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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8화 (68/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68화

마지못해 내뱉은 인사를 들은 노엘이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끅끅대는 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필릭스는 더욱 얼굴을 붉힘과 동시에 당장이라도 노엘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눈을 사납게 빛냈다. 그러나 노엘은 그 표정을 미처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인지 그저 배를 잡고 웃느라 바빴다.

실컷 웃어 댄 노엘은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는 눈물까지 고인 눈가를 손가락으로 훔치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루시를 데리고 테이블로 향했다.

나가서 두고 보자.

뒤를 따르며 노엘의 뒤통수를 노려보는 필릭스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앞선 신경전과는 다르게, 그들의 식사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노엘이 줄곧 필릭스를 약 올렸던 것과는 다르게 식사를 할 때만큼은 얌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필릭스가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문제였다. 주변 테이블에서 자꾸만 루시네 테이블을 흘끔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노엘의 말쑥하고 고급스러운 차림새를 한 번 쳐다본 뒤 곧장 맞은편에 앉은 필릭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더니 그의 낡은 셔츠와 헤진 바지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종국에는 필릭스도 그런 시선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들어 대놓고 사람들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쳐다보던 손님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다시 저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아무리 봐도 하인으로밖에 안 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놈이 감히 귀족들에게 불경한 눈빛을 보내는 것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변장은 완벽한데 연기는 형편없네요, 필. 귀족 나리들을 그렇게 째려보는 건방진 하인이 어디 있어요?”

심기 불편해 보이는 필릭스의 얼굴을 발견한 노엘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변장 소품을 구하던 정성으로 연기에도 진심을 담아 보시죠?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그 옷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건데요?”

그 질문에는 루시도 고개를 돌려 필릭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귀족 자제들만 있는 아카데미 안 어디에서 그런 옷을 어디서 빌려 올 수 있었는지 그녀도 궁금하던 차였다.

“……문지기 영감 오두막 마당에 걸려 있기에 가져왔는데.”

필릭스는 자꾸만 질문을 던지는 노엘이 귀찮은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프레드 영감님 옷이란 말예요?”

노엘이 기가 찬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낡은 옷이라 해도 그렇지, 남의 옷을 막 가져다 입으면 어떡해요?”

“누가 막 가져왔대? 난 당당하게 필요하다 말하고 삯까지 지불했어.”

말하면서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는지 필릭스가 과장스럽게 그를 비웃으며 쏘아붙였다.

“누구처럼 씻고 있던 사람의 옷을 훔친 것도 아니라고. 이런 넝마 조각에도 정당하게 비용을 지불했단 말이야. 아주 ‘양심적으로’!”

그가 마지막 단어에 특히 힘을 주며 말했다. 제 친형의 나쁜 손버릇을 비꼬는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노엘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애써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옷도 옷이지만, 염색까지 정말 감쪽같네요. 계속 검은 머리로 다니는 건 어때요? 아드리안 선배랑 헷갈릴 일도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썰어 낸 고기를 입에 넣으려던 루시가 무심결에 소리쳤다.

“안 돼!”

급히 소리친 탓인지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와 그녀 자신도 살짝 놀란 눈치였다. 황급히 루시는 입을 가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게…… 아무래도 선배가 검은 머리면 영 어색할 것 같아서…….”

그녀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자 필릭스가 자신의 접시로 다시 고개를 내리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검은 머리로 다닐 생각은 없어. 그리고 머리는 다시 기를 거야.”

“예전처럼요?”

노엘이 반색하며 물었다.

“결심 잘하셨네요. 그동안 아드리안 선배랑 구별하기 힘들어서 얼마나 헷갈렸는지 아세요? 며칠 전, 기억나시죠? 제가 아드리안 선배인 줄 알고 아는 척했던 거.”

그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그때 무슨 벌레 보듯 쳐다봐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요? 꼭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무안 줬어야 했어요?”

노엘이 입을 삐죽거리며 길게 불만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루시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고기만 쿡쿡 건드리고 있었다.

사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다시 머리를 기를 것이란 필릭스의 결정은 루시에게도 반가운 말이었다.

마치 금실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긴 머리칼.

그 아름다운 금발은 필릭스가 뒤로 쓸어 넘길 때마다 그의 반듯한 이마와 넓은 어깨 위에서 부드럽게 굽이치곤 했다.

루시는 그의 긴 머리칼을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보고픈 충동이 치밀기도 했다. 물론 단 한 번도 그의 머리에 감히 손을 대 본 적은 없었지만.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 기회는 절대 없겠지.

루시는 필릭스의 머리를 몰래 바라보았다. 학기가 시작된 이래 그의 머리는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아도 제법 자라 있었다.

저 머리가 다시 길게 자라려면 얼마나 더 걸리려나.

루시는 바람에 하늘거리던 예전의 긴 금발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그 생각들이 조금 부질없다고 느껴져 그녀는 황급히 다시 고기를 입 안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 * *

식사가 끝났을 때, 하늘은 오묘한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푸른색, 보라색, 분홍색이 뒤섞인 해질녘의 장관을 바라보며 루시는 몰래 배를 쓸어내렸다. 어찌나 부르던지 제대로 걷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고마워, 노엘. 맛있는 식사였어.”

식당을 나온 뒤에 루시가 노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여기서도 계산은 필릭스 선배가 했어요.”

“뭐? 또?”

“글쎄요, 어지간히 잘 보이고 싶나 보죠, 뭐.”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에 루시가 식당에서 나오고 있는 필릭스를 돌아보며 다가가려 했지만, 노엘이 얼른 붙잡았다.

“안 돼요, 안 돼.”

그는 루시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려세우더니 광장 쪽으로 걷게 했다. 그러면서 필릭스가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또 고맙다는 말하려고 그러죠?”

“……고마우니까 고맙다고 해야지.”

“으이그.”

노엘은 한참 어린 동생을 나무라는 것처럼 말했다.

“선배, 아직 때가 아니에요.”

“무슨 때?”

“눈치라곤 쥐똥만큼도 없는 인간, 아직 받아 줘선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계속 관심 없는 척하세요.”

루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노엘을 밀어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오늘 계속 필릭스 선배를 놀리기나 하고.”

“놀리는 게 아니라, 이게 다 선배를 도우려는 거예요.”

노엘은 다시 루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끌어당겼다.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이게 아마 제일 효과적인 방법일 테니까!”

곧 바짝 붙어 걸으려는 노엘과 그런 그를 떨쳐 내려는 루시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러나 노엘은 거듭 자신의 뜻을 내세우며 미심쩍은 도움을 주려 용을 쓰고 있었다.

“떨어지지 그래?”

화살 같은 필릭스의 목소리가 뒤통수로 날아와 꽂혔다. 노엘이 냉큼 루시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봤죠? 반응이 즉각 온다니까요?”

그러더니 필릭스를 돌아보며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뭐가요?”

“사람한테 왜 그렇게 들러붙어 대? 싫어하는 거 같은데.”

“누가 싫어한다 그래요? 루시 누나랑 아주 중요한 얘기 중이라고요. 신경 끄시죠.”

노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필릭스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그 어느 때보다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노엘과 루시를 빤히 쳐다봤다.

“누……나?”

그러자 노엘이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되받아쳤다.

“형은 아니잖아요?”

필릭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루시는 서둘러 노엘에게서 떨어져 불안한 눈으로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참고 참은 그의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이러냐?”

필릭스가 감정을 억누르듯 낮게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래서 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런 반응에 노엘도 흠칫 몸을 떨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가 입을 가린 채 루시에게 살짝 말했다.

“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여기서 더 건드리면 역효과 나요.”

그러더니 그는 여상하게 웃어 보이며 필릭스에게 대꾸했다.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는 이미 다 생각해 놨죠.”

그는 갑자기 길 건너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곳에는 고급 마차 하나가 서 있었다. 마부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노엘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노엘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다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이만 가 볼게요. 아버지가 마차를 보내셔서요.”

“어? 집에 간다고? 아카데미가 아니라?”

루시의 황당한 목소리에 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도 휴일이잖아요. 집에 가서 느긋하게 쉬다 오려고요.”

그는 ‘이제 됐냐’는 표정으로 필릭스를 보았다. 그러자 필릭스는 팔짱을 끼더니 ‘꺼질 거면 빨리 꺼지라’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노엘은 못마땅한 듯이 눈알을 한 번 굴리고는 루시가 붙잡을 틈도 없이 인사를 던졌다.

“예, 그럼 이만 꺼져 볼게요. 아카데미에서 봐요, 루시 누나!”

필릭스가 뒷덜미를 낚아채기 전에 노엘은 얼른 마차를 향해 튀었다. 그의 약삭빠른 발소리가 길 건너편으로 사라지자 어느새 루시는 필릭스와 단둘이 남은 상태가 되었다. 긴장한 그녀가 뻣뻣하게 차려 자세를 했다.

필릭스 역시 갑작스레 루시와 단둘이 있게 되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이마를 긁적였다.

숨 막힐 듯한 상황에 놓인 루시는 노엘의 존재가 다시금 간절해졌다. 쓸데없고 실없는 이야기라도 좋으니 노엘이 다시 돌아와 떠들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게 필릭스를 등진 채로 서 있는데 그가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이만 돌아갈까?”

루시는 목각 인형이 삐걱대는 것처럼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러 대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는 곳에 도착한 둘은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위해 작은 개인 마차 하나를 빌렸다.

베델에서 제노미움까지는 분명 마차를 타고 몇십 분은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오전에 노엘까지 셋이서 올 때는 그리 어색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 협소한 공간에 필릭스와 단둘이 앉아 갈 생각을 하자 루시는 벌써부터 긴장으로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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