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7화
사실 필릭스를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건 르네뿐만이 아니었다. 르네와 함께 서 있던 여학생들도 제각기 필릭스를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귀찮은 여학생들을 피해 자리를 뜬 필릭스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그가 르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는 여학생 무리를 보며 루시는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바로 필릭스 역시 아드리안만큼이나 여학생들에게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잘생긴 데다가 검술 실력도 뛰어났고, 나름 무던한 성격으로 교우 관계도 좋은 듯했다. 게다가 무려 베르크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관심 없는 여학생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동안 선배의 엉뚱하고 이상한 모습들만 봐서 잠시 잊고 있었어.
제노미움 아카데미는 필릭스를 노리는 여학생들의 천지였다.
그에게 기다려 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필릭스가 사라진 곳을 진득이 쳐다보는 여학생들을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루시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표정을 가다듬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쩐지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 * *
11월이 되자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싸늘한 공기가 교정을 가득 채웠다. 이른 감기에 걸린 학생들이 기침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날은 추웠지만 온 이파리들을 붉게 물들인 나무들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덕분에 하루 중 그나마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정오 무렵에는 아름다운 교정을 산책하려는 학생들로 북적거리기까지 했다.
그중에는 아카데미 재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군데군데 껴 있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귀족가의 영애들과 영식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시종을 대동한 채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다음 해에 제노미움에 입학하길 원하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이 시기마다 아카데미는 입학을 원하는 귀족 자제들에게 교정을 개방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아카데미 건물과 정원을 둘러보며 감탄을 하거나,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재학생들을 보며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아우! 귀엽다, 귀여워!”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제미마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아카데미 건물 앞에 서서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어느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도 2년 전엔 저렇게 풋풋했으려나.”
“무슨 소리야, 제미마. 우리도 아직 풋풋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루시의 눈에도 고작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을 그 소녀가 너무나 어리게만 보여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몇 달 후엔 또 신입생들로 북적거리겠네.”
“에휴, 그땐 우리가 졸업반이 되어 있겠지. 아아, 졸업 후에 뭘 할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별안간 제미마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런 소리를 냈다.
“난 오빠처럼 물려받을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루시는 제미마가 머리를 뜯지 못하도록 말리는 데 애를 먹었다.
“우리 아버진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라고 벌써부터 성화야.”
리타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에 루시와 제미마가 동시에 행동을 멈췄다. 둘은 놀란 얼굴로 리타를 쳐다보았다.
“뭐? 리타, 난 네가 수도에 남아 일자리를 구할 줄 알았는데!”
“맞아. 황궁에서 관료로 일하고 싶어 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리타가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루시는 그녀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루시도 귀족들에게 있어 결혼은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대부분의 귀족 학생들은 졸업을 하자마자 가문에서 짝지어 준 상대와 결혼을 하곤 했다. 애초에 재학 시절부터 약혼자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에게 있어 결혼은 사랑이 아닌 집안끼리의 동맹과도 같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사례들이었다.
그러니 북부 귀족가의 영애인 리타도 집안에서 정해 주는 혼처를 스스로의 의지로 거부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뭐, 결혼이야 원래 집안에서 정해 준 사람과 하는 거니까.”
정작 리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상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루시의 얼굴을 잠깐 살피다가 머뭇대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필릭스 선배도 그런 소문이 돌던데.”
“필릭스 선배?”
리타의 의미심장한 말에 루시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최근 서대륙 어느 왕국의 공주와 약혼을 했다는 소문이…….”
리타는 루시의 안색을 보고는 황급히 말을 멈추었다.
“괜찮아. 무슨 소문인지 말해 줘, 리타.”
“……이번에 서해안에 다녀왔던 것도 그 공주와의 혼인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었어. 하지만 확실한 건 아냐!”
점점 어두워지는 루시의 낯빛을 보며 리타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러나 옆에서 리타의 말을 듣고 있던 제미마는 요란하게 코웃음을 쳤다.
“뭐어? 말도 안 돼! 다 헛소문이야!”
그녀는 루시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웃기까지 했다.
“리타! 네가 기사의 날 밤 그 선배 얼굴을 봤으면 그런 소문 절대 믿지 못했을걸! 루시한테 아주 푹 빠진 얼굴이었다고! 내가 봤어!”
제미마의 목소리가 너무 높아진 탓에 루시는 서둘러 그녀의 입을 막아야만 했다.
“하긴, 나도 그 얘기 듣고 놀랐어. 그 선배가 삼 층까지 벽을 타고 올라올 줄은 누가 알았겠어?”
제미마와 리타가 그날 밤의 일을 화제로 대화하는데 점점 열을 올리는 사이, 루시는 홀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필릭스는 베르크 공작가의 후계자였고, 가문에서도 그의 약혼녀를 고심하여 정할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그 상대가 어느 왕국의 공주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물론 제미마의 말대로 헛소문일 수도 있었다. 필릭스는 항상 관심의 중심에 서 있었고, 늘 이런저런 소문이 뒤따라 다녔으니까.
뒤숭숭한 마음도 잠시, 루시의 마음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냥 소문이겠지. 필릭스 선배도 그런 말은 전혀 없었는걸.
그녀는 소문보다는 필릭스를 믿기로 했다.
루시는 이미 수차례 다른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에 휘둘려 그를 오해하곤 했었다. 이제는 그런 실수를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굳건한 마음과는 달리 그저 필릭스를 둘러싼 수많은 소문 중 하나라고 믿었던 약혼설은 학생들의 입방아를 타고 멀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소문은 점점 확산되면서 구체적인 사실로 변해 가기까지 했다.
리타에게서 들었을 때는 그저 ‘서대륙의 어느 공주’였던 약혼자가 어느새 ‘베르타 왕국의 맏이 공주’라는 구체적인 인물로 탈바꿈해 있었다.
베르타 왕국은 예술과 학문으로 유명한 나라이자, 베로스 제국과도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만한 나라의 공주라면 확실히 베르크 공작가와 혼약을 맺기에 부족함이 없는 혼처였다.
무시하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들려오는 말들을 들으며 루시의 머릿속에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하나가 저절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쓸데없고 자학적인 상상인지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원래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루시는 주변의 말들을 듣지 않기 위해, 그리고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멈추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소문의 그 ‘베르타 공주’가 제노미움 아카데미에 직접 나타난 것이었다.
* * *
베르타 왕국의 클로틸 공주는 뒤에 시종들을 이끌고 천천히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그녀는 알록달록 물든 교정의 경치를 감상하다가 시녀들을 이끌고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했다.
올해 16살이라는 그녀는 제노미움 입학을 목표로 몇 달 전부터 수도 베델에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세상에……! 그 공주가 정말로 아카데미에 왔잖아?”
교정에 난 길을 따라 걷던 제미마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루시가 곁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서둘러 둘러댔다.
“흠흠, 뭐 정말로 우리 아카데미에 오고 싶었나 보지!”
루시는 대꾸 없이 클로틸 공주를 바라보기만 했다.
공주는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였다. 16살다운 앳된 얼굴과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이 무척 귀여워 보였다.
그러나 사실 공주는 필릭스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루시가 보기에도 그녀는 너무 어렸다.
약혼할 나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정말로 필릭스 선배와의 약혼 때문에 제국에 온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루시는 고민에 빠졌다.
“루시……, 루시!”
제미마가 어깨를 흔들며 부르는 소리에 루시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루시는 클로틸 공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제미마와 리타를 따라 도서관으로 향했다.
혼자서 끙끙대며 생각에 빠져 있어 봤자 망상만 늘어날 뿐이란 걸, 루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반짝 빛내던 클로틸 공주의 얼굴은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 얼굴을 떨쳐 내기 위해 루시는 더욱 책 정리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얼마 후 도서관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클로틸 공주와 그녀의 시종들이었다.
반납대에 앉아 있던 루시의 시선이 자동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공주는 교정을 한 바퀴 돈 뒤 이제 도서관을 보러 온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시종들에게 물러가라 명한 뒤 단 한 명만의 시종만을 데리고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도서관에서 공부 중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도서관이 굉장히 커.”
클로틸 공주가 어색한 제국어 억양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와 시종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었다. 곧 시종이 반납대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실례지만, 이 층은 출입할 수 없습니까?”
공주를 대신해 시종이 물었다.
“거긴 고서들을 보관하는 곳이라 재학생만 들어갈 수 있는데요.”
루시 옆에 있던 리타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시종은 자신이 들은 말을 공주에게 전했다. 공주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돌아서려는 찰나.
“잠시만요.”
루시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주를 불러 세웠다.
“제가……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