계절이 되면 으레 시상이 불쑥불쑥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시를 전혀 쓰지 않던 사람들도 괜히 한 구절씩 끄적거리게 되는 가을.
도서부원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아카데미 학생들의 시와 짧은 소설들을 모아 매해 문집을 발간해 왔다.
루시의 말을 들은 콜린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나도 갈래!”
시 쓰는 게 취미인 그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넌 그만 좀 따라와. 우리 부원도 아니잖아. 아니면 아예 도서부에 가입하든지.”
“그건 싫어. 너처럼 도서관의 노예까진 되고 싶지 않거든?”
콜린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는 신착 도서가 올 때마다 흔쾌히 도서부의 일을 도와주었지만, 매일 도서관에 상주하며 일을 하는 건 결코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어이 따라오겠다는 콜린을 뒤에 달고서 루시는 하는 수 없이 회의가 있을 교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많은 부원들이 모여 있었다. 아드리안과 제미마, 리타. 노엘을 포함한 1학년 부원들. 그리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3학년의 앨런 그로스까지.
앨런은 루시를 보고 한번 눈썹을 꿈틀했다가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콜린을 보고는 대놓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평소에도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어수선하게 구는 콜린을 탐탁지 않아 하곤 했다.
그러나 다른 부원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제노미움 아카데미의 대표 시인, 콜린 코너도 왔습니다!”
“어서 와, 콜린!”
그동안 도서관에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기꺼이 나서 주는 콜린을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어떤 1학년은 그를 위해 의자를 빼 주기까지 했다.
콜린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를 감지한 앨런은 별말 없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집 만들기 회의는 아드리안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어떤 글들을 실을 것인지, 원고는 어떻게 모집할 것인지에 대해 저마다 의견을 내며 회의는 진행되어 갔다.
종종 콜린이 끼어들어 제 의견을 주장할 때마다 앨런 그로스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것을 빼면 제법 평화롭고 잔잔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순조로운 흐름을 갑자기 깨뜨린 것은 난데없이 벌컥 열린 문이었다.
그리고 문가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필릭스였다. 교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필릭스?”
슬슬 회의를 마무리할 준비를 하고 있던 아드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필릭스는 대답 대신 성큼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문을 닫았다.
갑작스런 등장으로 모든 부원들을 당황시킨 그는 정작 자신은 평온한 얼굴로 또 한 번 황당한 말을 내놓았다.
“도서부에 가입하러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