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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0화 (70/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70화

“저 남자도 분명 로먼 자작의 청탁으로 온 기자겠지! 저렇게나 자랑스러우신 아드님이 정작 뒤에선 남의 물건이나 훔치고 다닌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려나 몰라?”

콜린은 드물게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루시로부터 목걸이가 없어졌던 사건의 전말을 들은 후로 에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데다가 이번에는 루시를 밀어내고 일등 자리까지 빼앗았으니 에릭에 대한 그의 감정은 더욱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흥! 가자, 루시.”

그가 요란하게 콧방귀를 뀌며 루시를 잡아끌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해! 일등 자린 다시 되찾고 말 테니까!”

콜린은 마치 자신이 일등 자리를 빼앗긴 사람처럼 분개하며 소리쳤다.

“그만해. 다 들리겠다.”

루시는 민망한 마음에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으려 했다.

“들으라고 해!”

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쳤다. 인터뷰를 하던 에릭이 흘끗 이쪽을 쳐다보았다. 루시와 콜린을 발견한 그는 금세 표정이 안 좋아졌지만, 이내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루시는 몇 마디 더 소리치려는 콜린을 진정시키며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이번 중간고사만큼은 에릭이 잘못한 게 없잖아.”

루시는 인지하고 있었다. 에릭 로먼이 부당하게 자신의 일등 자리를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는 걸.

그녀가 시험을 망친 이유는 분명했다. 시험을 치르는 동안 그녀 스스로 집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에릭이 아닌 다른 데 있었다.

어쩌면 집중력이나 정신력에서만큼은 에릭 로먼이 한 수 위였는지도 모른다. 루시는 마음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단숨에 삼 등이나 추락해 버렸지만, 에릭은 도둑질로 인해 아카데미로부터 징계를 받아 놓고도 뻔뻔하게 평소의 실력을 유지했으니.

“아무튼 아카데미는 에릭에게서 시험 기회를 박탈하진 않았어. 걘 정당하게 시험을 보고 점수를 받은 거야.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결국 나를 이상하게 볼지도 몰라, 콜린.”

루시의 말에 결국 콜린은 에릭에 대한 비난을 멈추었다. 여전히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대기는 했지만.

결과가 충격적이긴 했지만 중간고사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이제 와서 결과를 바꿀 순 없었다.

게다가 장학금 문제도 후원자를 구함으로써 일단락된 터였다. 계속 시험 결과를 아쉬워하며 자책하기보다는 기말고사를 열심히 준비하는 게 더 현명한 일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루시는 한동안 펼쳐 볼 수도 없었던 책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의욕을 한풀 꺾어 버리는 소식 하나가 아카데미에 퍼졌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일등을 한 학생들은 모두 황궁에서 열리는 오찬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특혜를 주네!”

전날, 루시의 만류로 겨우 입을 다물었던 콜린이 또다시 골을 내기 시작했다.

“네가 수석일 땐 별 취급도 안 해 주더니! 로먼 자식이 일등을 하자마자…….”

“우연이야, 콜린. 황궁에서 에릭이 일등하기를 기다렸다가 오찬을 연 것도 아닐 텐데.”

루시가 태연하게 말했다.

이번 황궁에서 열리는 오찬에는 수도의 명문 아카데미마다 단 세 명의 학생들만이 초대되었다고 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 열리게 되었으므로 최근에 일등을 한 에릭이 참석하는 것도 당연하게 보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찝찝한 구석도 있었다.

“당연히 수석이 가야 하는 거 아냐? 아직 이번 학기 최종 성적이 나오지 않았으니 여전히 학년 수석은 너잖아, 루시!”

콜린이 말한 대로였다. 아직 학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기말고사도 치르기 전이었으니 2학년의 공식적인 수석은 여전히 루시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세 학기 동안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비록 이번 일등은 아깝게 놓치고 말았지만.

여러모로 따져 볼 때 황궁 오찬에 참석할 자격에 제일 적합한 사람은 루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카데미 측에서 지목한 학생은 에릭이었다. 오찬에 참석할 사람을 뽑는 것은 순전히 교장의 권한이었으므로 의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문득 입학식 날이 떠올랐다. 수석 입학생인 자신을 대신해 단상 위로 올라가던 에릭 로먼…….

오늘 일이 그날과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황궁 오찬에 꼭 참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또 한 번 출신으로 인해 차별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찜찜한 생각이 들자 루시는 기분이 씁쓸해졌다.

* * *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던 루시는 자신 말고도 황궁 오찬에 참석하지 않는 수석이 또 한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드리안 선배.”

책장 뒤에서 나타난 그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간신히 입가에 옅은 미소만 띠고 있었다. 그가 루시를 도와 책을 정리하려 들자, 루시가 얼른 그를 막았다.

“여긴 제가 혼자 해도 되는데 왜 오셨어요?”

그녀는 당연히 그가 내일 있을 황궁 오찬에 참석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일 황궁에 가셔야 하잖아요? 들어가서 쉬세요.”

“난 황궁 안 가는데.”

뜻밖의 대답에 루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간다고요? 하지만…… 선배가 아니면 누가 가요?”

그러다가 또 다른 3학년 일등을 떠올렸다. 동시에 아드리안이 책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필릭스가 갈 거야.”

의외였다. 필릭스라면 분명 그런 자리를 성가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드리안도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교장이 먼저 필릭스에게 권했고 웬일로 마다하지 않더라.”

“필릭스 선배가요?”

“그런 자린 죽어도 싫어하면서. 아무튼 황궁에 초대받은 인원은 셋뿐이고 교장은 나와 필릭스, 그리고 2학년의 에릭 로먼을 추천했어. 그런데 한 가문에서 두 명씩이나 갈 필요는 없다고 느꼈거든. 그래서 내가 양보했지. 다른 한 자리는 1학년 일등이 가게 되었어.”

말을 하던 아드리안이 갑자기 안타깝고 미안한 얼굴이 되더니 말했다.

“네가 가게 되는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 교장이 널 뽑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거든. 이전에 있었던 도난 사건도 그렇고, 그간 에릭보다 네 성적이 더 뛰어났었으니까.”

그는 루시의 표정을 살피다 슬며시 물었다.

“……많이 실망했지?”

그가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도…… 나도 그 기분 알아. 아무리 발버둥 치고 뛰어 봤자 결국 내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는 정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끼는 허탈감.”

그 순간 아드리안의 얼굴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 떠올라 루시는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침울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황궁을 방문하는 일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에요, 전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애초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요.”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한평생 평민으로 살아왔으니 그녀는 황실 예법은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 당연히 지켜야 할 예절 같은 것도 몰랐다.

만약 그녀가 황궁 오찬에 초대받았다면 벅차고 영광스럽기보다는 부담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여기에 다니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겐 황궁 방문이 대단한 영예겠지만…… 저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제가 거길 방문해서 폐하를 직접 뵌다 하더라도 제 삶이 크게 바뀔 것 같지도 않고요.”

“무슨 소리야, 루시. 황제 폐하께선 귀족 출신이 아닌 사람들의 능력과 재능도 눈여겨보고 계셔.”

아드리안이 퍽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루시는 괜히 들추어 보던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황가가 아닌 다른 가문들이 비대하게 커져 가는 지금 상황에선 더더욱 새로운 세력을 원하고 계시지. 지배층 귀족들의 세력을 계속 유지시키기 보다는 신흥 세력을 키워 적당하게 평형을 맞추길 원하시니까.”

그리고 그는 루시가 몰랐던 뜻밖의 얘기도 해 주었다.

“제노미움 아카데미가 귀족 출신이 아닌 학생들도 받아들이기로 한 것, 폐하의 입김이 있어서라는 걸 몰랐어?”

“네? 전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살던 루시로선 알 턱이 없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내 추측이지만…… 황실에서는 네가 오찬에 참석하길 바라고 있는지도 몰라. 작년 제노미움에 수석으로 입학한 사람이 귀족 출신들을 가볍게 찍어 누르고 나타난 무시무시한 여학생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갑자기 오찬을 연 것도 이번 기회에 널 한 번 봐 두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에이, 설마요.”

망상에 가까운 추측이었지만, 말하는 사람의 얼굴은 꽤나 진지했다. 루시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절 놀린 거예요?”

그답지 않게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는 아드리안을 보며 루시가 입을 삐죽였다.

“미안. 근데 네가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하는 말에 루시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요. 전 정말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요.”

“어딜 말이야?”

그때 책장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필릭스가 나타났다.

그는 이전에 도서관에서 루시와 노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처럼 언짢은 눈빛으로 물어 왔다.

“……어딜 가는데?”

목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둘이서 가는 거야?”

“무슨 소리야? 우린 내일 있을 황궁 오찬 얘길 하는 중이야.”

“아.”

그제야 필릭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돌연 이마를 찌푸렸다.

“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2학년 대표로는 네가 갈 줄 알았어.”

필릭스가 루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로먼네 좀도둑 놈이 간다는 거야?”

루시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나섰다.

“그 얘긴 너 오기 전에 이미 한참 했어. 그리고 지금 제일 속상한 건 루시일 테니 너까지 더 말 보탤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아드리안의 말투는 딱히 면박을 주거나 민망하게 하려는 의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릭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필릭스의 얼굴에서는 금방 스르륵 표정이 빠져나갔다. 표정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완벽히 무표정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전보다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드리안을 마주 보고선 필릭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드리안 베르크. 루시가 속상해할 거라는 건 나도 잘 알아. 그러니까 네가 대신 일일이 알려 줄 필요는 없어.”

필릭스의 정색에 아드리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그 역시 만만치 않게 기분이 나빠진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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