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9화
마차가 출발한 후 한참 동안이나 필릭스는 말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 그저 창밖으로 지나가는 건물들을 멀거니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온종일 쓰고 다니던 모자를 옆에 벗어 놓은 그의 이마 위엔 까만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다. 루시는 자세를 고쳐 앉는 척하며 그의 얼굴을 몰래 보았다.
그는 분명 낡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타고난 고귀함이 태도에서부터 풍겨 나오는 듯했다. 명문 베르크가의 상징이라 여겨졌던 금발을 숨긴 상태인데도 그의 귀족다운 면모만은 감출 수 없어 보였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평소의 장난기 많던 모습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고 보니 식물원 떡갈나무 안에서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 같은데.
루시는 그의 옆모습에서 다시 눈길을 거두며 생각했다. 분명 그는 나무 동굴 안에서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었다.
그런데 막상 루시와 단둘이 남겨지게 되자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는 이제 붉은색보다 짙은 푸른색이 더 많이 감돌고 있었다. 루시는 해가 산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늘 피곤했지?”
필릭스가 갑자기 물었다. 그 바람에 루시가 그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느새 팔짱을 풀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신없는 자식 상대해 주느라.”
“아…… 그런데 재미있었어요. 식물원에 가 본 건 처음이어서요.”
“그래, 재밌긴 하더라. 신기하고…… 괴상하고…….”
그는 식물원에서 본 기이한 식물들의 모습을 떠올린 듯 잠깐 천장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표정을 푼 그가 옆에 놓아두었던 작은 포장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식물원에서 루시에게 받은 작은 화분이 들어 있었다. 그가 포장 끈을 풀었다 묶었다 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다 못 본 곳은 다음에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말에 루시는 선뜻 대꾸할 수 없었다.
진심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필릭스의 변장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인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루시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불쑥 합류한 사람은 자신이면서 마치 노엘이 불청객인 양 온종일 쫓아내 버리려 하지 않았던가.
선배가 어떤 마음인지 도통 모르겠어.
그의 마음을 짐작해 보려 할수록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루시에게서 아무런 대꾸가 없자 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만이 마차 안을 채웠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하게 가나 싶었는데 필릭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 너한테 화난 적 없어.”
루시가 고개를 들었다. 필릭스는 이제 완전히 그녀에게로 몸을 돌린 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는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의 의미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떠올렸다. 그날 밤, 자신이 필릭스를 찾아가 했던 말을.
“선배. 선배가 왜 화가 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의 기분과는 별개로, 전 요 몇 주 동안 선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필릭스는 머뭇거리다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때 네가 했던 말처럼…… 나도 너랑 있는 시간이 즐거웠어. 물론 지금도 그렇고.”
그의 담담한 말에 루시는 눈만 끔뻑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에게서 들을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라 얼떨떨했다.
루시가 대꾸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자 필릭스는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미심쩍어한다고 생각했는지 강한 어조로 덧붙였다.
“이건 진심이야.”
그와의 관계에 대해 일말의 희망도 가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루시의 마음이 속절없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맞은편의 필릭스 역시 얕은 숨을 뱉어 낸 뒤 고개를 떨어뜨렸다. 흔들리는 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나…… 공작이 될 거야.”
이번에도 역시 의미를 모를 말이었다.
“선배는 원래 공작님이 될 거잖아요.”
루시의 말에 필릭스가 힘없이 웃었다.
“그래, 맞아. 난 원래 공작이 될 예정이지.”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눈빛이 결연하게 바뀌었다.
“그래, 난 공작이 될 거야. 아버지도 어쩌지 못할 만큼 완벽한. 그래서 너도, 아드리안도…….”
루시는 그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필릭스는 입을 다물더니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빛은 이제껏 보아 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반쯤은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또 반쯤은 절망스러워 보이는.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지금은 말하기 어려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이제까지 내가 널 얼마나 속상하고 답답하게 했는지 알아.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내가 그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감히 내 결정에 간섭할 수 없을 때까지.”
필릭스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해 보였다.
“만약 그때까지도 네 마음이 변치 않아 준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어.”
루시는 숨을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가만히 그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내 마음…….
혹시 선배는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일까.
분명 그와 함께하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고, 그러니 그와 거리를 둬야 한다고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그토록 그녀를 좌절시켜 왔던 신분이나 배경 같은 것들이 그저 하찮은 문제가 되어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가, 강고한 눈빛이, 마치 ‘나도 네 마음과 같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면 자신의 지나친 착각인 걸까.
혹시 그 또한 앞으로도 계속 자신과 함께할 수 있기를 원하는 거라면, 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 역시 그를 믿어 봐도 괜찮은 걸까.
이윽고 루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선배.
선배가 저에게 하려는 말이, 부디 제가 바라는 그 말이었으면 좋겠어요.
마음속으로 조용히 자신의 진심을 덧붙이며.
그제야 필릭스가 마음을 놓은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에 관계없이, 마차는 여전히 성실하게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 * *
마차가 멈췄다. 마부가 다가오더니 문을 열었다. 먼저 내린 필릭스가 루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조금 망설였지만 이내 그의 손을 잡고 땅으로 내려섰다.
마차에 탈 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루시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너울거리는 것을 느꼈다.
“오늘 즐거웠어.”
그녀의 들뜨는 기분을 좀처럼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려는 듯 필릭스가 말했다.
“그럼 들어갈까?”
그는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정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둘은 교정에 난 산책로를 따라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기숙사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즈음 아카데미 본관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가까이 오지 않아도 그가 아드리안이라는 것을, 어둑해진 하늘 아래서도 희붐하게 빛나는 금발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루시를 먼저 알아본 듯 미소를 지은 채 걸어오다가 옆에 서 있는 필릭스의 형체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그들 앞에 다가와 선 그는 모자 아래 가려진 얼굴이 형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이 가늘어졌다.
“필릭스?”
아드리안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형의 검은 머리, 낡은 옷 등을 훑어보았다.
“꼴이 그게 뭐야?”
이내 그의 시선이 필릭스에게서 루시에게로 옮겨 갔다. 곧 그녀가 외출복 차림임을 발견한 그가 물었다.
“둘이 외출했었어?”
“……응. 식물원에.”
뜸을 들이던 필릭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식물원?”
아드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필릭스를 보았다. 마치 ‘네가 그런 데도 관심이 있었어?’ 하는 표정이었다.
“둘이?”
“응.”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둘이 그 정도로 친했었나?”
“노엘이 먼저 얘기해서 같이 가게 되었어요. 아까 부모님을 뵈러 집으로 돌아갔지만.”
루시가 얼른 둘러댔다.
“신기한 조합이네.”
아드리안이 손으로 턱을 쓸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시작된 친목인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곧장 의아함을 털어 버린 그는 순수하게 궁금한 얼굴로 질문을 던져 왔다.
“그래서, 식물원은 어땠는데? 필릭스 네가 꽃을 보러 가다니, 정말 의외다.”
“꽃 같은 건 없었어. 아니, 있었나? 그것도 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필릭스가 대답을 하다 말고 어물거리자 아드리안이 “대체 무슨 말이야.”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웃음기가 얼굴에 남은 채로 그는 루시에게 말했다.
“가자, 루시.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줄게.”
“내가 데려다주면 되는데.”
필릭스가 얼른 동생의 말을 가로챘다.
“난 루시가 불편해할까 봐 그러지.”
“내가 불편해?”
필릭스가 뚱한 얼굴로 루시를 향해 물었다. 루시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아드리안의 말에 필릭스는 살짝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루시가 얼른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 다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기숙사 앞까지는 저 혼자서도 갈 수 있는데요.”
그제야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장소는 어두운 뒷골목이 아닌 아카데미 교정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머쓱해졌는지 쌍둥이는 동시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루시는 왠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 감추며 여학생 기숙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아드리안이 지켜보고 있는 탓에 그녀는 필릭스에게 별다른 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아주 잠깐 그를 흘긋 본 뒤 몸을 돌렸을 뿐이었다.
‘잘 자.’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필릭스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어두운 게 다행이었다. 루시는 고개를 숙여 붉어지려 하는 뺨을 감춘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찝찝하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 후원자를 구했다는 안도감, 주말 동안 식물원에서 한 기분 전환.
그리고 필릭스와의 관계에서 가지게 된 희미한 희망.
여러 가지 기분들이 뒤섞여 루시는 마침내 전교 4등의 충격에서 점차 헤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일 층 게시판에 붙어 있는 등수 표를 보아도 도망치듯 달아나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며 굳게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데미에서 에릭 로먼과 마주칠 때마다 씁쓸해지는 기분은 막을 수가 없었다.
에릭은 도난 사건 이후 루시를 은근히 피해 다녔다. 복도 끝에서 걸어오다가 먼저 루시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방향을 틀어 도망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같은 학년이었기에 듣는 수업이 자주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만년 차석만 하다가 마침내 차지한 일등 자리가 어찌나 감격스러웠던 것인지 그는 어느 신문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기까지 했다.
이제껏 그 어떤 학생도 중간고사에서 일등을 했다고 이렇게까지 수선을 떨었던 적은 없었다.
“꼴값 떤다.”
루시와 함께 걷던 콜린이 에릭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에릭은 교정의 어느 벤치에서 신문사의 기자로 보이는 한 남자와 함께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