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3화 (73/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3화

에릭은 불쑥 나타난 아드리안을 보고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쌍둥이 형을 자신을 가둔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지 않았던가.

에릭의 얼굴에 ‘다 들었을까?’ 하는 걱정의 빛이 곧바로 떠올랐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아드리안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얘기 중인데?”

그러나 그는 이미 에릭과 루시의 대화를 다 들은 사람처럼, 그다지 궁금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 묘한 태도에 에릭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계속 우물쭈물거리기만 하자 아니나 다를까, 아드리안이 직접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구관 건물에 갇혔던 얘기를 하는 것 같던데. 설마 루시를 의심하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아무 증거도 없이?”

에릭은 불안한 듯 눈을 굴리며 해명하려고 했지만 아드리안이 말을 가로막으며 거듭 물었다.

“에릭, 네가 루시의 물건을 훔쳤던 게 고작 몇 주 전의 일이잖아. 목걸이를 돌려주면서 했던 사과, 진심으로 한 게 아니었어?”

“그, 그때 한 사과는 진심이었어요! 그래서 루시도……!”

그러나 아드리안은 냉정하게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너 하는 행동을 보면 그때 한 사과가 진심 어린 사과로 보이지 않아. 그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것처럼 보여. 대체 루시가 널 가뒀다는 증거가 어디 있지? 그냥 널 미워하는 것 같다는 심증뿐이야?”

아드리안의 말에 에릭은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였다.

“네가 아카데미 내에서 도둑질을 하고도 대단치 않은 처벌을 받고 마무리된 거, 명목상으론 네가 물건을 먼저 돌려주고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는 이유에서였지. 그런데 난 지금 그 진정성에 의심이 가는데.”

아드리안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방금 내가 본 것에 대해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 볼까?”

그 말에 에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의 학업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교장이 사정을 봐주던 시절은 이제 없었다. 황궁 오찬 날 말썽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그는 교장의 눈 밖에 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행실에 대한 말이 교장의 귀에 들어간다면, 결코 그에게 좋은 상황은 되지 못할 것이었다.

에릭은 창백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 아니요…….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괜한 사람을 의심한 것 같아요.”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그런 뒤 그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허둥지둥 뛰어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에릭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드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화단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드리안이 돌담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을 보고 루시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갔다.

“아드리안 선배.”

“……쟤가 널 의심할 줄은 몰랐다.”

그의 나직한 말에 루시도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몰랐어요. 에릭이 절 의심할 줄은……. 저한테 와서 목걸이 돌려주며 사과할 때랑은 완전히 태도가 달라서……. 뭐, 상황상 쟬 싫어할 만한 사람은 저밖에 없다는 건 맞지만요.”

루시는 억울하고도 씁쓸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었다.

“……그거 나야.”

갑자기 아드리안이 불쑥 말했다. 머리 위로 썰렁한 바람 한 줄기가 홀연히 스쳐 지나갔다. 루시는 방금 들은 말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아 바보처럼 되물었다.

“네?”

“에릭을 구관 건물에 가둔 거. 나야. 내가 그랬어.”

뜻밖의 말에 루시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선배가요? ……왜요?”

그녀의 반응에 아드리안이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나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그냥 그 순간에는 갑자기 화를 참을 수가 없었어.”

낮게 읊조리듯 말하는 그의 얼굴은 씁쓸하면서도 서글퍼 보였다.

“쟨 자신의 유일한 경쟁 상대였던 너에게 피해를 끼쳤잖아. 말로는 미신 때문에 한 짓이라곤 하는데, 진짜 속셈은 그만 알 뿐이지. 루시, 에릭은 이번 중간고사에서 시험 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게 맞았어. 게다가 넌 이제까지 쭉…… 부당한 차별을 당해도 항의 한 번 못 하고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잖아.”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의 눈에는 오로지 슬픔만이 가득해 보였다.

“익숙해진 나머지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 겉은 괜찮아 보일지라도 속은 그렇지 않거든.”

루시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조금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에릭이 뻔뻔하게 황궁에 갈 걸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야기를 끝낸 아드리안은 시선을 땅에 고정한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루시는 걱정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오늘따라 그가 이상했다. 그가 이토록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항상 침착하고 빈틈없는 모습으로 후배들에게 든든한 존재가 되어 주었던 아드리안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얼굴에서 낯설고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선배, 괜찮으세요?”

루시가 조심스레 아드리안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가을 하늘만큼이나 청명한 그의 웃음소리가 공중으로 맑게 퍼져 나갔다.

“나 정말 웃기지?”

방금 전까지 슬퍼 보이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한 청년이 거기에 있었다.

“나도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어.”

“선배…….”

“그런데…… 생각보다 별거 아닌걸?”

그렇게 말하며 그가 어느 때보다도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루시를 바라보았다.

“규칙을 어기는 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닐 줄이야.”

희미하게 웃는 아드리안을 보며 루시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보기 좋고 부드러웠으나, 어쩐지 그 속엔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던 감정들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아서였다.

* * *

그날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진 후, 에릭은 루시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요 며칠 새 자신에게 기분 나쁜 눈빛을 보내며 거슬리게 했던 사람이 사라지니 루시는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드리안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에릭을 가둔 게 선배였다니.

그동안 루시는 누군가 자신을 구관에 가두었다고 말하는 에릭의 주장이 거짓말일 것이라 짐작해 왔다.

에릭이 비호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일부러 그를 가뒀을 것 같지는 않다고, 그러니 그의 말들도 단순한 피해망상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갇혔던 게 사실이라니, 게다가 그를 가둔 사람이 다름 아닌 아드리안 선배라니!

의지해 왔던 선배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루시는 혼란스러워졌다.

선배가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답지 않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동안 완벽하게만 보였던 아드리안에게도 남들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기 시작했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마지막 수업까지 끝낸 뒤 기숙사로 돌아온 루시는 휴게실에 모여 앉아 있는 학생들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루시는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제미마를 찾았다.

“제미마, 왜 3학년 선배들이 두 파로 나뉘어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거지?”

“기분 탓 아냐. 정말이야.”

제미마가 두 개의 무리로 앉아 있는 3학년 선배들을 눈짓하며 대답했다.

“로제 선배랑 클레어 선배 말이야. 또 신경전을 벌이고 있나 봐.”

그녀의 말에 루시는 휴게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각자의 무리 중심에 앉아 서로를 향해 날 선 눈빛을 띠고 있는 사람은 바로 로제와 클레어 헤밀턴이었다.

사실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광경은 아니었다.

둘 다 미모와 좋은 집안을 겸비했고 로제는 예술 쪽에서, 클레어는 학업 쪽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따르는 추종자들이 많아 저절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더 험악해 보이는걸?”

그러자 제미마가 씩 웃으며 루시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딜런 허프가 기사의 날 꽃을 클레어 선배에게 바치기로 했거든.”

기사의 날이란 11월 초하룻날 자정,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바치는 풍습이었다. 먼 옛날, 전설 속의 기사가 여신에게 꽃을 바쳤다는 데서 유래한 문화였다.

그 전설을 기념하며 매해 기사의 날이 돌아올 때마다 제국의 남자들은 미리 꽃을 준비해 두었다가 연인이나 아내에게 꽃을 바치곤 했다.

그런데 제노미움 아카데미에서는 이 낭만적인 행사를 실행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이유는 꽃을 바쳐야 하는 시각인 자정에 모든 학생들이 기숙사 안 각자의 방에 반드시 들어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시각에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꽃을 바치려면 교칙을 깨고 여학생 기숙사에 몰래 들어가야만 했다.

‘맞아. 작년에도 기사의 날에 한바탕 난리였었지.’

루시의 시선이 기억을 더듬듯 허공으로 향했다.

이성 간의 기숙사 출입이 금지된 제노미움.

특히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이 출입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고서야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여학생 기숙사를 담당하는 플로라 사감은 기숙사 건물 주변에 남학생이 얼씬거리기만 해도 으르렁대며 쫓아낼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학생 기숙사로 잠입해 꽃을 바치려 시도한 남학생은 매해마다 꼭 한 명씩은 있었다. 물론 그 누구도 플로라의 철통 보안을 깨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올해의 도전자는 딜런 허프라는 남학생인 모양이었다.

“딜런은 검술부의 유망주잖아. 건장하고, 괜찮게 생겼고, 인기도 많고. 로제 선배는 그가 자신에게 꽃을 주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클레어 선배에게 바친다니 심통이 단단히 난 거지.”

제미마의 말마따나 클레어를 노려보는 로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눈에서 금방이라도 불꽃이 쏘아져 나올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고작 꽃 하나 받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러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루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더욱 승부욕을 자극하는 거지! 금지된 곳에 몰래 침입해 꽃을 바치다니 얼마나 낭만적이야?”

제미마가 황홀한 표정으로 하는 말에 리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곧 그녀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냥 허세지, 뭐. 로맨스 소설에 보면 그런 장면들이 낭만적으로 묘사되잖아. 원수 가문. 허락받지 못한 연인.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높은 벽을 타고 올라가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남자.”

참 쓸데없이 기운도 좋다고 생각하며 루시는 로제와 클레어의 신경전을 관망했다.

“그나저나 로제 선배…… 자존심이 꽤나 상했겠는걸?”

“그러게. 안 그래도 선배 눈에 클레어 선배는 눈엣가시일 텐데. 그나마 꽃을 바치는 데 성공할 만한 인재를 빼앗겼으니.”

“아마 딜런을 이기려면 아드리안 선배나 필릭스 선배쯤은 되어야 할걸?”

제미마와 리타의 대화 중, 필릭스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루시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필릭스가 서해안으로 간 지 어느덧 닷새째.

분명 나흘쯤 걸린다고 했는데…….

그가 말한 날보다 하루가 더 지났건만 그는 여전히 아카데미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문의 일을 처리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필릭스 선배…….

루시는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속으로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선배, 보고 싶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