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2화
교장에게 되레 타박을 들은 뒤에야 에릭은 겨우 조용해졌다.
더는 황궁 오찬에 가지 못한 일에 대해 떠들지 않는 것은 물론, 루시에게 자신을 가뒀니 마니 헛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실에서나 도서관에서나 어디선가 꺼림칙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면 에릭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어 여간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
할 말이 있으면 와서 하라고!
루시는 어금니를 꽉 물며 속으로 외쳤다.
에릭이 구관 건물에 갇혔다고 주장하는 시간에 루시는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건 콜린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 동안 구관 건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만큼 루시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또 한 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루시는 에릭의 헛소리를 언제든지 상대해 줄 자신이 있다는 듯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섰다.
중간고사에서 에릭보다 낮은 등수를 받은 것은 납득하고 있었지만, 그 외의 다른 일들은 루시 역시 찝찝한 마음으로 남아 있었다.
목걸이를 도둑맞은 일, 그에 대해 에릭이 애매한 처벌을 받은 것, 그리고 한참 거슬러 올라가 입학식에서 자신 대신에 선서를 했던 일까지.
너만 억울한 게 아니라고, 에릭 로먼.
루시가 못마땅한 눈길로 칠판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 * *
“쟨 요즘 왜 널 저렇게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니?”
에릭의 음침맞은 눈빛은 곧 제미마와 리타까지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수업이 끝난 뒤 교실을 나서던 제미마는 곧장 루시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물었다.
“네 뒤통수에 구멍 뚫리는 줄 알았다.”
“어휴.”
그의 시선에 이제는 질려 버리다시피 한 루시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따지지도 않고, 저렇게 흘깃거리기만 한 것이 벌써 이틀째였다. 저러다 그만두겠지, 싶었지만 에릭의 꿍한 행동은 생각보다 더 끈질겼다.
더욱이 도난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 에릭이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루시나 베르크 쌍둥이는 나서서 소문을 내는 성격이 아니었고, 노엘 역시 친형의 일이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사정을 모르는 제미마와 리타로선 에릭의 저런 행동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너 쟤랑 무슨 일 있었어?”
이어진 제미마의 물음에도 루시는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 긴 사연을 말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얼른 가기나 하자.”
자신을 졸졸 따라오는 에릭의 눈길을 피하며 루시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어? 아드리안 선배인가?”
본관을 나오던 중, 리타가 정문을 향해 멀어지고 있는 한 남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엔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베르크 공자 하나가 정문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집에 가시는 건가?”
올해 들어 아드리안은 베르크 공작의 부름에 따라 평일에도 공작저로 돌아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하루에서 길면 나흘 정도 등교를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자리를 비울 땐 우리한테 꼭 말해 줬었는데. 이번엔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
“아!”
갑자기 제미마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설마 교대로 앨런 선배가 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난 도서관에 가지 않을 거야.”
그녀의 말에 루시와 리타도 인상을 찌푸렸다.
도서부 선배인 앨런 그로스는 도서관에 올 때마다 후배들을 부려먹고 짜증을 부리는 통에 그 누구에게서도 호감을 얻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3학년이 된 후엔 학업이 중요하단 핑계로 도서관에 잘 오지 않고 있었다. 일손이 하나 줄어든 셈이었지만 그가 부 활동을 하지 않는 데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그가 아드리안 대신 도서관 업무를 지시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을 터였다.
“물어봐야겠다.”
제미마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아드리안에게로 달려갔다. 제미마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아드리안이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순간, 제미마가 얼른 몸을 돌려 다시 급히 뛰어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은 당황스러워 보였다.
한달음에 계단을 뛰어 올라온 제미마가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허리를 펴고 선 그녀가 말했다.
“아이, 깜짝이야! 아드리안 선배가 아니라 필릭스 선배였어.”
자신에게서 도망치듯 멀어지는 제미마를 뚱하게 바라보던 필릭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이제 계단 위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루시를 향해.
이내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계단을 올라와 루시에게로 다가오자 제미마와 리타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필릭스가 루시 앞에 다가와 섰을 때 제미마가 리타를 쿡쿡 찔렀다.
“우리 먼저 갈게, 루시.”
그들은 루시가 붙잡을 새도 없이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내려간 뒤 순식간에 도서관을 향해 사라졌다.
“루시.”
필릭스가 그녀를 불렀다.
흐트러진 곳 없이 깔끔히 빗어 넘긴 금발, 단정한 옷차림.
가까이서 본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고상하고 점잖은 느낌이 났다.
“다행이다, 가기 전에 볼 수 있어서.”
“어디 가세요?”
“서부 해안에.”
“서부요?”
루시는 깜짝 놀랐다. 서부의 바닷가는 아카데미에서 꽤 멀었다.
“거긴 무슨 일로요?”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 나흘 정도 걸릴 거야.”
어쩐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바다에 가 본 적 있어?”
“아뇨.”
“난 어릴 적에 딱 한 번 가 본 적이 있어.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그러나 그 아름다웠다는 장소에 다시 간다는 사람치곤 기대하거나 설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얼굴에는 가기 싫은 티가 역력해 보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루시의 질문에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일로 다시 가게 될 줄은 몰랐거든.”
이런 일?
루시는 여전히 궁금한 얼굴이었지만, 필릭스는 따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때 멀리 정문에 서 있던 말이 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필릭스는 마차 쪽으로 눈길을 한 번 주더니 이내 아쉬운 얼굴로 루시를 보았다.
“그만 가 봐야겠다. 그럼 나…… 다녀올게.”
그는 마치 식솔에게 보고한 후 먼 길을 떠나는 가장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루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다녀 오……세요?”
그녀가 얼떨결에 한 대꾸에 필릭스가 기분 좋은 듯 웃어 보였다. 곧 그가 몸을 돌리더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그가 정문을 향해 점점 멀어져 갔다.
무언가 애틋한 배웅을 한 뒤, 루시는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 지나가는 학생들이 없기에 망정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순조롭게 끝나 가는 듯했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루시를 누가 벽 뒤로 끌어당기기 전까지는.
탁!
자신을 끌고 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루시가 손을 거칠게 쳐냈다.
“에릭!”
그녀가 손목을 주무르며 맞은편에 선 에릭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에릭은 그런 그녀에게 기분 나쁜 눈빛을 보내며 우물거리듯 말했다.
“그,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너지?”
이제 루시도 더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당당히 되받아쳐 줄 생각이었다. 그녀의 만만치 않게 단연한 눈빛에 에릭은 조금 주눅이 든 기세로 한 발 물러났지만,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날 가둔 거지? 발뺌할 생각 마.”
“아직도 그 소리야?”
“콜린이 아니라 필릭스 선배를 시켜서 한 짓이잖아. 아까 다 봤어. 너랑 그 선배랑 얘기하는 거…….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너 그 말, 필릭스 선배 앞에서도 할 수 있겠어?”
루시의 말에 에릭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떨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태도를 바꾸며 루시를 몰아붙였다.
“나, 난 분명 너한테 사과했어! 목걸이도 먼저 돌려줬고! 그런데 넌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너 나한테 사과한 거, 진심이기는 해?”
루시는 에릭이 자신에게 목걸이를 돌려주던 날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날,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노엘의 뒤에 숨어 한참이나 꾸물거렸다. 결국 아드리안과 노엘의 설득으로 그는 자신의 입으로 모든 잘못을 토로한 뒤 사과했다.
그때는 그의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고 루시도 안쓰럽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도둑질을 한 이유가 다름 아닌 시험에 대한 압박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더욱 한숨이 나왔다.
그 압박감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때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뻔뻔스럽게 그녀를 치졸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진심인 거 맞냐고. 아니면 노엘이랑 아드리안 선배 때문에 억지로 사과했던 거야?”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 에릭이 한풀 꺾여 주춤댔다.
“노엘은 널 위해서 그렇게나 애썼는데. 넌 도대체 뭐가 그렇게 꼬인 거야?”
“노엘과 비교하지 마!”
갑자기 에릭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들 노엘, 노엘, 노엘! 아주 지겨워 죽겠어! 걔, 걔가 그렇게 생각 없이 천진난만할 수 있는 건 짊어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야!”
그는 얼굴까지 붉히며 씩씩거렸다.
“하, 한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걘 몰라. 물론 너도 모르겠지! 아무도 내 심정을 몰라.”
그는 억울한 얼굴로 울분을 토해 냈다.
“그, 그냥 솔직히 말해 줘……. 나도 목걸이 훔친 거 솔직히 털어놨잖아. 네가 한 거 맞지? 다른 사람을 시켜서 날 가둔 게 맞잖아. 교장 선생님께는 말하지 않을게. 난 그냥 진실을 알고 싶을…….”
갑자기 에릭이 말을 멈췄다. 벽 뒤에서 어떤 기척이 들렸기 때문이다.
곧 누군가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아드리안이었다.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랭한 얼굴로 에릭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