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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5화 (75/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5화

거친 욕설에 루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표정을 본 필릭스가 황급히 방 안으로 내려섰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해명했다.

“너한테 욕한 거 아냐!”

“알아요!”

루시에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문가를 확인하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선배, 도대체 왜 여기 있어요? 플로라 사감님이 회초리를 들고 돌아다니는 중이라고요!”

“아니, 노엘이 너한테 꽃을 주었다기에…….”

“그런 적 없어요! 오늘 노엘이랑은 마주치지도 않았다고요.”

루시의 말을 듣고 필릭스는 이를 갈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엘이 또 그를 골려 먹으려 한 게 틀림없었다.

거기에 홀라당 속아 넘어간 그는 앞뒤 생각 없이 무작정 여학생 기숙사로 달려온 것이다. 그가 창문으로 기어오르는 동안 플로라 사감에게 발각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밖에 망봐 줄게!”

어쩐지 신난 얼굴로 제미마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루시는 필릭스를 떠밀며 다그쳤다.

“어서 나가세요! 들키면 정말 큰일 날 거예요! 사감님이 화가 단단히 나셨다고요.”

“노엘이 꽃 안 준 거 확실하지?”

“제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해요! 얼른 가기나 하세요!”

루시의 말에도 안심이 안 되었던지, 필릭스는 부릅뜬 눈으로 방 안을 훑었다.

그런 그를 낑낑대며 창문 쪽으로 떠밀던 루시는 “아차!” 하며 다시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깐! 여긴 삼 층인데……. 대체 어떻게 내려가시려고요?”

“그냥 뛰어내리면 되는데.”

“네에?”

그의 여상스러운 대꾸에 루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무리 몸이 날렵한 사람이라도 삼 층에서 뛰어내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루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이제껏 날카로운 눈으로 방 안을 살피던 필릭스가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며 씩 웃어 보였다.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선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삼 층에서 뛰어내린다고 해도 말릴 거예요!”

“걱정 안 해도 돼,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본 적도 있으니까.”

“도대체 이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일이 뭐가 있어요?”

그렇게 묻던 루시는 예전에 통금 시간을 넘기게 되자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담을 넘어가자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선배…… 설마 교칙을 어기고 마음대로 돌아다니시는 건 아니겠죠?”

“돌아다닐 일이 뭐가 있겠어. 난 밖에 나다니는 거 귀찮아.”

필릭스의 해명에도 루시의 눈은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그들이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방으로 쿵쿵대며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루시는 놀라 말을 멈추고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이렇게 큰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활보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게다가 어떻게든 그 발걸음이 방으로 오지 못하게 막아 보려 애쓰는 제미마의 목소리까지 들리자, 루시는 다급해졌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방문이 홱 열렸다.

문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매서운 눈빛의 플로라 사감이 서 있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루시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망했다!

“왜 제미마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복도를 배회하고 있는 걸까? 마치 망을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플로라가 쩌렁쩌렁한 목청을 자랑하며 소리쳤다. 그녀 뒤에 서 있던 제미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는 감히 뒤돌아 필릭스의 당황한 표정을 살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빼도 박도 못하게 걸리고 말았다. 이제 그녀와 필릭스에게 남은 것은 커다란 벌점과 교장실에 불려 가는 일뿐이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그때 플로라의 의심 가득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 와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루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함께 방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방 안에 서 있던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릭스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남학생을 불러들인 건 아니겠지, 루시?”

플로라는 옷장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히며 확인하더니,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까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필릭스는 보이지 않았다.

플로라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확인했다. 다시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분명 뭔가 숨기는 것 같았는데.”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남학생은 털끝만치도 보이지 않았고 플로라도 더는 방을 뒤질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좋아, 한 번 믿어 보겠어. 그러니 어서 불 끄고 침대에 눕도록 해라! 제미마는 또 한 번 복도에 나오면 내 방에서 재울 줄 알아.”

“네, 사감님!”

탁.

문이 닫혔다.

루시와 제미마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필릭스 선배는 갔어?”

“으응, 그런 것 같아.”

제미마의 물음에 루시가 석연찮은 얼굴로 대답했다.

곧장 밑으로 뛰어내린 건가? 정말 빠르네.

그녀는 걱정스런 얼굴로 창가로 다가갔다.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컴컴한 땅 위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다친 건 아니겠지?”

“난 멀쩡한데.”

갑자기 머리 위에서 들려온 대답에 루시는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위에서 손 하나가 내려와 루시의 한쪽 뺨을 감쌌다. 찬 가을바람과 확연히 대비되는 따뜻한 온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위층 창문에 필릭스가 매달려 있었다. 그가 가벼운 동작으로 다시 루시의 방 창문으로 내려섰다.

“선배……!”

“후,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그가 중얼거렸다.

창틀을 딛고 선 필릭스는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플로라의 발소리가 들려 루시는 마음이 초조했다.

“난 꽃은 없고…… 대신 이거.”

필릭스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자 필릭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걸로 대신할게. 너한테 꼭 바다를 보여 주고 싶었거든.”

루시는 손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

고맙다고 말하려 했으나, 가까운 곳에서 어느 학생을 야단치는 플로라의 목소리가 고요함을 뚫고 날아왔다. 더는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필릭스는 재빨리 아래로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창틀에서 발을 떼기 전, 그는 루시를 잠깐 돌아보며 나직하게 인사했다.

“그럼 잘 자, 루시.”

그러고는 곧장 아래로 훌쩍 사라져 버렸다. 그의 과감한 행동에 루시는 숨을 들이키며 서둘러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땅 위로 나뒹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둠 속에서 남학생 기숙사를 향해 멀어져 가는 인영이 보였다.

마침내 그의 발소리마저 사라지자 루시는 상자를 쥐고 침대에 가 앉았다. 줄곧 침대 뒤에 숨어 둘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제미마가 얼른 옆으로 다가왔다.

“뭔데, 뭔데!”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상자를 열어 볼 것을 재촉했다. 루시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투명하고 주먹만 한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스노볼이네!”

루시가 상자에서 스노볼을 꺼내 손에 쥐었다. 달빛을 받은 매끄럽고 차가운 구체가 루시의 손안에서 영롱하게 빛났다.

“와아.”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스노볼 속에 담긴 바다 풍경이었다.

하얀 모래, 붉은 산호초, 그리고 그사이를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

“예쁘다…….”

루시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좋아?”

곁에 있던 제미마가 물었다.

루시는 대답 대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저…… 이거 비밀로 해 줄래?”

루시가 조심스레 묻자 제미마가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걱정 마. 나 입 무거워!”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꽉 집어 보였다.

어느새 기숙사는 조용한 어둠 속에 휩싸였다. 복도를 돌아다니던 플로라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재미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데다가 플로라에게 오랫동안 일장 연설을 들은 탓에 피곤해진 여학생들은 금세 잠에 든 것 같았다.

침대에 누운 루시는 한참이나 머리맡에 놓인 스노볼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조용한 바다 속에서 물고기들이 여유롭게 떠다녔다.

너에게 꼭 바다를 보여 주고 싶었어.

그렇게 말하던 필릭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그와의 관계 속에서, 그 말은 루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언젠가는 그와 함께 정말로 바다를 보러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분도 들었다.

창밖의 달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루시는 오랫동안 스노볼을 들여다보았다.

* * *

여러 소동으로 시끄러웠던 밤이 물러간 다음 날 아침. 로제는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휴게실에 나타났다.

이미 그녀가 전날 밤, 어느 남학생에게서 기사의 꽃을 받았다는 소문은 온 기숙사에 퍼진 후였다. 아카데미가 설립된 후, 남학생이 여학생 기숙사 안까지 들어가 꽃을 바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당연 화제가 되었다.

다만, 그 꽃을 바친 남학생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로제가 꽃을 받은 것을 목격했다는 여학생들도 사실은 문밖에서 ‘그 남학생’의 목소리만 들었을 뿐이었다.

로제의 기세에 한풀 꺾인 클레어는 평소의 여유롭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아침에 그녀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휴게실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는 로제를 발견하자마자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물론 경련이 이는 입가는 숨길 수 없어 보였다.

다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남학생의 정체에 대해 떠드는 와중에, 루시는 부리나케 교실로 달려갔다.

“콜린!”

그녀는 콜린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성 간의 기숙사 무단출입은 벌점으로만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나 콜린은 전혀 후회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루시! 무려 일라이자 콜과의 식사가 걸려 있었단 말이야. 그냥 배우도 아니고, 일라이자 콜이라고!”

콜린이 당당한 얼굴로 대꾸했다.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배우를 직접 만날 수만 있다면 벌점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식의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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