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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8화 (78/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8화

방금 내가 무슨 소릴 한 거지?

루시는 자신의 돌발적인 행동에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옆에서 제미마와 리타도 당황스러운 시선을 보내 왔다.

‘갑자기 왜 그래?’

마치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루시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도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뭘 어쩔 셈인데?

루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저 공주에게 선배와 무슨 사이냐고 따져 묻기라도 해 볼 참이야? 차라리 필릭스 선배에게 속 시원히 물어보지 그래?

물론 그녀는 필릭스를 먼저 찾아가 소문의 ‘약혼설’에 대해 물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막상 시야에 그가 들어오면 한 줌 남아 있던 용기마저도 모래처럼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필릭스에게서 들은 말이라고는 고백도 아닌 ‘기다려 달라’는 알쏭달쏭한 말뿐.

마음을 확실히 전한 것도 아니며, 정식으로 만나는 관계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 뜬금없이 약혼설에 관해 질문해 괜히 앞서 나간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머릿속을 하루 종일 헤집어 대는 소문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자신도 없었기에, 루시는 무작정 공주를 안내하겠다 나서고 만 것이다.

그녀는 클로틸 공주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외부인의 출입이 제한된 구역인 건 맞지만 관리인과 동행한다면 들어갈 수 있어요.”

루시의 설명에 공주는 잠깐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시종과 베르타어로 잠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제야 루시는 아직 제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공주가 자신의 말을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음을 눈치챘다.

시종이 루시가 한 말을 베르타어로 통역해 주고 나서야 공주는 활짝 웃으며 루시를 돌아보았다.

“고맙습니다. 그럼 부탁해요.”

공주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중하고 의젓해 보이는 태도였다.

어느새 루시 옆에서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던 제미마가 귀에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래, 루시! 차라리 시원하게 정면 돌파 해 버려!”

그 뒤에서 리타마저 비장한 얼굴을 한 채 힘내라는 의미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공주를 신경 쓰고 있던 마음을 친구들에게 들켜 버린 것 같았다. 창피한 마음에 루시는 그들의 응원을 못 본 척하며 반납대를 돌아 나왔다.

“그럼 이쪽으로 가실까요?”

루시가 서둘러 공주를 계단으로 안내했다.

* * *

“도서관이 아름다워요.”

루시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클로틸 공주가 말했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도서관의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는가 하면, 다시 고개를 숙여 아름다운 홀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예술로 유명한 나라의 공주답게 그녀는 군데군데 설치된 조각상이나 그림 한 점도 대충 지나치지 못했다.

“베르타 도서관도 아름다워요. 여기처럼 천장이 크고 바닥도 커요.”

“공주님, 천장이 높고 바닥은 넓다고 하셔야지요.”

베로스 제국 출신인 듯한 시종이 클로틸 공주의 어색한 문장을 고쳐 주었다. 아랫사람의 지적에도 공주는 기분 나쁜 내색 없이 그저 웃음만 터트렸다.

공주가 루시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국어 지금 배우고 있어요.”

“별말씀을요.”

소문 속의 당사자를 마주해 긴장했던 것도 잠시, 루시는 공주가 여느 소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아카데미의 여느 귀족 학생들보다 겸손하고 소탈한 것 같기도 했다.

“제국어 어려워서 힘들어요.”

갑자기 클로틸 공주는 거한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더 잘하고 싶은데…….”

중얼거리듯 말하는 공주의 표정이 시무룩해 보였다.

제국어를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공주는 안내받는 내내 루시와 제국어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클로틸 공주의 제국어 실력은 애매했다.

기초적인 대화는 무리 없이 가능해 보였지만 제노미움 아카데미에 입학해 수업을 듣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이런 수준으로는 입학하더라도 수업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 터였다. 본인이 굉장한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은.

게다가 그녀가 자꾸만 문법을 틀리는 바람에 시종의 지적이 계속되자 공주는 점점 풀이 죽어 갔다.

목이 마르다는 공주의 말에 시종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공주가 조심스럽게 루시에게 물었다.

“내 제국어 듣기 힘든가요?”

공주는 루시가 대답하기도 전에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말을 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아직 힘들어요.”

의젓해 보이던 공주가 약한 모습을 보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아바마마는 내가 제노미움 가는 거 싫다고 해요. 자꾸 베르타에 있는 아카데미에 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난 여기 오고 싶어요. 아바마마께 보여 주고 싶어요. 여기서도 잘할 수 있다고. 아바마마가 날 믿어 줬으면 좋겠어요.”

불쑥 듣게 된 공주의 진심에 당황스러웠던 것도 잠시, 루시는 어쩐지 지금 그녀의 처지가 몇 년 전의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아빠와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도로 입학시험을 치러 왔던 자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공주가 안쓰럽게만 보였다.

낯선 곳에 와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얼마나 큰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할 수 있어요.”

루시가 베르타어로 말했다. 공주가 시무룩하던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가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루시에게 베르타어로 말했다.

“베르타어를 할 줄 아시네요?”

“저도 아직 배우는 중이라서 잘은 못해요.”

“말도 안 돼요! 아주 훌륭한걸요?”

루시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본적인 대화를 하는 데만 무리가 없을 정도예요. 옛날에는 베르타 문자조차도 읽을 줄 몰랐어요.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할 뻔한 적도 있었죠.”

루시는 문자도 읽을 줄 모르는 상태에서 베르타 문학 전집을 정리해야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났다.

“그 후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다시는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그러니까 공주님도 할 수 있어요. 아니, 공주님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루시의 말에 클로틸 공주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풀 죽어 있던 모습은 말끔히 사라진 채 그녀가 희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어요.”

공주가 여전히 어색하지만 당당한 제국어로 말했다.

* * *

“정말 감사해요, 루시.”

루시의 안내로 도서관을 모두 둘러본 클로틸 공주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루시, 가문의 이름 알려 주세요. 꼭 감사하고 싶어요.”

당연히 자신을 귀족이라 여기고 묻는 말에 루시는 당황스러웠다.

“공주님, 전 귀족이 아니에요.”

귀족이 아니라는 말에 공주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나라에는 귀족과 평민이 함께 다닐 수 있는 아카데미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가요. 루시, 하지만 꼭 답례하고 싶어요.”

“공주님, 마음만 받을게요. 전 도서관 안내 외에는 딱히 한 게 없는걸요.”

루시의 말에 공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답례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상대에게 부담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럼 내년에 여기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요. 선배님으로요.”

클로틸 공주가 베르타어로 진심을 전했다.

공주가 시종을 데리고 교정을 떠난 뒤, 루시는 허탈한 마음에 휩싸였다.

공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보통의 소녀이기도 했다.

루시는 그런 그녀에게 순수한 호의가 아닌 마음으로 접근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안내하는 동안 속으로 무엇을 의심하고 있었는지 알면 공주가 얼마나 실망을 할까?

게다가 그런 지질한 짓을 한 것치곤 아무것도 밝혀 낸 게 없었다.

결국 제자리였다.

루시는 자괴감을 느끼며 아무도 없는 도서관 뒤뜰로 갔다.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였다. 이런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루시!”

그때 뒤에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어느샌가 자신을 따라 뒤뜰로 온 필릭스였다.

하필 이런 순간에 선배와 맞닥뜨리다니.

“여기서 뭐 해?”

그렇게 묻던 필릭스는 당혹스런 얼굴로 루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루시는 자신의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영문도 모른 채 터져 버린 눈물은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루시는 황급히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진심이야, 루시 키넌?

선배 앞에서 우는 꼴을 보이다니. 이건 정말 최악이야!

그때 루시의 얼굴에 단단한 가슴팍이 와 닿았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 머리를 꽉 끌어안은 양팔의 힘이 느껴졌다.

“왜 그래? 대체 왜 우는 건데?”

귓가에 필릭스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정말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루시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뭐 잘못 한 거야? 응?”

하지만 그건 루시의 눈물을 그치게 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왜 더욱 눈물이 나는 건지.

루시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같이 보일지 알면서도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선배…… 약혼했어요?”

주저하고 또 주저했던 그 질문이 최악의 상황에서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루시는 자신의 입을 막아 버리고 싶었지만 한번 터진 감정은 막을 수도 없이 눈물처럼 계속 새어 나왔다.

“이전에 서해안에 갔던 것도 혹시 약혼 때문이었던 거예요?”

“무슨 소리야?”

필릭스가 품에 꽉 끌어안고 있던 루시를 놓아주며 되물었다. 대신 그는 양손으로 루시의 뺨을 감싸 쥐었다.

“너까지 그런 헛소문을 어디서 들은 거야? 젠장, 내가 먼저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가 후회스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 공주인지 뭔지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야, 만나 본 적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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