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1화
루시는 당황하여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두 분 다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전 전혀 속상하지 않아요.”
그녀는 여전히 마주 보고 서 있는 쌍둥이를 살짝 밀어 떨어뜨려 놓았다.
“황제 폐하는 부담스러워서 안 뵙고 싶거든요. 말실수라도 해서 성문에 목이 걸리면 어떡해요?”
나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한 말이었지만 웃는 사람은 없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선 필릭스가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미안, 내가 너무 예민했다.”
그러고는 아드리안이 미처 대꾸하기도 전에 책장 앞을 떠나 버렸다.
그를 붙잡을 듯 손을 내뻗던 아드리안도 곧 팔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표정을 잘 내보이지 않던 그였다. 그러나 필릭스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다가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은 퍽 피곤해 보였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겨 정리한 그가 갑자기 루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며 책 수레를 가리켰다.
“봐, 두 명이 정리하니까 금방 끝났지?”
그는 루시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수레를 밀며 몸을 틀었다.
“자, 그럼 반납대엔 또 얼마나 쌓여 있을지 확인이나 하러 가자.”
* * *
아드리안에게서 황궁 오찬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난 후, 이상하게도 루시는 씁쓸했던 기분이 사라졌다.
물론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황궁 오찬에 가지 못하는 수석이 자신뿐만은 아니라는 데서 온 안도감이랄까.
‘루시 키넌 말이야, 평민이라 황궁 문턱도 못 밟게 됐대! 아무리 성적이 좋더라도 폐하 앞에 내보이기엔 교장도 부끄러웠던 모양이지.’
그런 모욕적인 말들도 아드리안이 황궁에 가지 않는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부턴 쏙 들어가 버렸다.
들으라는 듯이 자신과 황궁 오찬에 대해 떠들던 목소리들이 사라지자, 루시는 그제야 그 화제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구나 싶어졌다.
그렇게 오찬에 대한 일은 잊어버리려 했으나, 생각처럼 되지만은 않았다.
뜻하지 않게 황궁 오찬은 또 한 번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바로 세 명의 학생이 황궁으로 가기로 한 날, 에릭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아카데미는 발칵 뒤집혔다. 진작 마차를 타러 왔어야 할 에릭이 보이지 않자 교장은 사람을 풀어 에릭의 방과 그가 수업 듣는 교실들을 모조리 확인하도록 했다.
그러나 도서관과 식당, 정원까지 들어갔다 나온 직원도 그를 찾지 못했다.
“땅 밑으로라도 꺼진 건가?”
콜린이 비꼬듯 말했다.
“갑자기 사라졌던 양심이 돌아와서 제가 황궁 오찬에 가는 게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인지 깨달은 걸지도 모르지!”
콜린이 신랄하게 내뱉는 소리를 들으며 루시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바로 어제만 해도 에릭은 황궁 오찬에 가게 된 일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황궁으로 가는 마차가 떠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에릭은 보이지 않았고, 교장은 서둘러 에릭 대신 황궁으로 보낼 다른 학생을 뽑아야만 했다.
루시는 그게 아드리안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가 또 한 번 양보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결국 새로 뽑힌 학생은 미첼 반스라는 2학년생이었다. 바로 이번 중간고사에서 에릭 다음으로 높은 등수를 차지한 학생이었다.
무사히 황궁으로 갈 학생들을 모아 마차에 태워 보냈음에도 교장은 화가 나 길길이 날뛰었다. 본관 홀에서 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그의 모습을 목격한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황궁에서 초대한 행사 참석은 황제 폐하와의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멋대로 깨고 나타나지 않는 것은 황실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에릭이 멋대로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야 했던 교장은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만은 않겠다며 단단히 별렀다. 그는 당장 에릭 로먼을 찾으라며 한참 동안이나 소리를 질러 댔다.
“그 띨띨한 놈이 결국 대형 사고를 쳤네!”
홀에서 다른 학생들 틈에 섞여 그 모습을 구경하던 콜린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루시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애초에 널 보내기로 했으면 얼마나 좋아!”
에릭이 다시 나타난 것은, 아니, 발견된 것은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그는 다름 아닌 학생들의 출입이 금지된 구관 건물에서 발견되었는데, 문지기 프레드 영감이 순찰을 돌다가 어느 복도에 갇혀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발견해 꺼내 주었다고 했다.
창백해진 얼굴로 급히 돌아온 그는 곧장 화난 교장의 얼굴과 마주해야 했다. 그런 뒤 이미 마차가 황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대로 졸도했다는 소문이 온 아카데미로 퍼져 나갔다.
학생들은 온종일 에릭 로먼에게 벌어진 황당한 일에 대해 떠들어 댔다.
“에릭 녀석,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콜린이 들은 소문들을 루시에게 전해 주었다.
“양호실에서 일어나자마자 누군가 악의적으로 자신을 구관 건물에 가뒀다고 주장하나 봐.”
“가둬?”
“당연히 변명이겠지! 구관 건물은 학생 출입 금지잖아! 분명 지름길로 가려고 멋대로 들어갔다가 바보같이 갇혀 놓고는 혼나기 싫어서 하는 변명이겠지, 뭐!”
확실히 구관 건물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에릭에게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구관은 교장의 명령으로 폐쇄되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고, 이를 어기면 큰 벌점이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도부도 예의 주시하며 구관 건물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을 눈에 불을 켜고 잡아내곤 했다.
“바보 같은 녀석! 벌 받은 게 아닐까? 신도 걔가 얄미워서 황궁 오찬 기회를 빼앗아 가신 게 틀림없어!”
콜린의 말을 들으며 루시는 심드렁한 얼굴로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애초에 에릭이 기회를 잡든 놓치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 * *
그런데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었음을 루시는 곧 알게 되었다. 이틀 후, 수업이 끝나 교실을 나가려던 루시에게 에릭 로먼이 슬금슬금 다가와 이렇게 물은 것이다.
“너, 너야……?”
앞뒤 없는 질문에 루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과 이틀 만에 에릭은 초췌한 꼴이 되어 있었다. 밤새 잠도 설쳤는지 눈이 퀭했다.
“너지?”
“뭐가 말이야?”
“구관 건물에 날 가둔 거.”
그의 황당한 발언에 루시는 할 말을 잃은 채 입만 벌렸다.
“무슨 소리야?”
“분명히 봤어, 문 뒤에서 누가 걸어 잠그는 거. 너 맞지?”
그가 한 줌 남은 양심으로 간신히 도둑질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조용히 말했다.
“넌 날 싫어하잖아.”
아무래도 그는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어, 나한테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넌 나 때문에 네 일 등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날 몰래 뒤따라와서…….”
“너 미쳤니?”
루시는 진심으로 불쾌해져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러자 에릭이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목소리만 조금 작아졌다 싶을 뿐, 그는 루시를 의심하는 듯한 말들을 계속 이어 나갔다.
“아니면 코너 자식한테 시켜서 한 거 아냐? 나도 다 들었어. 걔가 널 대신해서 복수하겠다느니 뭐라느니 떠들고 다니는 거 말이야…… 도대체 뭐, 뭘 복수하겠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루시의 냉랭한 눈빛에 그는 시선을 피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과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에 루시가 따끔한 어조로 내뱉었다.
“난 널 가둔 적 없어. 그리고 콜린에게 그런 일을 하라 시키지도 않았고.”
“그, 그럼 콜린 코너가 제멋대로 한 짓일 수도 있겠네! 걘 널 무슨 공주처럼 떠받들고 다니니까……!”
루시가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에릭이 뻔뻔하고 음침한 구석이 있는 애인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피해망상이 심한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나 코너가 아니라면…… 누가 나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이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참다못한 루시가 언성을 높였다. 깜짝 놀란 에릭이 입을 다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평소에 네 행실을 다시 되돌아봐. 정말로 널 싫어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 내 목걸이 말고 또 누구 물건을 훔쳤는지 잘 생각해 보면 될 거 아냐!”
싸우는 소리를 듣고 복도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슬며시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릭은 얼굴이 벌게지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교실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루시가 가슴을 들썩이며 씨근덕거렸다. 설마 에릭이 황궁 오찬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신을 탓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뻔뻔해도 유분수지!”
막말로 에릭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 미신을 믿고 도둑질을 했다. 루시의 목걸이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물건까지 훔쳤을 줄 누가 알겠는가.
분명 자신 말고도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콕 집어 자신만 의심하는 건 아무래도 기분이 나빴다.
“내가 제일 만만한가 보지?”
루시는 언짢은 얼굴로 에릭이 사라진 문가를 노려보았다. 불쾌한 기분은 한참이 지나도 가시질 않았다.
* * *
그 뒤로도 에릭은 계속해서 누군가 자신을 일부러 구관 건물에 가두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목격자가 없었다.
그는 교장에게도 자신이 일부러 일정을 지키지 않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교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무려 황궁 오찬이라는 중요한 행사에 멋대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교장은 중대한 차질을 빚을 뻔한 에릭에게 굉장히 화가 나 있었고, 그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에릭은 아카데미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