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4화
기사의 날 밤.
기숙사의 여학생들은 딜런이 정말로 클레어 헤밀턴에게 꽃을 바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꽃을 받은 클레어가 로제의 콧대를 눌러 버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관심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모든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는 상황에서도 클레어는 평소의 차분한 미소와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에 목말라하는 로제의 신경을 긁어 대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로제는 그런 은근한 도발에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니, 그녀는 심지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클레어만큼이나 우아하게 앉아 차를 홀짝이는 그 모습은 꽃을 바칠 유일한 남학생을 빼앗겨 분해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로제의 알 수 없는 태도를 두고 여학생들은 모여 수군거리기도 했다.
“다른 누군가가 로제 선배한테 꽃을 바치겠다고 한 거 아냐?”
“하지만 딜런 외에 여학생 기숙사에 몰래 들어올 강심장이 있을까?”
“저렇게 여유만만한 걸 보니 시시한 남자애는 아닐 것 같은데. 혹시…… 필릭스 선배 아냐?”
“바보야, 필릭스 선배는 지금 아카데미에 없잖아.”
남의 연애사와 같은 흥밋거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과, 그런 걸 한심해하면서도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어서 딜런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휴게실을 어슬렁거리다가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방으로 올라갈 때까지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만은 숨기지 못했다.
점점 밤이 깊어 갔다.
하지만 자정이 가까울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불어온 밤바람이 창문을 뒤흔드는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올빼미 우는 소리뿐이었다.
여학생 기숙사 근처에도 남학생이라곤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았다. 클레어에게 꽃을 바치겠노라 공공연하게 선언했던 딜런 허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흐르기만 하자 제미마는 김이 빠진 모양이었다.
“에이, 뭐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창문 가까이서 작은 촛불을 켜고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가 말했다. 곧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커다란 하품을 하며 침대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럼 그렇지. 지옥의 수문장보다 무서운 플로라 사감이 계신데 누가 감히 여학생 기숙사에 침입할 마음을 먹겠어?”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 제미마가 꼬물거리며 졸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이나 자련다.”
저녁부터 딜런 허프가 오기를 기다리며 재잘거리던 그녀가 말을 그만두자 방 안이 금세 조용해졌다. 루시 역시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촛불을 끄고 침대로 갔다.
그때였다.
덜컹.
어디선가 작게 창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덜컹, 덜컹.
그 은밀한 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연달아 이어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제미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어두운 방 안, 달빛을 받은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가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그런 뒤 조심스럽고도 성급한 손길로 창문을 열었다.
“루시!”
창문 아래를 빼꼼 내다본 제미마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작게 소리쳤다.
“이리와 봐, 어서!”
그녀의 성화에 루시는 할 수 없이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가 제미마처럼 아래를 내려다보자 건물 벽 아래에 서 있는 예닐곱 명의 남학생들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위를 보니 남학생 한 명이 이미 일 층 근처까지 벽을 타고 오른 상태였는데, 바로 딜런 허프였다.
그는 검술부다운 튼튼한 육체를 이용해 능숙하게 벽을 올랐다.
“세상에, 저 바보짓을 하는 사람이 진짜 있다니.”
루시는 경악스런 얼굴로 혀를 찼다.
입학한 이래 작은 벌점도 받지 않으려 바른 생활을 유지해 온 그녀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 여학생들도 창문으로 눈만 빼꼼히 내밀고 딜런을 보며 키득거리는 중이었다.
“저기 좀 봐. 클레어 선배야.”
제미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클레어가 이미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딜런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루시가 눈살을 찌푸렸다.
“학생회가 저래도 돼?”
“뭐, 어때. 어차피 걸려도 클레어 선배가 잡아떼면 벌 받는 건 딜런뿐일 텐데.”
마치 자신이 꽃을 받기라도 할 것처럼, 제미마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청춘이네, 청춘이야.
루시는 한 번 더 혀를 찼다. 이런 소동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창가에서 떨어진 그녀가 이만 침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찰나.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벽을 빙 돌아 급박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래에 모여 딜런이 올라가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던 다른 남학생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벽을 올라오던 딜런이 밑에서 동요하는 남학생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야, 왜?”
그러나 그 질문에 대답을 한 사람은 남학생들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놈들아!”
모퉁이를 돌아 잠옷 차림의 플로라 사감이 나타난 것이다. 손에 든 등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번쩍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번 해는 잠잠하게 넘어가나 했더니!”
그녀는 즉각 손에 든 회초리를 쳐들며 남학생들을 향해 달려왔다. 갑자기 날아든 돌멩이에 참새 때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남학생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사감으로 있는 이상, 남자는 절대 못 들어와, 절대로오!”
플로라의 날카로운 외침이 붕붕대는 회초리 소리와 뒤섞여 밤하늘로 퍼져 나갔다. 창문에 붙어 그 모습을 구경하던 여학생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제미마도 마찬가지였다.
“딜런 좀 봐!”
호기롭게 벽을 타고 오르던 그는 밑에서 인정사정없이 회초리를 휘두르는 플로라의 기세에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벽에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레어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창문을 닫고 사라져 버렸다.
결국 회초리에 엉덩이가 찔릴 위기에 처한 딜런은 땅으로 폴짝 뛰어내린 후 잽싸게 어둠 속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서 잡아!”
플로라가 그녀를 따라 나온 선도부 여학생들에게 소리쳤다. 선도부 여학생 에밀리가 즉각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딜런의 뒤를 쫓았다.
“이름을 알아내 와, 에밀리! 내일 당장 교장실로 데려갈 테니까!”
남학생들과 선도부 여학생들이 사라진 어둠 속을 향해 플로라가 사납게 소리쳤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은 곧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여학생들에게로 옮겨졌다.
그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난 표정을 지으며 무시무시한 목청으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모두 일 층 홀로 집합!”
“……내 이럴 줄 알았지.”
루시는 한숨을 내쉬며 잠옷 위에 주섬주섬 가디건을 걸쳤다.
오늘 일찍 자기는 글렀네.
* * *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남학생의 기숙사 침입 시도에 격앙한 플로라는 여학생들을 불러다 놓고 한참이나 긴 설교를 늘어놓았다.
에밀리를 포함한 다른 건장한 선도부 여학생들에 의해 잡혀 온 딜런 역시 사감 앞에 무릎이 꿇려 앉아 있었다.
학생들은 모두 졸린 얼굴로 서서 그녀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슬슬 아파 오는 발목에 다들 삐딱하게 서 있게 되었을 즈음에야 플로라는 설교를 멈추고 여학생들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난 오늘 밤새도록 자지 않고 너희들을 지켜볼 거다. 방에 몰래 남자를 들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그녀에게서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가는 여학생들을 향해 플로라는 으름장을 놓으며 소리쳤다.
“다시 한번 말한다! 꿈도 꾸지 마!”
루시는 그녀의 서슬에 등을 움츠리며 서둘러 제미마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괜히 일 층에서 어물거리다가 눈에 띄어 잔소리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에이! 재미있을 뻔했는데.”
앞서 올라가며 꿍얼대는 제미마의 말에 대꾸하려던 찰나.
루시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며 계단에 우뚝 멈추어 섰다.
“왜 그래?”
그녀의 뒤에서 뒤따라오던 리타가 물었다.
“아니, 뭔가 본 것 같아서…….”
루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찰나였지만 여기에 있어선 안 될 얼굴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못 본 거겠지.
그러나 그녀는 우르르 복도를 걸어가는 여학생들 틈에서 한 여학생을 바짝 쫓아간 뒤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를 붙잡힌 여학생이 슬쩍 루시를 돌아보았다.
“코, 콜린……!”
길게 내린 앞머리 속에 감추어진 얼굴을 확인한 루시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려다가 가까스로 멈추었다. 콜린이 ‘쉿!’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꼴은 가관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여성용 슬립 잠옷을 입고 있었고, 나이트캡까지 쓰고 있었다. 그의 작은 체구 때문에 영락없이 여학생처럼 보였다.
“로제 선배한테 꽃을 바치러 가는 중이야.”
그가 들뜬 얼굴로 속삭였다.
“자정에 꽃을 주면 일라이자 콜과 식사 자리를 마련해 준다고 약속했거든! 그럼 난 서둘러야 해서 이만!”
그는 얼굴을 푹 숙인 채 정신없이 방으로 돌아가는 여학생들 틈에 뒤섞여 로제의 방이 있는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쟤 진짜 또라이 아냐?”
옆에 서 있던 제미마와 리타마저도 혀를 내둘렀다.
루시는 멀어지는 콜린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다가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란은 끝났다. 플로라가 으르렁대며 기숙사를 지키고 있는 이상, 이제 기숙사에 잠입할 남학생은 없을 것이었다.
콜린만 무사히 꽃을 전해 주고 나간다면 말이지.
“어휴,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 내 친구라니.”
그녀는 가디건을 벗어 의자에 걸어 놓으며 탄식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내일 날이 밝자마자 콜린에게 제대로 한마디 해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으악!”
그때, 창문을 닫으러 가던 제미마가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의 비명 소리에 루시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피, 필릭스 선배!”
놀랍게도 창턱에는 필릭스가 서 있었다.
밤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과 외출복을 보니, 이제 막 아카데미에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루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붙잡았다.
“서, 선배! 여기 삼 층이에요!”
그러나 그는 루시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희번덕거리며 방 안을 둘러보기 바빴다.
“어디 있어?”
그가 물었다.
“네? 뭐가요?”
“노엘이 준 꽃 말이야!”
“꽃이라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루시가 필릭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사납게 얼굴을 찡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