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6화
그렇게 로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콜린은 대배우와의 식사 기회를 얻음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 날 오후, 누군가의 밀고로 로제에게 꽃을 준 남자의 정체가 콜린이라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플로라 사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여학생 기숙사에 몰래 들어온 남학생을 찾아내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던 그녀는 즉각 콜린을 불러들였다.
콜린이 사감에게 불려 갔단 소식을 들은 루시는 이마를 짚었다. 부디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큰 벌을 받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런데 초조한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콜린은 태연히 교실에 다시 나타났다.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크게 혼난 뒤 기가 죽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됐어?”
루시가 물었다.
“그냥 가래.”
“뭐?”
“플로라 사감님이 날 보더니, 그냥 가래.”
콜린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루시는 어리둥절하여 그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로제 선배에게 꽃을 바친 게 나일 리가 없대. 이런 바늘 같은 몸으론 일 층도 제대로 못 오를 거라나?”
우습게도 플로라 사감은 콜린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여학생처럼 꾸미고서 기숙사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탓이었다.
“딜런도 성공 못 한 일을 내가 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눈치셨어. 나 말고 다른 덩치 큰 남학생들을 의심하시는 것 같던데. 뭐, 나야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면 좋지.”
콜린은 루시를 보며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친구를 보며 루시는 화를 내야 할지 안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넌 참 운도 좋다.”
결국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안도하며 루시가 말했다.
* * *
다들 로제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서 받은 꽃에 대해 떠드느라 바빴지만, 루시는 그녀가 꽃을 받았다느니 풀을 받았다느니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근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침대맡 협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위에 올려놓은 스노볼을 가만히 집어 들고 한참이나 들여다보곤 했다.
요즘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그것을 구경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투명한 구 안에서 반짝이는 모래와 붉은 산호초는 루시의 마음을 언제나 설레게 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걸릴 정도였다.
그때마다 루시는 필릭스에게서 들었던 말들이 손안에서 느껴지는 스노볼의 촉감처럼 또렷하고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필릭스와의 사이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끊임없이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필릭스가 그녀의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과거와는 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는 루시가 어디에 있든지 한눈에 알아보고는 했다.
루시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아무리 작은 목소리로 말하더라도.
* * *
“너희 먼저 가, 난 잠깐 앉았다 갈게.”
어디선가 들려오는 필릭스의 목소리에 루시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벤치에 잠깐 앉아 가방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근처에서 길을 지나가던 세 명의 남학생이 보였다. 그중 제일 먼저 눈에 띈 사람은 당연 밝은 금발을 가진 필릭스였다.
루시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듯이, 필릭스 역시 그녀가 거기 앉아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섣불리 아는 척하거나 손을 흔들어 인사하지 않았다. 대신에 은근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갑자기 기지개를 폈다. 그가 친구들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피곤해서 잠깐 앉아 있어야겠어.”
그의 말에 친구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뭐?”
“방금 전까진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자며.”
그러나 필릭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괜히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루시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는 루시를 흘끔 보더니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그 짧은 순간에 루시와 시선을 맞추며 가볍게 웃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별안간 가던 길을 멈추고 벤치에 앉자 그의 친구들이 기막힌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곧 자연스럽게 필릭스에게로 다가왔다. 친구들이 자신의 양옆에 앉자 필릭스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안 가?”
“어딜?”
“기숙사 안 돌아가냐고.”
“네가 벤치에 앉았다 가자며.”
“내가 언제……!”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으려던 필릭스가 억지로 쥐어짜 낸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네끼리 먼저 들어가도 돼.”
“그냥 같이 가.”
필릭스의 친구들은 그를 두고 갈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중 한 명은 벤치에 벌러덩 드러눕기까지 했다.
“아아. 좋다.”
“이렇게 하늘 보는 게 얼마 만이냐.”
한껏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릭스와는 달리 그들은 울긋불긋해진 교정을 둘러보며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루시는 필릭스의 뚱한 표정을 흘깃 보다가 몰래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 살짝 심통이 난 표정이 귀여워 보였다.
“야, 필릭스.”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친구 하나가 갑자기 그를 불렀다.
“그나저나 요즘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뭐가.”
“수업 말이야. 네가 웬일로 수업을 그렇게 열심히 듣냐고.”
“그건 나도 묻고 싶었다. 드디어 아드리안과 영혼까지 똑같아진 줄 알았잖아.”
처음엔 장난스러운 얼굴로 질문을 던지던 그들은 점차 진지한 표정이 되어 의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번에 갑자기 일 등을 한 것도 무척 수상해. 솔직히 말해 봐.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친구의 말에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필릭스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수를 쓰긴. 누가 도와줬어. 내가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누구?”
“아드리안이겠지.”
“아드리안 아니야.”
친구들의 추측에 필릭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루시가 목을 움츠렸다. 그의 입에서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왠지 쑥스러워졌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필릭스가 있는 쪽을 보지 않으려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의 귀는 그가 하는 말을 더 잘 듣기 위해 쫑긋 세워져 있었다.
“아드리안이 아니면 누군데?”
“있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이 있으면 우리도 소개시켜 줘.”
친구의 말에 필릭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험악해진 얼굴로 즉각 거절했다.
“뭐? 안 돼.”
“왜 정색을 하고 그래?”
과한 필릭스의 반응에 친구들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 선생님은 엄청 바쁘셔서 너네를 도와줄 시간 따윈 없으니까.”
필릭스가 쐐기를 박듯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친구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우리도 됐다. 널 그 성적까지 끌어올린 걸 보면 분명 공작가에서 어렵게 구한 선생님이겠지.”
그런 억측 이후로 친구들도 더는 필릭스의 선생님이 누구인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이 다시 교정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필릭스가 몰래 루시를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누가 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도 잠시, 루시는 그의 천진난만한 표정에 마음을 놓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느 날부터는 별것 아닌 것으로도 실없는 사람처럼 웃음이 났다. 이게 다 필릭스 때문이었다.
그가 건네는 사소한 말들도, 스쳐 지나가는 표정들도 루시에겐 늘 새롭고 설레는 감정으로 다가왔다.
그저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필릭스, 아까부터 쟤가 너 쳐다본다.”
그의 친구가 불쑥 내뱉은 말에 루시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필릭스를 보며 짓던 미소를 황급히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방심했다.
그녀는 두근대는 심장을 다잡으며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필릭스의 친구가 말한 쪽은 루시가 아니었다.
그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여학생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루시는 이름도 모르는 3학년 여학생 무리였다.
“르네 케피넌 말이야. 아까부터 너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필릭스의 친구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놀리듯 말했다.
“르네가 얘한테 관심 있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다른 친구도 그 화제에 장작을 넣듯 말을 흘렸다.
루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며 르네라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르네.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이기도 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깨 위로 풍성하게 드리운 검은 머리칼이 매력적인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은 친구들과 서서 이야기하다가 필릭스와 두 친구가 자신들 쪽으로 눈길을 주자, 친근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해 주었다.
루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정작 필릭스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야, 필릭스. 너한테 인사하잖…….”
“나한테 인사했을 리가 없어.”
친구의 말을 가로막으며 필릭스가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널…….”
“아니야.”
“쟨…….”
“아니래도.”
필릭스는 필사적으로 친구의 말을 부정했다. 갑작스레 부자연스러워진 그의 태도에 친구들은 ‘또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르네라는 여학생은 기어코 필릭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정확히 필릭스였다. 틀림이 없었다.
“뭐가 아니야. 봐, 너한테 오고 있잖아.”
그러나 친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릭스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황당한 얼굴의 친구들을 두고 필릭스가 몸을 돌렸다. 그는 루시에게 어색한 눈빛을 보내며 인사한 뒤 곧장 남학생 기숙사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야, 어디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두 친구도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우아하게 걸어오던 르네는 갈 길을 잃고 멍한 표정으로 필릭스의 뒷모습만 쳐다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